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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 노무현'은 세상을 바꿀 수 없다
특별하지 않은 아버지의 죽음..'7살 소년'의 눈에 비친 '생존권 사수'
 
김영국   기사입력  2009/06/26 [17:21]
6월 뙤약볕에 나를 얼어붙게 만든 '한 장의 사진'

▲故 박종태 열사의 막내 아들 정하(7) 군이 영결식장에서 생전의 아버지의 모습이 담긴 유인물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다. 고인이 된 아버지의 이마에 둘러진 '생존권 사수'가 어린 소년의 눈에는 어떻게 비쳤을까.   © 이명익 기자/노동과세계

 
우연히 발견한 이 한 장의 사진. 순간 나는 아이의 얼굴을 한참이나 응시하고 있었다. 그의 손에 들려진 소책자 표지에 어느 노동자의 익숙한 모습. 그가 아이의 아빠란 걸 아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아이는 가난하지만 의로운 노동자로 살다 비천하게 생을 마감한 아빠를 읽고 있었다. 고작 '30원 인상'을 요구하며 대기업과 정권의 잔인함, 사회의 무관심과 싸우다 끝내 '자살'을 택한 비정규직 아버지의 이야기다. 바로 故 박종태 화물연대 광주지부 1지회장의 아들 '정하' 군이었다.

숭고미(崇高美)마저 느껴지는 '7살 소년'의 차분하고 진지한 표정에서 '비겁한 어른'은 무너지고 말았다. "죄인처럼 고개 숙이지 말라."는 엄마의 말을 이 아이는 알아들었을까. 아빠의 이마에 둘러진 '생존권 사수'의 뜻을 알 리야 없겠지만, 그 표정만은 '나는 이미 다 알고 있다.'는 투였다.

먼 훗날 이 시기를 기억하지 못하는 누군가가 "당신이 살았던 그 시기가 어땠냐."고 묻는다면, 나는 저 사진을 보여주고 싶을 것 같다. 2009년을 대표하는 사진, 우리 시대의 자화상과 미래를 압축해서 담아낸 한 장의 사진. 그걸로 이 아이를 고르고 싶다.

박종태 씨는 지난 4월 30일 "힘없는 노동자들이 길거리로 내몰린 지 43일이 되도록 아무 힘도 써보지 못해서는 안된다."는 절박한 호소를 담은 유서를 남긴 채 대한통운 대전지사 앞 숲 속 나무에 목을 맸다. 택배 기사라는 특수고용직 노동자의 아픔을 세상에 알리고 노동자들의 투쟁을 호소하기 위해 스스로 역사의 제단에 목숨을 바친 것이다.

그는 유서에서 "날고 싶어도 날 수 없고, 울고 싶어도 울 수 없는 삶을 살아가는 모든 이가 행복하고 서로 기대며 부대끼며 살아가길 빈다."고 작별 인사를 했다.  

'미완의 마침표'

박 씨의 죽음이 촉매제가 돼 지난 6월 15일 화물연대-대한통운 간 노사협상이 극적으로 타결됐다. 노사는 △해고된 택배 기사 38명 3월 15일 이전의 근무조건으로 복직 △복귀자들에게 일체의 불이익 처우 금지 △노사 양측의 민·형사상 고소, 고발, 가처분 소송 취하 등에 합의했다.

그러나 회사측이 올 1월 약속했던 '운송료 30원 인상' 문제는 이번 합의에 포함되지 않았다. 또 다른 핵심 쟁점이었던 '합의문의 서명 주체'와 관련해서도 화물연대가 아닌 '대한통운 광주지사 택배분회'라는 이름으로 합의문에 명기했다. 이는 대한통운 사측과 국토해양부가 화물연대의 실체를 즉 노동단체로 인정하지 않겠다고 버텼기 때문이다. 특수고용 노동자들의 노동 기본권을 보장해달라는 요구가 전혀 반영되지 않은 것이다. 앞으로도 이 문제를 둘러싼 갈등이 계속될 수밖에 없다.

이처럼 박 씨의 죽음은 자기들이 한 약속조차 어기고 집단 해고로 보복한 재벌대기업의 횡포가 첫째 원인이지만, 근본적 원인은 택배 기사, 화물차주, 보험설계사, 학습지 교사 같은 특수고용직 노동자를 노동자로 인정하지 않고 더욱 탄압하고 있는 이명박 정부에 있었다.

▲'특별하지 않은 사람' 박종태 씨의 운구행렬    © 이명익 기자/노동과세계

우리 사회는 '말이 사장이지 비정규직보다 못한' 대우를 받고 허덕이는 특수고용직 노동자가 부지기수다. 너무 많다 보니 이제는 상식처럼 되어버렸다. 우린 그런 사회에 살고 있다.

박종태 씨의 죽음은 법적·제도적 사각지대에 방치된 이들의 현실을 들여다보도록 여론을 환기시켰다. 동시에 생계형 파업이 아닌 제도 개선 투쟁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숙제를 노동단체들에게 안겨줬다. 박 씨의 죽음으로 78명의 택배 기사는 일터로 돌아갔지만, 그의 유지는 살아남은 자의 과제로 고스란히 남겨져 있다. '미완의 마침표'였다.

남편을 잃은 슬픔에 몸을 가누기도 힘든 하수진 씨는 동료를 지켜주지 못한 자책감에 괴로워하고 있는 노동자들을 향해 "죄인처럼 고개 숙이지 마십시오. 죄인은 여러분들이 아니라 헛소리하고 뻔뻔한 저 담 뒤에 숨어 있는 자들입니다."며 "더 이상 슬퍼하지 말고 고인의 유언대로 악착같이 싸워서 사람 대접 받을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 달라."고 되레 위로와 격려를 보냈다.

민주당과 친노 정치인들은 왜 오지 않았을까

박종태 씨의 장례는 유족과 동료 노동자들의 결연한 의지로 그의 죽음 이후 한 달이 넘도록 치르지 못했다. 사망한 지 52일 만인 6월 20일에서야 대전에서 영결식을 갖고 '5월의 거리' 금남로 노제를 거쳐 광주 망월동 민족민주열사 묘역에 안장됐다.

▲'5월의 거리' 광주 금남로에서 '눈물 비'를 맞으며 박종태 열사의 노제를 치렀다.   © 안병현 기자/광주in

그의 마지막 가는 길에는 노동자, 시민 등 2000여 명이 함께 했다. 수십만 명이 추모 물결을 이루고 전국에 생중계됐던 故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장례식과는 비교도 안 되는 초라한 규모였다.

노 전 대통령 분향소 앞에서 밤을 세워가며 '사람 사는 세상'을 만들겠다고 울부짖던 민주당과 친노 정치인들은 박 씨의 장례식에는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이날 참석한 정치권 인사로는 민주노동당 강기갑 대표, 권영길 의원, 홍희덕 의원, 진보신당 노회찬 대표, 심상정 전 대표 등 모두 진보정당 소속 정치인뿐이었다.

생각해 보니 조금은 이해가 안 가는 대목이다. 민주노총은 자신들이 상주로서 지켜야 할 박종태 씨가 있음에도 노 전 대통령 장례 기간에 지도부가 집단으로 봉하마을을 찾아 조문했다. "노무현 정권의 신자유주의 노동정책에 저항하다 자살하고 감옥 간 노동자들이 얼마인데, 민주노총의 조문이냐."는 진보진영 일각의 따가운 눈총을 받으면서.

답례 차원에서라도 민주당이나 친노세력을 대표할 만한 정치인 한두 명쯤은 박종태 씨 장례식에 가서 동병상련의 아픔을 나눌 수도 있었던 것 아닐까. 노무현이 꿈꾸었던 '사람 사는 세상'과 박종태 씨의 그것이 그들에겐 다르다고 생각한 걸까. 아님 가난한 노동자의 영결식장에 가봐야 주울 지갑이 없어서일까. 박 씨가 몸담았던 화물연대 측에 이들이 오지 않은 이유를 묻자 "내가 좀 그들에게 물어보고 싶다."고 쏘아붙였다.

민주당과 친노 정치인이 바라보고 있는 곳과 그들이 꿈꾸는 세상이 노동자의 그것과 같지 않을 수 있다는 '불편한 진실'이 노무현 추모 열풍에 가려져 있다 '살짝' 들켜버린 것 같아 씁쓸했다.

지혜롭고 유능해져야 이긴다

노무현을 사랑했다가 정책적 이유로 돌아선 사람, 시종일관 증오만 했던 사람. 이들이 노무현의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다. 노사모와 친노 정치인들은 자유로울까. 천만의 말씀이다.    

노무현에 대한 지나친 비판이 그를 아프게 했던 것만큼, 노무현에 대한 일방적이고 때론 과도한 사랑이 그를 노사모 울타리 안에 고립시켰다는 것도 성찰해볼 일이다. 가까이 할 수 있는 사람들조차 '노짱을 비판한다.'는 이유로 노무현에 다가가지 못하게 하거나 질리도록 만든 점은 없었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박종태 씨의 죽음도 별반 다르지 않다. 이 '특별하지 않은 사람'의 유서에는 이 땅을 힘겹게 살아가는 노동자·서민의 상처와 고통이 오롯이 배어 있었다. 이 사회적인 죽음들에 자유로운 사람이 과연 누가 있겠는가.     

이제 와서 모두의 잘잘못을 일일이 따져보자는 게 아니다. 거대한 '열망과 실망'의 사이클이 또다시 반복될까 염려할 뿐이다.

분명한 건, 박종태 씨의 비극적 자살과 절절한 유서는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찬란한 추모 뒤에 가려진 '불편한 현실'이었다는 점이다.

추모 인파의 대부분은 노무현이 될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 노무현이 살아 돌아온다 해도 '바보 노무현은 세상을 바꿀 수 없다.'는 걸 깨닫지 못하는 한, 그들 역시 '바보 박종태'보다 특별히 나아질 게 없는 사람들이었다.

노무현을 제대로 계승하고자 하는 사람은 더 이상 '바보'가 되어선 안되기 때문이다. 지혜롭고 유능해져야 한다. 공부하지 않는 사람은 세상을 진보시킬 수 없다. 세상과 정치인을 바라보는 안목을 스스로 키우지 않고 언론이 만들어낸 허상과 이미지에 휘둘리는 사람이 많을수록, 대한민국은 '죽어서 신이 된' 노무현과 '살아서 뻔뻔한' 이명박을 계속 지도자로 모시고 살 수밖에 없다.

어떤 경우이든 모두의 불행이다. 비겁하게 살아남은 자로서 그들의 죽음을 폄하할 순 없지만, 노무현이든 박종태든 그 누구든 죽음으로써 항거하는 것에 반대한다. 앞으로 탄생하는 우리의 지도자는 '살아서 행복한 대통령'이었으면 좋겠다.

▲'노동해방'을 염원하는 故 박종태 열사의 꽃상여   © 이명익 기자/노동과세계


이젠 '불편한 진실'과도 마주할 때

용산 참사, 박종태 씨의 죽음, 2600여 명의 노동자가 외국자본의 먹튀에 희생당해 백주에 직장에서 내몰린 쌍용차 사태, 신영철 대법관에 대한 일선 판사들의 집단 사퇴 요구, 금방이라도 뚜껑이 열릴 듯한 장자연 리스트, 미디어법 개악 저지에 나선 언론인들, 뜨거운 아스팔트 위에서 이 정권의 오만·독선·소통부재를 비판하며 124일간의 고행길을 이어간 오체투지 순례단….

이들은 서로 다른 사건들이지만, 밟힌 지렁이가 꿈틀거리는 것처럼, 거대 권력의 억눌림으로부터 뭔가를 이야기하고자 한다는 점에서 닮아 있다.

진보진영은 박종태 씨와 용산 참사 희생자들의 죽음이야말로 우리 사회 구조적 모순이 적나라하게 들어난 사건이자 우리 자신들의 일이라며 뜨거운 관심을 호소하지만, 추모하는 마음까지 명분으로 강권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진보란 그래서 어렵고 때론 슬프기도 하다. 특별한 죽음은 신화(神話)로까지 만들어 추억하지만, 특별하지 않은 죽음은 내 알 바 아니다는 사람과도 부대끼며 세상을 바꾸어가야만 하기 때문이다.

광장의 촛불에 경탄하는 사람도 많지만, 스쳐가는 바람에도 꺼져버리는 '허약한 민주주의'를 대변하는 경우가 더 많았다. 거센 비바람을 막아 촛불을 지켜내고 횃불로 타오르게 할 '대안 세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당신이 계승해야 할 죽음은 누구입니까?

언젠가는 알 게 될 것이다. 이 '불편한 진실'들을 용기 있게 말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자가 진짜 사람 사는 세상을 여는 메시아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그저 순간순간 반사이득으로 한몫 보려는 자들이 가짜란 것을.

노무현은 이제 역사가 되었고, 남은 사람들은 노무현이 하지 말라고 했던 정치를 다시 붙잡고 고통스러운 짐을 나눠져야 한다. 성공에 대한 예감보다는 여전히 실패에 대한 불안이 더 강하다.

그리고 그동안 슬퍼하지 못한 죽음에 슬퍼해야 하며, 분노하지 않았던 죽음에 분노해야 한다. 뒷짐 지고 구경하는 것에서 벗어나 '올바르게 세상을 바꾸는' 일에 관심을 갖고 참여하려 노력해야 한다.  

다시 나에게 물어본다.

부조리한 현실과 불확실한 미래에 부끄럽지 않도록, 불행하지 않도록 내 안에 숨지 않고 나에게 물어본다.

"당신이 오롯이 계승해야 할 죽음은 누구입니까?"


☞ 고 박종태 열사 유서와 부인의 편지
<대자보> 편집위원. 항상 이 나라 개혁과 진보적 사회발전에 기여하는 쪽에 서 있고자 하는 평범한 생활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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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9/06/26 [17:21]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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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megod 2009/06/26 [20:54] 수정 | 삭제
  • 너무도 가슴아픈 일들이 왜 자꾸 일어나는것일까요 오늘도 쌍용자동차조합원들도 이와같은 아픔을 당하고 있습니다

    자꾸 자꾸 일용직들과 하층민이라고 밖에 불리우지 않는 노동계급의 피흘리는 아픔 뼈아픈 생존권을 피를 흘려야만 알아 준다는 말입니까?
    부려먹은 만큼만 돌려 주십시요

    문어발 기업체 사장님들 ~당신의 아이들이 외국에서
    먹는 한나절의 음식값이 저 노동층들의 한달 식품값입니다

    사람답게 살게 해주세요 대통령이나 정치권자들이나
    다 배부른 돼지색휘들 없는자의 고통을 니들이 알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