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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의 아버지가 '딸에게 보내는 편지'
4·19 혁명을 기억하며 읽는 글
 
정연복   기사입력  2010/04/18 [22:39]
인옥아! 내 사랑하는 딸아!

내가 이 글을 신문에 투고하여 세상에 널리 읽히고자 하는 것은 나만이 딸을 가진 애비가 아니고, 또 너와 같이 너의 학교에 딸을 보낸 수천의 부모 형제 자매들이 모두 내 심정과 같을 것을 생각하고 이 부끄러움을, 이 고통을 함께 나누고, 함께 울고자 함이로다.

구태여 너의 학교 이름을 여기서 밝히지 않는다 해도, 한마디로 서울 시내에 있는 '대학교'라는 이름을 가진 학교 중에서 저 4 19데모 때에 나서지 않고 빠져버린 대학교라면 둘도 있지 않고 하나밖에 없기 때문에(나는 그렇게 알고있다. 세상 사람들은 누구나 다 짐작할 것이다.)

시골에서 어렵사리 외과의사 개업을 해서 네 뒤를 보아온 내가 한 사람의 아버지로서, 한 사람의 이 나라 동포로서 이렇게 슬프고 괴로워해 보기는 내 생애에 있어서 이번이 처음이다. 너의 학교는 수십 년의 역사를 가지고 빛나는 전통을 자랑하며 수많은 현모양처와 여성 지도자를 배출해 낸 이름높은 학교였다. (중략)

그러나 나는 완전히 할 말이 없게 된 '부끄러운 아버지'가 되고 말았다. 나는 신문이란 신문은 모조리 뒤지면서 행여나 내 딸의 학교 이름도 나오지 않나 하고 얼마나 찾았는지 모른다. 이제는 시력도 약해지고 기억력도 좋지 않지만 나는 너의 학교의 이름을 단 한번도 발견하지 못하고 말았다. 신문을 보면서도 눈물이 사뭇 복받쳐 견딜 수 없는 이 벅찬 역사적 마당에서, 그 젊은 대열 가운데 하필이면 내 딸이 다니는 학교만 빠졌다는 것은 이 무슨 해괴한 일인가?

그 숱한 젊은이들 가운데 내 딸의 모습이 끼여 있지 않고, 내 딸의 학우도 끼여 있지 않았다는 사실--- 이것이 수십 년의 전통과 역사를 자랑하는 내 딸의 학교가 홀로 보여준 교풍이었단 말인가?

인옥아! 요즈음은 별로 수입도 많지 않고 모아 놓은 재산도 없다는 것, 누구보다 잘 알 것이다. 그러나 나는 남의 자식에게 빠짐이 없이 무엇이나 부족함이 없이 네 뒤를 밀어오기를 있는 힘을 다하였다. 그리고 내가 네게 바라는 것은 '비굴한 행복'보다 '당당한 불행'을 사랑할 줄 아는 여성이 되어지이다 하는 간절한 마음이었다.

서울의 거리가 온통 너와 같은 젊은 세대의 불길로 거세게 타오를 때, 인옥아! 너는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단 말이냐? 그 '피의 폭풍'이 강산을 휩쓸고 마침내 낡고 썩은 것들이 너희들 젊음 앞에 굴복을 하고만 그 시각에 나의 피를 받은 너는 대체 어디서 무엇을 생각하고 있었더냐? 그 불덩어리들 속에 타오르는 심장의 핏빛이 네 피와는 다르더란 말이냐? 그 암흑을 밀어 나가는 북소리들이 네 목소리와는 다르더란 말이냐? 너는 정녕 그 젊은 기수들 속에 네 생명을 바쳐 사랑하는 애인 한 사람 없었단 말이냐?

서글픈 일이다. 분한 일이다. 네 젊음을 스스로 모독한 시대의 고아가 되고 말았구나! 어찌 네 가슴에 뺏지를 달고 이 태양 아래 활보할 수 있으랴! 총탄에 넘어진 아들딸을 가진 부모들의 비통함보다 털끝 하나 옷자락 하나 찢기지 않은 너를 딸로 가진 이 애비의 괴로움이 더 깊고 크구나!

인옥아! 어서 배지를 떼고 교문을 나와 병원으로 달려가거라,. 죄인과 같은 부끄러움과 겸손한 태도로 아직도 병상에서 신음하는 그 젊은 영웅들 앞에 네 피를 아낌없이 쏟아라. 그 젊은이들이 너 같은 여자의 피라도 받아준다면.... 그리고 그만 시골로 내려오너라. 그 편이 한결 애비된 내 마음이 편할 것 같다. 그리하여 아버지와 함께 조용히 생각해 보자. 결코 '부잣집 맏며느리감'을 만들기 위해 너를 대학에 보낸 애비가 아니라는 것.... 네가 잘 알 것이다.

이 찬란하고 장엄한 역사의 아침 앞에서 이렇게 흥분하지 않고는 못 배길 것 같다. 인옥아! 이 늙어 가는 애비의 말을 너무 과격하다고 생각하기 전에 너의 가슴에 손을 얹고 스스로 물어 보아라. 사랑하는 딸자식을 위한 애비의 심정이 어떠할지를....

광주의 아버지로부터
(4·19 혁명 직후의 감격 속에, 기성세대인 한 아버지가 대학생 딸에게 보낸 편지, 조선일보 1960년 5월 2일자)


* 연세대학교 영문과와 감리교 신학대학 대학원을 졸업하고 현재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으로 있다. 민중신학적 글쓰기에 관심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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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0/04/18 [22:39]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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