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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준 낮은 국정 교과서를 기억하십니까?
[정문순 칼럼] 국정교과서의 참을 수 없는 유치함과 저열함
 
정문순   기사입력  2015/10/25 [18:08]

지금은 다소 시들해졌지만 한때 내 취미는 초등학교가 ‘국민학교’이던 시절에 나온 교과서 수집이었다. 나는 유신 이후 바뀐 3차 교육과정을 배운 세대다. 40년 전의 교과서를 구하는 건 쉽지 않았다. 그래도 괴상한 취미를 가진 이가 나만은 아니었던지 중고 서적이나 경매 사이트에서 드물게 나타나면 꽤 고가에 거래되고 있었다.
 
내가 배웠던 국정교과서는 내게 애증이 교차하는 대상이다. 그 귀한 시절에 엉터리 교과서를 배웠다는 사실이 참을 수 없이 억울해서, 조금이라도 쓸 만한 내용이 있는지 없는지 옛날 교과서에서 확인하고 싶었다. 국어 교과서에 나오는 문학적인 글의 경우 지은이가 의도하지 않은 것도 종종 드러내는 경우가 있어서 괜찮은 것도 아주 없지는 않지만 열에 아홉은 수준이 저열하기 이를 데 없었다. 교과서의 수준이 낮은 이유는 단 하나, 국정이기 때문이다.
 
나는 거의 완벽한 국정 교과서 세대다. 유신 이후 세대는 국정 교과서를 당연한 것으로 알고 컸다. 대통령이 늘 한 사람이듯 교과서도 단 한 개뿐이었다. 문교부나 교육부가 아니라 출판사 이름이 교과서에 찍히는 검인정 교과서를 접한 것은 고등학교 이후 일부 과목에 한해서였다.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국정교과서의 수준은 일관되게 처참했다. 초등학교는 노골적으로 유치했고 중학교 이후부터는 교묘해지고 치사해졌다.
 
초등부터 고등까지 일관되게 국정교과서를 꿰는 논리는 친일, 친독재, 친체제, 반공주의였다. 초등 교과서는 간첩을 뿔난 도깨비로 묘사했고 중등 이상 교과서는 북한을 악마로 만드는 일에 몰두했다. 초등 교과서에서 아이들은 대통령 ‘각하’를 만나 격려를 받고 감격스러워했고, 중학 교과서는 박정희의 국민 담화를 원문으로 다루었다.
 
80년대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는 고려청자와 조선 백자 등 한국 미술이 ‘가냘픈 선의 미’를 나타낸다는 미술 사학자 유홍렬의 글이 실려 있다. 화려한 청자와 펑퍼짐한 백자가 가냘프다고 보는 시각이 어린 나한테도 엉뚱하다고 생각했는데, ‘가냘픈’ 운운은 한국인 전문가의 독창적인 시각이 아니었다. 한국 미술의 특징을 가냘프다고 평가함으로써 일제 강점을 합리화했던 일본인 미술사학자 야나기 무네요시의 이론을 충실히 따른 것에 불과하다.
 
이처럼 해방 40년이 지난 이후의 학생들에게 식민주의를 교묘하게 가르친 것이 당시 국정교과서 수준이었다. 국정교과서는 문학이나 음악도 친일파들의 작품으로 채웠다. 학생들은 이은상이 쓴 가사에 홍난파가 곡을 붙인 가곡을 배웠다. 국어책에는 이광수, 최남선, 김동인, 김동환, 최정희, 모윤숙, 서정주의 글이 빠지지 않았다. 친일 경력의 작가들이 교과서에서 승승장구하는 동안 남한 체제를 따르지 않고 월북했거나 처음부터 북한에서 살았던 작가들은 철저히 배제됐다. 정지용 시인이 월북했다고 오해한 이 나라는, 시인의 시에 곡조를 단 노래에서 곡은 그대로 두고 가사를 다른 이의 것으로 바꾸어 학생들을 가르쳤다. 치졸하고 옹졸했다.
 
국민윤리 교과서의 경우 유신과 전두환 정권의 시각은 자신들이 그렇게도 증오하는 북한과 닮아갔다. 국가 체제를 다룬 대목에서 집필자는 국가를 보는 많은 관점 중에서 갈등론, 계급론을 물리치고 국가를 한 가족처럼 보는 시각이 가장 타당하다고 썼다. 국가가 가족이라면 대통령은 아버지 격이 되며 국민은 자식 격이 된다. 그건 휴전선 이북의 논리이기도 하다. 집필자는 자신이 북한의 ‘사회주의 대가정’ 논리와 같은 궤적을 그리고 있음을 알지 못했다.
 
“우리 대통령 각하께서는 나라를 위해 많은 일을 하셨습니다. 우리 대통령께서는 퍽 바쁘십니다. 중국에도 가고 미국에도 가셨습니다. 중동에도 다녀오셨습니다. 북한에 가족이 있는 사람들도 가족을 만나게 해주셨습니다. 삼촌과 이모들 일자리도 많이 만들어 주셨습니다. 할아버지, 할머니들에게 달마다 돈도 주십니다. 학교에서 배우는 책도 손수 만드셨습니다. 중학교, 고등학교 다니는 언니, 오빠들도 공부하기 참 편해졌습니다. 우리나 역사 책은 한 권만 공부해도 됩니다. 대통령의 아버지께서도 옛날에 대통령을 하셨습니다. 국민들을 많이 보살펴주셨습니다. 두 분 모두 참말로 우리나라를 사랑하셨습니다. 우리나라는 살기 좋은 나라입니다.”
 
몇 년 뒤쯤이면 저런 내용이 초등학교 교과서에 실리는 날이 오지 않을까. 역사를 한 가문의 사유물로 보는 정권이 만드는 역사 교과서라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박정희는 유신을 합리화하기 위해 교육과정을 개편하고 국정 교과서 체제로 바꾸었고, 그의 딸은 그런 아버지 죄를 감추기 위해 죽을 힘을 다해 국정화를 밀어붙이고 있다. 
 
* 경남도민일보 게재 칼럼 

* <대자보> 편집위원, 문학평론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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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5/10/25 [18:08]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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