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문순의 문학과 여성 >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로 보내기 글자 크게 글자 작게
통진당, 명백한 피해의 근거를 대보시라
[정문순 칼럼] 분별력이 막힌 사회, 기분 나쁘다고 정당을 강제해산하나
 
정문순   기사입력  2014/12/31 [10:03]

자주 가는 찻집에 앉아 있는데 조용하던 곳이 갑자기 어수선해졌다. 평소 나긋나긋하던 주인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지며, 손님으로 온 젊은 커플을 조금 전에 쫓아냈다고 말한다. 한 시간 반 동안이나 눈에 거슬리는 짓을 하더란다.
 
그들은 대각선 쪽에 앉은 내 눈에도 진작 띄었다. 오히려 주인보다 더 잘 볼 수 있는 자리다. 둘이 껴안고 있는 게 눈에 띌 때 부럽다는 생각이 든 듯도 하지만 더 이상 시선이 가지 않았다. 보는 것과 눈에 들어오는 것은 다르다. 나는 그들이 궁금하지 않았기에 보지 못한 거나 다름없다.

 

관심이 없으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모를 텐데 주인은 굳이 그네들을 오랜 시간 지켜보면서 자신의 인내심을 괴롭힌 것이다. 물론 주인이니 손님의 일거수일투족에 신경이 쓰일 수도 있지만 그들이 쫓겨날 정도로 잘못을 저질렀는지는 모르겠다. 그네들은 비용을 지불하고 일정 시간 동안 점유할 권리를 가진 공간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자기 구역을 벗어나 싫다는 사람 앞에 다가가 행동을 보여준 것도 아니라면 자신들의 고유 영역에서 일어난 일을 침해받을 이유까지는 없지 않을까.
 
물론 나처럼 말하면 남에게 피해를 줬다는 반박이 따라붙게 되어 있다. 그들이 주인에게 또는 카페 안 다른 손들에게 어떤 피해를 주었을까? 적어도 나한테는 피해를 주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피해는 구체적이고 분명해야 한다. 젊은이들의 과감한 애정 표현이 남에게 구체적이고 명백하고 실질적인 위협을 주었음을 입증해야 할 일이다.

 

내가 기분 나쁘고 불쾌하다고, 내 가치관에 맞지 않는다고, 내가 보기 싫다는 이유로 남의 행동을 제재하거나 금지할 권리는 없다는 뜻이다. 자신에게 피해나 위협으로 돌아오지도 않는 일을 견제하는 사회에서는 거꾸로 당연히 제지해야 할 일에는 참으로 너그러운 경우가 허다하다. 길거리 담배 연기, 흡연남들이 예외 없이 하는 노상 침 뱉기, 버스 안에서 휴대전화 쓰기, 이런 반사회적인 행동이야말로 엉뚱한 사람들에게 명백하고 구체적인 피해를 주는 것들이다. 그러나 쓸데없는 일에 에너지를 쏟기 때문인지 정작 관여하고 제동을 걸어야 하는 일에는 굼뜬 우리 사회의 기묘한 풍조를 이해할 수 없다.
 
나는 통합진보당 강제해산의 결정적 근거가 된 ‘아르오’(RO)라는 조직의 실체를 믿지 않는다. 통합진보당이 이상한 조직을 만들 만한 정당이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다. 이석기 의원의 연령대인 40대 후반에서 50대 초반 이하 즉 386세대는 ‘R’을 ‘아르’라고 말하는 세대가 아니다. 그들은 중고등학교 때 일본식 발음에 익숙한 교사에게 영어를 배웠어도 엉성한 발음을 속으로 비웃고 따르지 않았다. 그들 중 1980년대에 대학에 진학한 운동권들은 자기들끼리 ‘혁명’이라는 낱말을 말할 때 입버릇처럼 ‘알’(R)이라고 발음했다. ‘아르오’는 특정 세대의 영어 발음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정보기관의 상상적 창작물일 가능성이 높다.
 
아르오가 설령 실체를 갖춘 조직이고 진보당 차원에서 조직적으로 키워졌다고 하더라도, 헌법 기관이 정당 해산을 결정하지 않으면 안될 정도로 진보당이 대한민국 헌정 질서에 실질적인 위협이 된다고 볼 수는 없다. 헌법재판소의 결정은 재판관들이 평소 진보당에 대한 자신들의 악감정이나 비호감에 법의 탈을 씌운 것에 불과하다. 도무지 정당 같잖은 새누리당이 진보당과 비슷한 운명에 처하더라도, 나는 선거를 통한 심판이 아닌 헌재 재판관들의 인기투표에 따른 새누리당의 강제해산을 기필코 반대할 것이다.
 
그러나 이 나라 국민들에게서 진보당의 운명에 대해 별다른 메아리를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여론조사에서 60~70%가 진보당 강제해산에 찬성하는 것으로 나왔단다. 한국은 구체적이고 명백하고 실질적인 위협에 관해 판단할 만한 분별력이 꽉 막힌 사회다. 오랜 분단 상황이 작용한 탓도 있겠지만, 카페 주인의 흥분에서 보듯 자신의 가치관과 맞물리지 않는 것을 용납하기보다 쉽사리 단죄하는 데 익숙하기 때문이 아닐는지. 

 

* 12월 30일 경남도민일보 게재 칼럼

* <대자보> 편집위원, 문학평론가입니다.
트위터 트위터 페이스북 페이스북 카카오톡 카카오톡
기사입력: 2014/12/31 [10:03]   ⓒ 대자보
 
  • 도배방지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