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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투' 운동에 대처하는 남자들에게 고함
[류상태의 문화산책] 미투 운동에 대한 소고, 남자들은 공부 좀 합시다
 
류상태   기사입력  2018/03/08 [18:16]

우리 사회가 총체적 충격에 빠져들었다. 하루하루 지날 때마다 탄식이 터져 나온다. 미투운동이 진행되는 걸 보면서 나 역시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한 충격을 적어도 두 번은 느꼈다. 연기자 조재현과 정치인 안희정의 이름이 언론에 올랐을 때다.

 

연예인의 신상에 대해 둔감한 내가 조재현이라는 연기자를 처음 알게 된 건 그가 TV드라마 <징비록>에서 정도전 역을 맡았을 때였다. 열연하는 그의 연기에 빠져들어 어느 순간부터 그를 볼 때마다 정도전의 이미지를 덧대고 보게 된 것 같다.

 

냉철한 이성주의자, 손톱만큼의 비리도 용서하지 못하는 완벽주의자의 면모가 그의 얼굴에서 풍겨나는 듯 했다. 드라마가 끝나고 한참 지난 후에도 조재현과 정도전을 분리해내지 못했으니 미련한 건지 주책인 건지 나도 모르겠다.

 

안희정 전 도지사에 대해서는 안타까움을 넘어 속이 많이 상한다. 그에 대하여 하고 싶은 말이 있지만 아직은 좀 더 지켜보는 게 나을 것 같다. 대신 이 문제 전반에 대한 내 생각과 제안을 좀 나누고 싶다. 안희정을 포함하여 더불어 살아가는 우리 시대 모든 남자들과 나누고 싶은 말들이다.

  

1. 남자가 남자에게

 

남자인 내가 남자들에게 이런 말을 하는 이유가 있다. 나는 대다수 남자들이 겪어보기 어려운 특이한 환경, 그러니까 여자들이 절대 다수인 사회에서 5년 넘게 살아본 경험이 있다.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에 이르는 젊은 나이에 여자고등학교에서 시간강사로 한 학기, 그리고 교목(학교 목사)으로 여자중학교에서 5년간 근무한 것이다.

 

학생들은 당연히 전체가 여자였고 남자라고는 교사들 중 절반 정도였으니 그 비율로 말하면 거의 50대 1정도로 여자의 수가 절대적으로 많은 사회였다. 하지만 교장 교감을 비롯하여 그 공동체의 권력(?)은 거의 소수의 남자들이 쥐고 있었다. 1980년대의 일이었지만 지금도 상황이 크게 나아지지는 않은 것 같다.

 

여자와 남자의 문제를 피해자와 가해자라는 대립구도로 보는 것 같아 불편하지만 일반적 상황이 아니라 성폭력이라는 주제와 관련된 상황이라는 점을 이해하고 들어주시기 바란다.

 

당시 내가 경험한 바에 의하면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는 사회에서 (전체 남교사가 아니라) 더욱 소수인 일부 남자들이 저지르는 갑질에 여교사와 학생을 막론하고 절대다수인 여자들이 겪는 고통은 의외로 크고 광범위했다.

 

그 기간 동안 정말 주책바가지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남자교사들의 엇나간 언행을 직접 보았다. 그로 인해 힘들어하는 여학생들과 상담을 하기도 했다. 그 경험으로 인해 나는 사회적 물리적 강자인 남자들이 약자인 여자들의 입장을 이해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조금은 느끼게 되었다. 일부 남교사들의 일탈이 나에게는 반면교사가 된 셈이다.

 

하여 태생적으로 ‘물리적 사회적 강자의 처지’에서 살아왔기에 그와 다른 환경, 그러니까 물리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약자 입장에 속한 여자들의 마음을 헤아리기 어려운 동질집단 사람들에게 내가 느껴온 문제들에 대해 생각을 나누며 제안도 하고 싶은 것이다.

 

그런데 내 스스로 먼저 고백할 것이 있다. 물리적 폭력과 성적 희롱을 아무런 죄책감 없이 행사하는 남교사들의 일탈현장을 목격하면서도 나는 그들에게 적극적으로 맞서지는 못했다. 힘없는 애송이 교사시절이었다고 말하면 변명이 될 것이고 일정부분 방관자로 머물렀다고 고백하는 것이 맞을 것 같다.

  

2. 가해자와 가족을 연결시키지 말자

 

먼저 남녀를 떠나 이 문제와 관련하여 우리 사회의 모든 구성원들에게 부탁하고 싶은 것이 있다. 자신이 좋아하고 존경하고 믿었던 사람의 이름이 나올 때마다 놀라기도 하고 가슴아파하는 분들이 많겠지만 가장 아프고 슬픈 사람은 누굴까? 가해자로 거론된 당사자일까?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아마도 그 가족들일 것이다.

 

당사자들은 슬픈 감정보다는 당황스럽거나 억울한 느낌을 더 크게 가질 것 같다.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를 아는 사람은 들켰다는 사실에 당황스러워하겠지만, 억울하다는 느낌을 갖는 사람도 그 못지않게 많을 것 같다.

 

억울하다는 느낌을 갖는 사람 가운데 정말로 억울한 사람도 있을 수 있겠다. 하지만 그런 사람보다는 아직도 자기가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닫지 못한 사람일 가능성이 훨씬 높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런 분들에게 특히 내 말을 좀 새겨들어달라고 부탁하고 싶다.)

 

하지만 가족들은 아무 죄도 없이 아프고 슬프다. 가해자 당사자보다 그 가족들이 더 견디기 힘들 수 있다. 믿었던 아빠가, 사랑하고 존경했던 아빠가 그런 사람으로 도마에 오르게 되었으니 그 심정이 어떨까. 그의 아내가, 딸들이, 아들들이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지 걱정이 된다.

 

하여 이 글을 읽는 분들에게 먼저 부탁하고 싶다. 그리고 주변에도 그렇게 전해주시기 바란다. “가해자 개인의 일을 가족들에게 연결시키는 일은 제발 그만 두자”라고.

  

3. 하나의 해석, 수컷본능설에 대하여

 

요즘 일어나는 일을 수컷본능설로 해석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 같다. 당연히 남자들의 주장이다. 수컷본능이 존재한다는 것 자체는 같은 남자로서 동의할 수 있다. 자연상태에서의 수컷본능은 무죄라는 데까지도 그대로 동의한다. 그런데 그 본능이 외부로 표출되었을 때는 문제가 다르다.

 

인간은 자연상태의 삶을 거부하고 사회를 만들었다. 본능에 의해 이루어지는 약육강식의 법칙으로는 사람이 안전하고 행복하게 살아가기 어렵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이 사회를 만들고 여러 가지 법과 규율을 만들어낸 건 보다 더 안전하고 행복하게 살고 싶은 인간 이성의 작품인 셈이다. 하여 본능은 자연히 이성의 통제를 받아야 한다. 그렇지 못한다면 인간 사회에서 살아갈 자격이 없는 거다.

 

사람 사는 세상의 질서를 위해, 때로는 사람으로서의 자격을 상실한 사람을 징계하기 위해, 함무라비 법전부터 기독교의 십계명에 이르기까지 인간 역사를 통해 사람이 만들어낸 규율은 수없이 많다. 그런데 그것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타인이 싫어하는 일을 하지 말라”로 요약할 수 있다.

 

그러니까 수컷본능설은 인간의 내재적 상태를 설명하는 한에서는 유효할 수 있지만 밖으로 드러나는 행태에 대한 변명으로는 적절하지 않다. 그것은 본능은 있으나 그것을 이성으로 통제해야 한다는,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법과 규칙으로 다스려야 한다는 인간 사회의 오랜 합의를 부정하는 주장이기 때문이다.

  

4. 강자는 약자의 입장을 이해하기 어렵다

 

며칠 전에 서른을 갓 넘긴 딸아이와 카톡을 나누었다. “너의 직장에서는 이런 일이 없는지 걱정된다.”는 말로 시작된 카톡대화는 딸아이의 이런 말로 마무리 되었다. “어쨌든 여자는 평생 위험해ㅠ”

 

사회적 물리적 강자의 위치에서 살아가는 남자들은 반대의 처지에서 살아가는 여자들이 일반적으로 겪는 아픔과 두려움을 이해하기 어렵다. 강도를 만나 신변에 손상을 입거나 돈을 빼앗길 위험은 남자도 느낄 수 있는 거지만 여자들의 경우는 그 정도가 훨씬 더 크다.

 

남자들은 연예인 등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길거리나 지하철에서 치근덕거리는 여자들로 인해 치욕스러움과 공포를 느끼는 일이 거의 없다. 저녁 늦은 시간에 골목길이나 인적이 드문 지역을 지나면서 낯선 여자로부터 성폭행을 당하거나 그와 함께 일어날 수 있는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경우도 거의 없다.

 

그러나 여자들은 일상적으로 만나는 남자라도 어느 순간 갑자기 악마로 돌변하여 자신을 공격할 수 있는 존재가 될 수도 있기에 늘 두려움을 안고 산다. 내 딸아이가 말한 “어쨌든 여자는 평생 위험해ㅠ”라는 말은 그런 상황도 포함한다.

 

그런데 자신을 이토록 예쁘게 키워준 아빠도, 동네 불량배들로부터 지켜준 오빠도 남자다. 사랑하는 사람도 (반드시는 아닐 수 있지만) 남자다. 하여 남자들 일반을 잠재적 범죄자로 볼 수는 없다. 하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더 사고에 대비하기가 힘들고 무섭고 고통스럽기도 한 것이다.

 

쉬운 예를 들어보겠다. “아이가 던지는 돌이 아이에게는 장난일 뿐이지만 개구리에게는 생명의 위협이 된다.” 아마 이 얘기를 한두 번 들어보지 않은 사람은 별로 없을 것 같다.

 

그런데 돌을 던진 아이에게 “네가 던진 돌이 개구리를 죽일 수도 있다”고 말하면 억울해하지 않을까. 자기는 결코 그럴 생각이 없었다. 개구리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으니까. 이렇게 말할 지도 모른다. “누가 거기서 놀래? 다른데 가서 놀면 되잖아.”

 

이 설정에서 아이가 전혀 의도하지 않았지만 아이는 갑이고 개구리는 을이 된다. 하여 나쁜 의도를 갖지 않은 아이의 자연스러운(?) 행위가 을인 개구리에게는 갑질이 되고 때로는 생명까지 위협할 수 있는 위험스런 행동이 된다. 그런데 개구리 입장에서 보면 이런 ‘아이’는 어디에 가도 있다. 여자들에게도 남자들이 없는 안전한 공간은 거의 없다.

 

이렇게 아이는 개구리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다. 때로는 장난으로, 때로는 재미삼아, 때로는 아무 의도 없이 그냥, 개구리를 죽일 수도 있다. 마치 길을 가다 지렁이를 만나면 별 가책 없이 밟아 죽이는 아이가 있는 것처럼...

 

남자들 가운데 “그건 좀 억울하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 같다. “저 사람 비약이 지나치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렇다면 당신의 아내나 딸과 진지하게 대화를 나누어보라. 가능하면 입장을 바꿔 생각해보려고 애쓰면서... 하지만 애쓰고 애써도 남자로 태어난 사람이 여자들 입장에 온전히 서기는 힘들 것이다.

 

그건 이 글을 쓰는 나 역시 마찬가지다. 나도 남자니까. 하여 이 글을 쓰는 게 몹시 망설여졌다. 어쩌면 여자들에게 “너도 마초야, 임마!” 소리를 듣게 될 것 같아서다. 그래도 남자들에게는 조금은 도움이 될 수 있을 것 같아 용기를 내서 쓰는 거다.

  

5. 일본과 한국, 한국과 베트남

 

조금 다른 각도에서 생각을 좀 더 나누어보고 싶다. 일본 수상 아베를 비롯해 일본의 정치인들 중에 위안부 문제를 끝까지 부정하고 덮으려는 사람들이 많다. 우리 한국인이 볼 때는 쉽게 분별할 수 있는 문제를 일본의 정치인들 뿐 아니라 일반 시민들까지 인정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많은 건 왜일까?

 

한국인이 거의 대부분 그 문제에 쉽게 동의할 수 있는 이유는 피해자였기 때문이다. 내 부모가, 내 동포가 직접 당한 일이다. 자신이 속한 공동체가 받은 피해를 이해하는 건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다. 특별히 학습과정을 거치지 않아도 그냥 본능적으로도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그건 연못에 던져진 돌에 머리가 터진 개구리만이 그 위험성과 폭력성을 느끼는 게 아닌 것과 같다. 아이를 본 적도, 그 사건을 전혀 만난 적도 없는 개구리들도 전해들은 말만으로도 공포에 떨게 되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그런데 가해자의 입장이 되면 얘기가 달라진다. 연못에 돌을 던진 아이가 “거기에 개구리가 있는 줄 몰랐다. 개구리를 본 적도 없다.”고 주장하면 아이의 부모나 친구들은 어떻게 나올까. “너에게 맞아죽은 내 친구에게 사과하고 보상하라”고 주장하는 개구리들에게 “증거를 대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이 얘기를 상황에 맞지 않는 엉뚱한 비유라고 생각하는 여자는 별로 없을 것 같다. 하지만 남자들 가운데는 고개를 젓거나 갸우뚱하는 분들이 아직 많을 것 같아 다른 사례를 하나 더 들고 싶다.

 

한국이 가해자의 입장이 되었을 때 일반적으로 한국인이 어떻게 반응하는지 생각해보자. 1960년대 한국은 베트남에 군대를 파견했다. 그때 한국 군인들이 저지른 끔찍한 사건에 대한 보고서는 이제 인터넷에도 차고 넘친다.

 

일본의 만행에 대해 성토하는 한국인이라면 당연히 베트남에 가서 한국이 저지른 만행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 하지만 일본의 만행을 비난하는 한국인 가운데 베트남 사태에 대해서는 아직도 잘 모르거나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 많다. 정보가 부족해서일까? 아니면 아예 관심을 기울이지 않거나 외면하는 것일까?

 

베트남에서 벌어진 한국군의 만행을 알리려고 노력한 시민단체 관계자들의 증언은 끝없이 이어져왔지만 한국 사회 주류로부터 계속 외면을 받고 있다. 위안부 문제를 밝히려는 일본의 양심적인 시민단체의 노력이 일본 사회 주류로부터 계속 외면 받아온 것과 같은 상황이다.

 

일본의 만행을 부정하는 일본인의 행태에 혀를 차는 한국인들이 베트남 사건에는 그토록 둔감하거나 무관심한 이유는 간단하다. 피해자의 처지에 있을 때와 가해자의 위치에 있을 때는 그렇게 다른 거다. 그런 말이 있지 않은가. “서 있는 데가 다르면 풍경도 달라진다”고.

  

6. 남자들, 공부 좀 합시다

 

하여 남자들에게 제안한다. 우리, 공부 좀 합시다. 을은 따로 공부하지 않아도 갑에 대해 본능적으로 잘 안다. 하지만 갑은 을이 당하는 고통에 대해 잘 모른다. 자신의 농담이, 때론 자신이 선의라고 생각했던 언행이 을에게 얼마나 큰 아픔을 주는지 모르기 쉽다.

 

하여 공부가 필요하다. 자주 을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을의 얘기를 듣는 공부가 필요하다. 여자들이 “불편하다”고 말하면 남자들은 무조건 새겨들어야 한다. 핀잔을 주거나 불이익을 주어서는 절대로 안 된다. “농담으로 한 얘기 갖고 왜 이래?”라는 말을 하는 순간 이중 폭력이 되는 거다.

 

그럼 어떻게 배워야 할까? 좀 더 자세히 설명해주면 좋겠지만 그러기엔 내 역량이 부족하다. 나도 남자이기 때문이다. 내가 아무리 잘난 척 떠들어봐야 한계가 있다. 괜히 잘난 척하다 못난이가 되고 싶지 않다.

 

아베 수상이 위안부 문제를 진정으로 이해하고 싶으면 피해를 당한 할머니들을 찾아가 마음을 열고 직접 들어보아야 한다. 일본의 정치인들끼리 밤낮 토론해봤자 아무 소용이 없다. 이 문제도 같다. 남자들끼리 토론하지 말고 여자들에게 직접 들어야 하고 배워야 한다.

 

그러니 아무쪼록 우리 남자들이여, 우리 주변에 있는 모든 여자들을 존중하고 여자들이 하는 얘기 하나하나에 귀를 기울이자. 여자들이 불편을 느끼는 모든 문제에 대해 편하게 말할 수 있도록 마음의 문을 활짝 열어놓자. 그래야 보통 남자들이 별 생각 없이 저지를 수 있는 보편적 주책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하지만 모든 남자들이 이 공부를 꼭 해야만 하는 더 중요한 이유는 따로 있다. 그래야 내 딸, 우리의 딸들이 조금이라도 더 안전하고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류상태 선생은 장로회신학대학원 졸업이후 20여 년을 목회자, 종교교사로 사역했지만, 2004년 ‘대광고 강의석군 사건’ 이후 교단에 목사직을 반납하였고, 현재는 종교작가로 활동하면서 ‘기독교의식개혁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지은 책으로는 [교양으로 읽는 세계종교] [소설 콘스탄티누스] [신의 눈물] [한국교회는 예수를 배반했다] [당신들의 예수]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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