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과학 >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로 보내기 글자 크게 글자 작게
수하르토: 경제발전은 독재를 넘어설 수 있는가
[최을영의 시사인물 포커스] 철권통치 독재자와 경제발전 ‘영웅’의 간극
 
최을영   기사입력  2008/03/24 [19:37]
용서?
 
32년간 인도네시아에서 절대 권력을 유지하다 1998년 5월 피플파워로 물러난 인도네시아의 수하르토 전 대통령이 2008년 1월 27일 사망했다. 1965년 9월 30일 인도네시아 공산당의 쿠데타를 진압하고, 1968년 대통령에 오르며 권력을 잡은 수하르토는 1998년 5월 21일 대통령을 사임할 때까지 32년간 인도네시아의 절대독재자로 군림했다. 수하르토는 50만∼100만 명에 이르는 반대파들을 숙청했고, 부정부패를 일삼으며 철권통치를 한 독재자라는 평가를 받는 한편으로는 경제발전을 일궈낸 '영웅'으로 평가받기도 한다. 그의 사후 인도네시아에서 그에게 '국가영웅'이라는 칭호를 주는 것을 두고 국론이 양분되고 있는 현상은 그에 대한 평가가 혼재되어 있다는 것을 반증한다. 이에 대해 전제성 전북대 교수는 수하르토는 용서받기 이르다며 다음과 같이 일침을 놓는다.

"인도네시아처럼 풍요로운 나라가 왜 이렇게 가난하느냐는 질문의 답변을 찾는 방법은 수하르토의 탈신비화에 있다. '대장군' 수하르토는 '대도'였을 뿐만 아니라 약탈한 돈을 한 푼도 돌려주지 않고 눈을 감았다. 그는 집권 중에 자식들을 모두 재벌로 만들었고, 그 자신도 일곱 개의 자선재단을 운영하면서 국고를 털어갔다. …… '용서'에 관한 담론은 중요한 사실을 감추고 있다. 수하르토의 죄는 부패만이 아니다. 수하르토는 민족 통합을 명분으로 국민을 죽인 대량학살자였다. 집권 과정에서 100만 명, 동티모르 침공으로 20만 명, 아체와 파푸아의 군사작전으로 수만 명, 전국적 범죄 소탕작전으로 수천 명이 살해되었고, 집권 말기에는 사회운동가 연쇄 납치실종 사건이 발생했지만 소송은 물론 진상규명도 추진되지 못하고 있다. 피해자 가족들은 아직 시퍼렇게 살아 있다. 용서는 죄가 무엇인지 먼저 밝혀져야 가능한 법이다. 진상규명이 부재하여 수하르토가 죽어서도 '역사'가 되지 못하는 역설을 지난 10년간 동남아 최고의 절차적 진전을 이룩했다는 인도네시아의 민주주의가 끌어안고 있는 것이다."1) 

용서는 과연 용서받을 짓이 무엇인가가 먼저 드러나고, 용서받을 짓을 한 사람이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고 용서를 구할 때 이루어질 수 있다. 그러나 수하르토는 끝까지 자신은 부정부패를 저지른 적이 없다고 주장했다. 용서받을 짓을 하지 않았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과연 그의 무엇을 용서할 것인가.

그러나 인도네시아의 사정은 그렇지 않은 모양이다. 한국에서 IMF와 함께 보수집단이 박정희의 망령을 불러일으켰듯 인도네시아에서는 수하르토의 망령이 되살아나고 있다. 부정부패와 철권통치에 바탕을 둔 경제발전이라는 허울과 함께 말이다. 이것이 수하르토 사망 후 인도네시아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남의 일 같지 않은 이유다.
 
▲인도네시아를 32년간 철권통치했던 수하르토 전 대통령은 지난 1월 27일 지병으로 사망했다.     © 로이터

권력의 중심으로
 
수하르토는 개발독재자란 측면에서 박정희와 많이 닮아 있다. 하긴 동남아시아의 역할 모델이 한국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당연한 일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수하르토는 권력의 중심으로 나아가는 과정마저도 박정희와 닮았다. 박정희가 만주군에서 남로당으로, 다시 국군으로 옷을 갈아입었던 것처럼 수하르토 역시 권력을 잡기 위해 여러 번 옷을 갈아입었고, 박정희가 반공과 공안정치를 '전가의 보도'처럼 휘둘렀듯이 수하르토 역시 그랬다.

수하르토는 1921년 자바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당시 인도네시아는 네덜란드의 식민지였는데 수하르토는 정규교육을 받은 후 1940년 네덜란드의 식민 군대에 하사관으로 입대했다. 그러다가 1942년 일본이 인도네시아를 점령하자 일본군이 지원하던 군대로 입대해 소대장으로 복무한다. 그 후 1945년 일본의 패망으로 인도네시아가 독립하자 인도네시아 국군의 전신인 인민보안대의 부대장으로 재직하게 된다. 이후 수하르토는 인도네시아를 재식민지화하려는 네덜란드에 맞서 뛰어난 전공을 세움으로써 군대 내에서 승승장구하게 되고, 1963년에는 육군 전략 예비부대를 지휘하는 중책을 맡았다.

수하르토가 권력을 잡을 수 있었던 계기는 1965년 9월 30일 인도네시아 공산당이 군부 인사 6명을 살해하면서 일으킨 쿠데타를 진압하면서부터다. 당시 반공적 색채가 짙었던 군부는 점점 자본주의 진영과 멀어지던 수카르노 대통령과 대립하던 때였고, 마침 공산당의 쿠데타가 일어나자 수하르토가 이를 진압하면서 권력의 중심으로 떠오르게 되었다. 후에 9·30 사태는 수하르토를 위시한 군부에 의해 조작됐다는 의혹을 받게 된다. 그 이유는 당시 세계 최대 규모의 300만 명이라는 당원을 갖고 있던 인도네시아 공산당의 쿠데타가 하루 만에 그토록 쉽게 진압당하는 게 불가능했다는 것이다.
 
또 9·30 사태는 당시 동남아시아에 퍼져가던 공산 세력을 막기 위한 미국과 인도네시아의 권력을 잡으려던 수하르토와의 밀월관계에서 발생한 정치적 공작일 가능성도 제기됐다. 1958년 미국의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친공산 정책을 추구하던 수카르노를 축출하기 위해 중앙정보국(CIA)을 통해 반공 세력을 지원하는 한편 인도네시아 군부의 쿠데타 및 정권 탈취를 배후 지원했다.2)

미국을 등에 업은 수하르토는 철권통치를 펴게 된다. 쿠데타 진압 이후 수하르토는 공산주의자들과 좌파, 친수카르노 인사 등에 대해 대규모 숙청을 벌이게 된다. 이때 희생됐던 사람만 해도 50∼100만 명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 수하르토는 1975년 동티모르를 병합하는 과정에서도 30만 명에 이르는 사람들을 학살한 것으로 알려졌다.
 
절대권력을 얻다
 
정책 기반을 다진 수하르토는 1968년 3월 대통령에 선출됐고, 정치적 안정과 경제발전을 최우선에 두는 '신체제'를 선언한다. 대통령에 선출되기 전 수하르토는 권력을 잡기 위해 정당 통제와 언론 통제라는 독재자 고유의 무기를 통해 다각적인 노력을 기울인다. 수하르토는 부정적인 기사를 내보내는 신문사를 폐간하는 등 언론 통제정책을 펴는 한편 정당 체계를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바꾸었다. 그는 1964년 10월 창건된 군부의 정치조직인 골카르(GOLKAR)당의 세력을 키우는 데 집중한다. 그 결과 1967년 말까지 약 281개 조직이 골카르당에 편입되었다.
 
그리고 1966년 인도네시아 최대 정당인 공산당을 불법화해 무력화시키는 한편 관료사회에 막대한 영향력을 갖고 있던 인도네시아 국민당을 견제하기 위해 공무원들의 정치활동을 금지했고, 선거집회를 가지려고 하는 모든 정당들은 당국의 심의를 거치게 했다. 정당 통폐합도 이뤄졌다. 당시 수하르토는 국가정보부, 안보와 질서회복을 위한 작전사령부, 특수작전부, 내무성의 사회정치총국 등 4개의 기구를 통해 정당 활동을 통제했다. 그 통제는 탈법적인 것이었지만 누구도 그에 저항하지 못했다.3) 

결국 수하르토의 골카르당은 1971년 총선에서 승리했다. 이후 총선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인도네시아의 총선과 골카르당에 대해 박성관은 다음과 같이 분석한다.

"골카르는 군부의 보호하에 1966년부터 수하르토가 퇴진하기까지 지속적으로 인도네시아 정치를 지배하여왔다. 이러한 군부의 정치개입과 정치적 기반 조성을 위한 적극적인 개입과 영향(일종의 국가조합주의로의 변화로도 볼 수 있음)은 수하르토 정권이 소위 권위주의 정권의 전형적인 모델이었다는 점을 입증해주고 있다. 일반적으로 관료적 권위주의 정권에서의 정당체계라는 것은 곧 일종의 정권 유지를 위한 헤게모니 정당의 존재를 의미하는 것이다. …… 1971년 이후의 인도네시아 총선들은 단지 수하르토 정권의 정통성을 위한 단순한 비경쟁적·비민주적 시험무대였다고 볼 수 있다. 즉, 인도네시아 총선들은 수하르토 정권의 정통성을 확인하고 과시하기 위한 형식적인 절차적 성격에 불과하였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4)
 
경제발전과 부정부패
 
수하르토는 정당과 언론 통제를 통해 권력 기반을 다지는 한편 독재권력의 정당성을 얻기 위해 경제발전에 집중하게 된다. 인도네시아는 석유수출국기구(OECD)의 다섯 번째 산유국이었고, 서방에서는 인도네시아의 자원에 군침을 흘리고 있었다. 수하르토는 서방 세계의 투자 유치에 총력을 기울였고, 석유와 가스 산업으로 연평균 7%의 경제성장률을 기록했다.
한편으로 그는 전체 국민 중 70% 이상이 농업에 종사하는 인도네시아의 성격을 고려해 농업 발전에 박차를 가하게 된다. 수카르노 정권에서 식량 수입국이었던 인도네시아는 수하르토 정권에 이르러 농업 생산력이 증대되었다.

수하르토의 주도하에 이뤄진 경제발전은 '독재자'란 이미지를 불식시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하긴 1966년 630%에 달하던 인플레가 1972년에는 9%대로 떨어졌으니 이는 당연한 일이었을 게다. 그러나 이러한 경제발전의 이면에는 부정부패가 자리 잡고 있었다. 절대 권력은 절대 부패한다고 했던가. 수하르토는 슬하의 자녀 모두(3남 3녀)를 인도네시아의 재벌로 만들었고, 자신 역시 자선재단을 통해 엄청난 규모의 재산을 은닉했다. 수하르토 집안은 항공사, 은행, 방송국, 택시회사 등을 소유하고 있으며 인도네시아의 경제 권력을 여전히 쥐고 흔들고 있다.

인도네시아에 만연한 부정부패는 결국 수하르토의 실각을 가져왔다. 수하르토가 실각한 직접적인 계기는 1997년 몰아친 동아시아의 금융위기지만 IMF와의 협상과정에서 수하르토가 보인 태도 때문이기도 했다. 그는 IMF의 구조조정 프로그램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했다. 수하르토가 32년에 걸쳐 구축한 총체적 부패구조를 구조조정하겠다는 안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것이다. 수하르토는 IMF의 구조조정안을 거부한 것은 물론 7선에 성공한 후 단행한 개각에서 개혁해야 할 인물로 지목된 자신의 딸을 내각에 포함시켰다. 결국 IMF는 구제금융 지원을 중단했다.

1997년 시작된 동아시아의 금융위기는 1998년 가속화됐다. 생필품 가격은 천정부지로 치솟았고, 이에 국민들은 생필품 가격을 내리라는 시위를 연일 계속했다. 그리고 유류 및 전기에 대한 보조금 지급을 철회하자 시위는 가열 양상으로 치달았다. 수하르토는 이를 무력으로 진압했는데 이 과정에서 시위 학생이 사망하는 사건이 벌어지자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커져갔다. 경제적인 측면에서 발발한 시위는 정권 퇴진 시위로 발전했다. 그러나 수하르토는 이집트 카이로에서 열린 개발도상국정상회담(G15)에 참석해 골프를 즐기는 등 아직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결국 미국과 군부마저 등을 돌리자 수하르토는 1998년 5월 21일 대통령직을 내놓았다.
 
수하르토의 그림자
 
권좌에서 물러난 후 수하르토의 부정부패에 대해서 단죄가 내려지는 듯 보였다. 그러나 경제권력을 여전히 틀어쥐고 있는 수하르토 일가와, 여전히 힘을 갖고 있는 골카르당을 위시한 그의 추종 세력 때문에 그마저도 제대로 진상규명이 이뤄지지 않았다. 2000년 인도네시아 검찰은 각종 부정부패 혐의로 그를 기소했지만, 2006년 5월 병세 악화를 이유로 불기소처분을 내렸다. 2004년 국제투명성기구에서 수하르토가 국고에서 빼돌린 돈이 150∼350억 달러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하며 그를 '20세기 가장 부패한 정치인'으로 선정했지만 그에 대한 처벌은 이뤄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 와중에 지병이 악화되자 그에 대한 용서론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모두 그의 추종 세력이 인도네시아의 권력을 틀어쥐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 덕분에 수하르토는 "집권 기간에 살인과 처형을 일삼은 독재자였으면서도 안락한 노후와 품격 있는 임종을 맞은 보기 드문 경우"를 남겼다.5) 더구나 골카르당은 그에게 '국민영웅' 칭호를 부여하는 입법까지 제안한 상태이니, 참으로 안락한 말로가 아닐 수 없다.

비록 수하르토는 죽었지만 그가 남긴 그림자는 아직 인도네시아에 길게 남아 있다. 그가 실각한 이후 인도네시아는 점진적으로 민주주의 사회로 이행하고 있지만 그가 남긴 유산인 부정부패의 만연, 막강한 경제권력 등은 여전히 힘을 발휘하고 있다. 그러나 인도네시아 국민들은 수하르토가 남긴 이러한 유산 때문에 제대로 된 국정운영이 이뤄지지 않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그리워한다. 경제발전을 일궈낸 공 때문이다. 한국여성정책연구원 김은경 연구기획팀장의 말을 들어보자.

"그러나 수하르토 정권 이후 민주주의적 제도와 절차를 도입하고 개혁하려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몇 가지 고질적인 문제가 잔재해 있었는데, 그중 가장 큰 문제는 선거와 정당, 지방정부에까지 퍼진 '부정부패의 만연'이었다. …… 그 결과 인도네시아는 SBY(수실로 밤방 유도요노 대통령) 정권하에서 실시된 개혁을 전혀 느끼지 못하게 되었고, 오히려 수하르토 시절의 강력한 통치자에 대한 향수가 번지게 되었으며, 심지어 국민들은 잠재된 범죄가 드러나고 경제가 부진한 원인을 '민주주의'에 있다고까지 생각하게 되었다."6)
 
인도네시아의 현 상황은 한국의 상황과 묘하게 맞물린다. 그런 점에서 수하르토의 그림자는 박정희의 그림자와 맞물리며 개발에 초점이 맞춰진, 경제에 초점이 맞춰진 현재의 한국 사회를 돌아보게 한다.
 
* 본문은 월간 <인물과사상> 2008년 3월호에 실렸습니다.

[각주]
 
1) 전제성, 「용서받기 이른 수하르토」,『경향신문』, 2008년 1월 30일, 31면.
2) 김환표, 「수하르토: '절대왕정'을 건설한 시대의 독재자」, 『권력과 리더십4』, 인물과사상사, 1999, 218~219쪽.
3) 박성관, 「수하르토 정권하의 총선과 정당정치: 하나의 정치학적 지역연구」, 『한국정치학회보』, 33집 제3호, 1999, 242~246쪽.
4) 박성관, 「수하르토 정권하의 총선과 정당정치: 하나의 정치학적 지역연구」, 『한국정치학회보』 33집 제3호, 1999, 263쪽.
5) 최진주·이민주, 「수하르토 인도네시아 전 대통령 사망- 32년 피의 통치·개발 독재로 악명」, 『한국일보』, 2008년 1월 28일, 14면.
6) 김은경, 「"너무 깊게 드리워진 수하르토의 그림자"」, 『프레시안』, 2008년 2월 5일.
트위터 트위터 페이스북 페이스북 카카오톡 카카오톡
기사입력: 2008/03/24 [19:37]   ⓒ 대자보
 
  • 도배방지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