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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임, 간첩조작에서 드라마 <서울 1945>까지
[한국현대사 OST] 이소라 <개희의 노래>에 비췬 김해경, 그리고 김수임
 
김수민   기사입력  2008/11/07 [16:09]
  2001년 9월 4일, 역사학자 방선주와 정병준의 요청으로 기밀해제된 미육군 정보국의 문서파일과 미 국립문서보관소의 ‘베어드 조사보고서’가 언론에 보도되었다. 조선공산당계(박헌영계)의 주요 인물로 꼽히는 이강국과 임화(시인) 등 남로당의 일부 핵심간부들이 CIC 요원이라는 충격적인 내용이었다.

  아마 이 대목에서 해방정국기 한국사에 관심을 가진 이들이라면 하나 같이 김수임을 떠올렸을 것이다. 이강국의 애인이자 존. E. 베어드 대령(미8군 사령부 헌병감)의 동거녀였던 김수임은 오랫동안 이강국의 기밀입수 활동에 이용되었던, 달리 말해 기밀 유출을 위해 베어드에 접근했던 ‘여간첩’으로 알려져 왔다. 하지만 그날 미 육군부가 1950년 8월부터 석달동안 조사하여 작성한 ‘베어드 보고서’는 김수임의 혐의에 관해 증거가 불충분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그리고 베어드 대령이 거꾸로 김수임을 통해 이강국이 전하는 북한측 정보를 수집했을 수도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1930년대말 김수임은 유학 시절 독일공산당에 참가한 바 있는 이강국을 만난다. 그는 이강국에게 공산주의 사상이나 로자 룩셈부르크의 활동을 전해 듣지만, 이념보다는 사랑에 이끌렸던 것으로 보인다. 자유분방한 성품에 지성을 겸비하고 특히 영어에 능숙해 세브란스병원에서도 일했던 그녀는, 그러나 한반도 분단의 상황에서 애정의 분열을 경험해야 하는 ‘약한 여자’가 되고 말았다.

‘미모의 여간첩’ 김수임? 만들어진 신화일 뿐

▲ 지난 1950년 간첩죄로 체포된 김수임     © 연세춘추 <연두>
  이강국이 체포령을 피해 북한으로 도주한 후 그녀는 반도호텔에서 미군정 직원으로 근무하였다. 이때 그의 상관인 베어드 대령은 그녀에게 끈질기게 구애하였고, 그녀는 옥인동 주택에서 동거에 들어갔으며 서른 일곱 나이에 아들인 김원일을 출산한다. 1949년 6월말 주한미군이 철수한 뒤에도 베어드는 경찰고문으로 남한에 잔류하였으나, 그들의 동거는 지속되지 못한다. 1950년 봄 김수임이 간첩죄로 체포된 탓이었다.

  그렇지만 21세기 벽두에 비로소 공개된 CIC의 비밀문서가 아니더라도 김수임의 간첩행위 13가지는 대부분 그 당시에 반박되고 있었다. 우선, 미군정의 체포령에 직면한 이강국을 은닉하고 월북을 도와준 것은 분단이 확정되기 이전의 일이라 간첩죄의 구성이 불가능했고, 기껏해야 범인은닉이나 도주방조와 같은 일반형법, 38도선 월경금지에 관한 법률 위반을 적용할 수 있을 뿐이었다. 미군철수나 한국경찰의 무장에 관한 기밀을 적국에 제공했다는 혐의는, 베어드가 고위전략적 정책을 잘 알지 못했고 따라서 김수임에게 기밀을 유출하지도 않았으므로 터무니 없는 것이었다. 민간인이 군법회의에서 재판을 받는 것도, 공포한 흔적도 없는 국방경비법을 적용한 것도 마찬가지였다. 

  그럼에도 당국은 남로당 군사부 책임자로 특무대에 갇혀 있던 이중업을 김수임이 탈옥시켰다고 여론몰이하였다(이는 정작 기소내용에서는 누락되었다). 김수임의 집에서 나왔다는 권총을 검사들이 증거물로 내세웠다가 혐의와 무관하다는 변호인들의 이의제기가 먹혀 채택이 보류되는 일도 벌어졌다. 심한 고문에 의해 허위사실을 자백했을 가능성은 당시나 지금이나 제기되는 것으로, '베어드 파일'도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김수임은 재판 시작 3일만에 한번의 공판으로 사형을 언도 받았고 형은 한국전쟁 직전에 서대문형무소에서 집행되었다. 그후 그녀는 ‘여간첩의 신화’로 전해지며 네덜란드 출신 무용수이자 독일과 프랑스를 오가며 스파이 활동을 했던 마타하리와 곧잘 비견되었다. 프랑스 정부가 마타하리의 간첩행위를 부풀려 정치적 희생양으로 삼았다는 사실은 제쳐둔 채  ‘미모의 여간첩’이라는 만들어진 공통점만 부각되면서 말이다.
 
  김수임의 사후 반공주의를 지향하는 여러 저작과 방송들이 김수임을 다루었고, 비교적 최근에는 윤석화가 주연으로 출연한 <나, 김수임>(연극) 등이 개인적 고뇌에 초점을 맞추어 그녀를 변호하였다. 2006년 KBS가 상영한 <서울 1945>도 김수임을 모델로 한 인물 김해경(어린시절의 이름은 ‘개희’)를 등장시키고 있다. 한은정이 열연한 김해경은 가난한 어린시절과 같은 성장과정이나 반도호텔에서의 근무와 같은 이력에서 김수임과 닮아 있다.
 
  하지만 이강국에 참고하여 만들어진 최운혁(류수영 분)이 공산당계였던 실제 모델과는 달리 여운형(신구 분)의 동지로 나오듯, 김해경 또한 김수임과 다른 점이 많다. 김해경은 이화여전을 나온 김수임처럼 고학력의 소유자는 아니었다. 최운혁이 월북한 뒤 그녀에게 구애하는 인물도 미국인 장교가 아니라 양심적 우익이자 최운혁의 벗인 이동우(김호진 분)였다. 김해경은 간첩으로 체포되지만 한국전쟁 발발 직후 인민군의 도움으로 풀려나 최운혁과 해후한다. 그리고 끊이지 않는 포화 속에서 빨치산에 합류한다.
 
김해경, "당은 오류가 없나요?"

  김해경은 비정치적이면서도 정치적이다. 김수임보다 또는 김수임만큼. 김해경의 어머니(고두심 분)는 최운혁에게 결혼을 허락하면서 “정치에 손을 떼고 대학 교수 일에 전념하라”고 부탁하고, 최운혁은 ‘좌우합작까지만’이라는 단서를 달면서 이를 받아들인다. 그러나 김해경의 운명은 순탄할 수 없었다. 정치에도 이념에도 관심 없는 이 여자는 사랑 앞에서 후퇴하지 않는 열정을 타고 해방정국으로 더욱 깊숙이 빠져 들어간다.

  극의 막바지, 조선노동당은 최운혁의 스승이자 빨치산을 지도하던 문동기(홍요섭 분)를 제거하라는 밀명을 내린다. 우연히 이를 먼저 알아챈 김해경은 냇가에서 최운혁에게 묻는다. “당(黨)은 정말... 오류가 없나요?” 김해경은 단지 김수임의 분신이 아니라 해방정국의 격동에 휘말린 ‘연약한 여성’의 대변자이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비록 정치적인 학습은 깊지 않았지만 어떤 회색의 이념으로도 뭉갤 수 없는 삶의 푸르름을 갈구했다.

  구사일생으로 한국을 탈출해 일본으로 건너간 해경이 들어간 어느 교실, 액자에는 태극기도 인공기도 걸려 있지 않았다. 이것이 최종회의 마지막 장면이다. 높지 않은 시청률과 극우단체의 비난 속에 드라마가 막을 내린 후, 열성 시청자들은 이소라가 노래한 <개희의 노래>를 들으며 김해경을, 그리고 김수임을 추억하고 있다.
 
* 웹진 <연두>(www.yondo.net)에도 게재되었던 글입니다.
* 글쓴이는 경북 구미시 시의회 의원(무소속)입니다.
2010년 6.2지방선거에서 영남지역 최연소(27세) 기초의원에 당선돼 현재 시의원으로 활동 중입니다.
2002년 <대자보> 필진으로 참여한 이래 다년간 정치칼럼 등을 연재해 왔으며, 새로운 모습으로 다시 <대자보> 독자들과 만납니다.
기초의원으로서 풀뿌리 정치 현장에서의 경험을 독자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블로그 : http://kimsoomin.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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