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일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묘역에서 발생한 화재와 관련해 경찰이 의도적 방화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즉각 수사에 나섰으나, '방화범'의 실체와 구체적 증거 등에 대해선 3일 오전 현재까지 뚜렷한 정황이 발견되지 않고 있다.
다만 묘역 인근에서 고인을 '친 공산주의자'로 표현한 보수단체의 유인물이 발견된 점과, 일부 극우단체들이 김 전 대통령의 서거 직전 까지 동교동 자택 앞에서 시위를 벌여왔다는 점에 미뤄, 이들의 방화시도가 아니겠느냐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여기에, 화재 지점이 묘역 주변에 설치된 폐쇄회로(CCTV) 카메라의 사각지대였던 것으로 알려지면서 현충원의 묘역관리와 사후대응을 비판하는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다.
"어떤 사람들의 어떤 의도가 없이는 불가능한 일" 당초 이번 화재를 처음으로 발견한 김 전 대통령 측 관계자들은 2일 오전 묘역 주변에 화재가 난 흔적을 발견하고 즉시 관리실에 알렸다. 최경환 김대중 평화센터 공보실장에 따르면, 매주 화요일은 측근들과 이희호 여사의 '정기 참배일'인 것으로 알려졌다.
▲ 김대중 전 대통령 묘역 상단 잔디 일부에 발생한 화재 모습. 이계안 민주당 서울시장 후보가 2일 서울시 예비후보등록을 마친 후 동작동 현충원 김 전대통령 묘소를 참배하던 중 최초로 발견했다. © 이계안 후보 측 제공 | |
이 중 화재 흔적을 발견한 측근들 중에는 민주당 이계안 서울시장 후보도 있었으며, 이 의원 측은 명백한 방화로 추정한 뒤 오전 10시 께 서울 동작경찰서에 신고했다.
화재는 묘역으로 까지 번지지 않았으나 '큰 담요 2개를 펼쳐놓은 것만큼 불에 탄 곳이 넓었다'고 이 후보는 설명했으며, 화재가 발생한 장소는 CCTV 사각지대인 것으로 확인됐다. 현재 김 전 대통령 묘역에는 2대의 CCTV가 작동 중이다.
특히 묘역에서 300여 미터 떨어진 곳에서 고인을 비판하는 내용의 보수단체 전단지 11장이 발견되자, 경찰은 의도적 방화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향후 경찰 수사과정에 따라 새로운 사실이 밝혀질 수 있지만, 현재까지는 어떠한 '증거'도 발견되지 않고 있다.
이와 관련, 최경환 공보실장은 3일 오전 평화방송 라디오 <열린세상 오늘, 이석우입니다>에 출연, "이 엄동설한에 국가 관리 시설에서 화재가 난 것은 어떤 사람들의 어떤 의도가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라고 일부세력의 방화 가능성에 무게를 뒀다.
특히 최 실장은 "생전에도 김 전 대통령께서 투석치료 받으면서 누워계실 때, 집 앞에 와서 북을 치고 소리치며 데모하는 분들이 많았다"라며 "돌아가셔서까지 이런 행태가 계속 되는 것에 대해 참 참담한 심정"이라고 토로했다.
김 전 대통령 서거 직전 까지 동교동서 '데모'…"상당히 의심 간다" 최 실장이 언급한 '데모하는 분들'은 일부 극우세력을 지칭한 것이다. 실제로 '반핵반김국민협의회'는 6·15 공동선언 9주년을 하루 앞둔 지난해 6월 서울 동교동 김대중 전 대통령 사저 앞에서 규탄 집회를 가진 바 있다.
이밖에 '대한민국어버이연합' 소속으로 알려진 150여 명의 노인들은 작년 9월 현충원에서 김 전 대통령의 국립현충원 안장에 노골적 불만을 표출, "묘를 파서 현충원 밖으로 보내고 우리가 그곳에 묻히겠다"며 '묘소 파헤치기 퍼포먼스'를 진행하기도 했다.
이에 대해 민주당은 사실상 이번 화재를 일부 보수단체 회원들의 의도적 방화에 방점을 찍고 나선 상황. 경찰의 철저한 수사와 방화범 검거, 나아가 화재 목적 등에 대한 대국민 공개 등을 촉구하고 나섰다.
우상호 대변인은 2일 브리핑에서 "넓고 넓은 현충원 중에 유독 김대중 전 대통령님의 묘역만 불 탄 것을 보면 방화로 추정된다"며 "그동안 극우보수단체가 묘역을 훼손하기 위한 시도를 여러 번 했던 것을 되돌아볼 때 상당히 의심이 간다"고 밝혔다.
최 실장도 "이미 김 대통령님은 돌아가신 분이다. 평생 민주화를 위해 싸우셨고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며 "여러 나라의 전현직 수상이나 대통령들이 현충원에 와서 묘역을 참배하고 있다. 이런 일은 정말 나라의 수치"라고 개탄의 목소리를 높였다.
이어 '친 공산주의자' 전단지 내용에 대해선 "대통령님은 민주주의를 위해 싸웠다. 공산당에 잡혀 죽을 고비도 넘기셨다"며 "일부 극우 분들께서 하시는 주장에 불과하다. 대한민국의 대통령을 지낸 분에 대해 그렇게 이야기 해서야 되겠느냐"고 비판했다.
▲ (자료사진) 반핵반김국민협의회, 대한민국어버이연합 등 보수단체 회원들은 지난해 8월 김대중 전 대통령의 서거를 조문하기 위한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특사 방문단을 강력 규탄했다. © CBS노컷뉴스 | |
현충원 '고의적 은폐'?…비판 고조 "재발방지책 세워야" 경찰의 '소극적 수사태도'와 현충원의 '사후 대응'을 비판하는 목소리도 고조되고 있다. 당초 경찰은 화재 직후 묘역이 타지 않은 점 등을 들어 방화가 아닌 것으로 판단했으며, 현충원 측도 '현장 훼손' 등으로 논란을 일으키고 있는 상황.
최 실장은 "현충원 측도 당황했겠지만, 현충원은 말 그대로 '국립현충원'이다. 국가가 관리하는 시설인데 자그마한 불이라도 났다면 아주 엄중한 일"이라며 "재발 방지를 위해서라도 꼭 방화범을 색출해서 일벌백계를 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앞서 화재발생 사실을 2일 오전 10시 처음으로 발견한 현충원 관계자는 경찰청 과학수사대가 정밀 감식을 하기도 전에 '참배객 편의'를 위한다며 화재 현장을 흙으로 덮어 논란이 일고 있는 상황. 특히 일각에선 '의도적 은폐' 의혹 까지 제기되고 있다.
다만, 논란이 일자 현충원 측에선 "'이번 사건이 지나치게 확대되지 않았으면 한다'는 유족의 요청으로 (화재 현장의) 흔적을 없애려 했던 것"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최 실장은 "매주 화요일은 이희호 여사께서 대통령 묘소를 참배한다. 어제(2일)는 마침 대통령님의 측근들이 먼저 와서 (화재를) 확인한 뒤 '여사님이 곧 도착을 하실 텐데 얼마나 놀라겠느냐. 빨리 수습을 하는 게 좋겠다'는 취지로 말을 했다"고 밝혔다.
이어 "흔적을 없애거나 화재의 증거를 없애라는 취지로 말한 것이 아니었다"고 말한 뒤, 현충원의 '은폐' 의혹과 관련해선 "감시를 소홀히 한 측면은 있지만, 은폐 축소하려 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고 경찰 수사진행 상황에 따라 판단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최 실장은 고인의 묘역 인근에 CCTV가 두 대 밖에 설치되지 않은 점과 화재발생 지역이 사각지대였던 점과 관련, "조만간 현충원에서 재발방지 대책을 세운다고 했다. CCTV의 추가 설치 등도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촉구했다.
한편 최 실장에 따르면, 이희호 여사는 화재 발생 사실을 처음 접한 뒤 "생전에도 (현충원 묘역에) 와서 데모도 하고 그러던데, 돌아가셔서 까지 이렇게 해야 하느냐. 이런 일이 있어야 하느냐"고 걱정과 우려를 보였던 것으로 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