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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이 사라진 시대, '일상의 혁명'은 가능할까?
[갈무리의 눈] 바네겜의 『일상생활의 혁명』, 생존과 삶의 이항대립 넘어서서
 
박찬울   기사입력  2018/01/16 [14:25]

68혁명은 새로운 종류의 운동이었다. 구좌파의 논리에 따르면 오랫동안 세계는 생산수단에 대한 프롤레타리아트와 부르주아지의 경제적 투쟁이었다. 68혁명의 주도세력이었던 신좌파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한다. 나의 주체적인 삶은 어디에 있는가? 언제까지 우리는 '개인'을 양보해야 하는가? 『일상생활의 혁명』은 우리의 주체성을 되찾기 위한 새로운 계급투쟁을 제안한다. 
 

▲ 라울 바네겜의 <일상생활의 혁명>     © 갈무리, 2017

바네겜은 생존과 삶이라는 이항대립을 통해 '생존보다 삶'이라는 요구를 내세운다. 여기서 생존이란 자본주의 사회에서 말 그대로 '생존'하기 위해 일해야 하는 상황을 말한다. 먹고 살기 위해서는 일단 경제가 안정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바네겜은 생존 이데올로기에 매몰되어 있는 자본가 국가는 물론 소련, 중국과 같은 현실 사회주의 국가도 비판한다. 현실 사회주의 국가의 주된 목표도 사회주의 혁명을 위한 물질적 토대를 달성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바네겜의 주장에 따르면 ''을 추구한다는 것은 이러한 생존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 총체적이고 주체적인 인간을 추구한다는 것이다.
 
이 책은 반자본주의 투쟁의 새로운 지평을 그린다. 68혁명은 도식화된 경제적 투쟁에 반감을 가진 새로운 젊은 세대의 요구를 투영하고 있다. 『일상생활의 혁명』은 지금까지도 이어져 오고 있는 이러한 신좌파적 요구를 이해하기에 적합하다. 하지만 나는 여기서 정말 생존의 문제는 중요하지 않은가? 라고 질문해보고자 한다. 
   
실제로 자본주의의 전체적인 발전 역사를 보면, 바네겜의 표현처럼 세계의 객관적 조건은 주체성에 유리해지고 있는 것 같다. (19p) 인류는 추위, 굶주림 등 자연에 대한 투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기술적 발전을 이루어 냈다. 더는 생존에 대한 요구가 최우선의 과제가 되지 않게 될 때, 우리는 자신의 주체성에 대해 되묻게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정말 그러한가? 세계 최고의 자본가 국가라는 미국에서 한파에 사람들이 죽는다. 미국의 노숙자들은 생존하기 위해 따듯한 곳을 찾아 남쪽으로 대피하기도 한다.
 
이젠 사람들이 굶어 죽지 않는 생존보다 지겨워 죽지 않을 삶을 추구한다고 하지만 아직도 생존의 문제가 시급한 사람들이 있다. 3세계에 대해서 바네겜은 잘사는 국가에서의 봉기는 전 세계에 최소한의 척도를 만들어준다고 낙관한다. (99p) 하지만 인간이 생존의 위협에서 벗어났지만 여전히 채워지지 않는 삶에 대한 갈망을 가진다는 바네겜의 설명에 따르면, 아직 생존의 위협에서 벗어나지 못한 제3세계는 삶에 대해 신경 쓸 기회를 가지지 못하는가?
 
3세계와는 달리, 대다수 자본주의 국가의 사람들은 굶어 죽진 않을까 하는 걱정 속에 살고 있지는 않다. 한국도 그렇다. 하지만 단순히 양적인 문제, 경제적인 문제가 '생존의 문제', 자신의 삶을 누릴 권리가 '삶의 문제'로 나뉘진 않을 것이다. 한국에 세워지는 수많은 신축아파트들을 보면서도 왜 나는 여전히 햇빛도 들지 않는 좁고 어두운 집에서 살아야 하는가? 나는 돈 없이, 직장 없이, 걱정 없이 내 삶을 쟁취할 수 있는가? 나는 자동차 없이, 심지어 대중교통을 이용할 몇 푼의 돈 없이는 서울에서 벗어나 다른 지역으로 이동할 수도 없다. 여전히 생산의 문제는 존재한다. 무차별적으로 상품과 서비스들이 생산되고, 어처구니없이 분배되며 낭비된다. 여전히 내 손에 쥐어진 것은 없다.
 
『일상생활의 혁명』도 자본주의의 폐해를 비판하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일상생활의 혁명이 궁극적으로 목표하는 세상 역시 생존과 삶의 문제가 모두 해결된 세상일 것이다. 바네겜이 비판하는 것은 '생존이라는 이데올로기'이지 생존할 수 있는 조건에 대해 논하는 것은 아니니까 말이다. 그런데 왜 어떤 사람은 이 책을 보면서 삶에 대한 혁명을 예찬하는 반면, 어떤 사람은 자신과 동떨어진 허무맹랑한 이야기처럼 느끼는 것일까?
 
"생산성의 절대적 필요성은 생존의 절대적 필요성이다."(71p) 생존이 문제였던 시기엔 사람들이 스스로 노예가 될 권리를 요구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들은 이젠 삶을 원한다고 바네겜은 말한다. 하지만 삶이냐 생존이냐라는 문제는 지역마다, 사람마다 다르게 체감된다. 60년대 프랑스에서조차 여전히 생존의 문제에 위협받는 사람은 "우리가 잃을 것은 지루함뿐이다"라는 말에 공감하지 못할 것이다.
 
생존의 문제는 모두에게 공통적으로 해결되지 않았다. '1%에 맞선 99%' 99% 중에서도 더 가난한 사람, 더 빚이 많은 사람은 더 고통받는다. 파업을 하는 노조원 중에서도 생계가 어려운 노동자는 더 일찍 파업을 이탈할 수밖에 없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기회는 평등하게 분배되는 것 같아도, 고통은 결코 평등하게 분배되지 않는다.
 
하지만 바네겜은 "사람들이 아직도 굶어 죽는 비산업화된 문명과 사람들이 벌써 지겨움 때문에 죽는 자동화된 문명 사이에는 동등한 결핍이 존재한다"(111p)라고 말한다. 물론, 자본주의의 지배를 받지 않는 곳은 없다. 그런 자본주의하에서 주체적 인간이 될 수 없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하지만 나는 이것이 자본주의의 결과이지 자본주의의 작동원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자본주의의 폐해를 극복할 수 있는 것은 그 작동원리에 대한 공격이다.
 
확실히 『일상생활의 혁명』은 자본주의의 폐해를 잘 꼬집어 비판하고 있다. 68혁명 시기의 청년, 학생들에게 통렬한 쾌감을 주었으리라는 것도 의심할 여지가 없는 저작이다. 하지만 생존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사람들에게 상상력이란 무엇일까? 육아 노동과 경력단절, 쌓여가는 채무에 신음하는 사람에게 사랑, 즐거움이란 무엇일까? 용기를 가지고 '빨간약'을 먹은 사람은 모든 걸 훌훌 털어버리고 일상생활의 혁명을 이뤄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진정한 혁명이란 용기를 낼 엄두조차 못 내는 사람까지도 포함하는 모든 인민의 혁명이 되어야 한다.
 
나는 혁명에 책임이 있다고 생각한다. 혁명은 사람들을 혁명적으로 만들어야 할 책임이 있다. 그렇지 않다면 혁명은 그 자신만을 혁명적으로 만들고 사라져버리거나, 낭만적인 신화 따위로 후대에 남을 것이다. 파리 코뮌에 대한 찬양이 무슨 소용인가? 코뮌의 실패에 대한 성찰도 없이 어떤 진전을 이뤄낼 수 있을까. 혁명은 그 자신이 완수될 수 있는 혁명이 되기를 추구하고, 성찰하고, 기획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나는 여전히 생존의 문제, 경제적 문제가 중요하다고 말하고 싶다. 여전히 생존의 문제는 위협받고 있다. 복지의 긴축 재정, 인간다운 삶을 위한 물질적 조건의 결핍은 모든 인류의 미래에 닥친 위기이다. 더 가난한 사람은 지금 당장 그것을 체감하고 있는 것이고, 좀 더 여유가 있는 사람은 미래에 느끼게 될 것에 불과하다. 사적 소유에 기인하는 자본주의 생산방식의 무정부성은 오직 가진 자의 배를 불리는 목적에 봉사한다. 그리고 통제 불가능한 자본주의의 오만함은 생존, 삶의 조건을 모두 악화시키고 있다.
 
***
 
이 책에서 우리는 무엇을 발견할 수 있을까? 시대적인 저작으로서 『일상생활의 혁명』은 프랑스 전후 세대의 정서를 느낄 수 있게 한다.
 
이 책은 역사 속의 여러 봉기들, 아나키스트들의 기록을 언급한다. 이는 절망에서 전술로 바뀐 형태로서의 아나키즘, 테러리즘을 보여준다. 실제로 작년 독일에서는 함부르크 G20에 대해 대규모의 아나키즘적 시위가 조직되었다. 유럽 좌파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물론 다른 나라도 대부분 마찬가지이지만) 신좌파 흐름은 현재 반자본주의 세력이 구좌파의 주된 논제였던 생존의 문제만이 아닌, 삶의 문제를 더욱 중요시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일상생활의 혁명』은 68혁명이래 좌파들의 성격을 잘 그려내고 있다.
 
비극적인 자본주의 시대에서 무의미하게 하루하루를 보내는 대도시의 사람들. 건조하고 기계적인 일상에 갇혀 새로운 세상을 꿈꾸지 못해온 사람들. 이들의 분노와 삶에 대한 욕구는 당연하다. 삶이 먼저냐 생존이 먼저냐는 질문은 무용하다. 당연히 인간이라면 생존뿐만 아니라 삶까지도 추구할 수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하지만 '일상생활의 혁명'이 어느 정도 부를 누리고 있는 자본가 국가의 소시민들이나 누릴 수 있는 사치가 되지 않으려면, 여전히 '생존'의 문제가 커다랗다는 것을 나는 지적하고 싶다. 
 
일상생활의 혁명은 어떻게 완수될 수 있을까? 혁명적 노동자들의 삶에 대한 갈망에 의해 가능할까? 이 책이 쓰인 지 50여 년이 지난 지금 혁명적 노동자들은 채무 이행 요구에 더욱 깊숙이 빠져들어 버렸다. 자본가 국가에서 주거, 먹을 것, 의료, 교육은 촘촘히 설계된 자본주의 구조 속에 더욱 깊이 빠져들었다. 이젠 돈이 없으면 제대로 쉴 수도 없다! 여기에서 자생적인 혁명이 재등장할 수 있을까? 여전히 생존 조건에 대한 투쟁은 유효하다. 그렇지 않다면 『일상생활의 혁명』은 공허한 유토피아에 대한 외침에 불과할 것이다.

 

* 글쓴이는 다중지성의 정원 회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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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8/01/16 [14:25]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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