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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의 오만과 편견, 주체사상의 내재적 이해
[책동네] 남과 북의 연정을 위한 신은희의 <우리 다시 사랑할 수 있을까>
 
황진태   기사입력  2007/06/06 [12:24]
지난해 신은희 교수가 <통일뉴스>에 기고한 것을 인터넷으로 이미 읽었던 차에 책이 나온 소식은 알았지만 다시 읽을 필요가 있을까 싶었다. 그러나 책을 읽고 난 후에 뒤늦게 깨달은 거지만 다시 읽은 신 교수의 책은 통일에 대한  진한 고민에 빠지게 했다.
 
주체사상의 내재적 이해
 
저자가 종교철학을 전공한 만큼 본서에서는 종교가 중요한 화두로 풀어나간다. 편향된 보수, 기독교 신자라면 본서를 읽으면 책 표지의 색깔보다 더 진한 빨갱이라고 부를 법한 주장들이 책속에 가득하다.
 
기독교와 주체사상이 일란성 쌍둥이와 같다는 독특한 진단을 통해서 남북한의 공통성을 끄집어내어 통일을 위한 단초를 만들 것을 제언하는 것은 신선하게 다가온다. 이 둘이 단초가 되는 이유는 북한은 주체사상을, 남한은 (상대적으로) 기독교가 사람들의 사고에 지대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와 주체사상의 대화는 과거 불신하고 적대했던 두 전통이 생명으로 다시 만날 수 있는 희망의 초대일 뿐이다. 각각의 전통이 지니고 있는 생명적 이해를 극대화함으로써 우리 민족 공동체의 생명권을 함께 살려보자는 애타는 호소이며 외침인 것이다.”(185쪽) 
 
▲저자가 <통일뉴스>에 기고한 칼럼들과 통일논문들, 민족, 평화, 통일에 대한 주제로 남과 북 어느 한쪽에 치우지지 않고 자유로운 시각으로 조국의 아픔을 표현하고 있다    ©통일뉴스, 2007
주체사상을 설계했었던 황장엽조차도 주체사상을 부정하고 있는 판에 주체사상이 쓸모가 있겠는가는 반문이 있을 수 있다. 또한 남한에서도 80년대 PD계열인 이진경을 필두로 하여 주체사상비판서가 나오기도 했다. 이론의 비판에 앞서서 맑스의 유물사관과 결정적인 차이라는 주체사상의 인간중심에 대해서도 평양을 방문했다가 주체사상탑, 김일성 동상에 접근하는 것에 대해서 까탈스럽게 구는 북한사람들을 마주하면 주체사상은 허언이고 물신주의를 생각나게 하는 현 시점에서 주체사상이 과연 효용이 있느냐는 반문은 당연한 반응이다.
 
그러나 본서에서 주목하고 있는 문제적 핵심은 주체사상이 아무리 고루해졌다 하더라도 통일 당사자인 북한사람들의 사고에 여전히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에 저자는 주체사상에 주목하는 것이다. 주체사상이 물신화 되고 퇴색됐다는 지적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사고를 송두율 교수의 말마따나 내재적 접근법이라고 부르든 뭐라고 지칭하든지간에 상대방을 이해하지 못하고서 어떻게 통일을 진척시킬 수 있겠는가.
 
한국전쟁 이후부터 현재까지 미국에 저항하는 북한의 주체적인 자세는 단순히 사전적 정의로서 그칠 것이 아닌 지난한 역사적 맥락이 함축되어 있다. 그래서 저자가 지적하듯이 북한 관료가 회담차 제주도를 방문해서 목격한 남한의 즐비한 영어 간판들을 비판했던 것은 그들의 주체적인 입장에서는 당연한 발문인 것이다.
 
기독교의 오만과 편견
 
주체사상과 더불어 남한의 핵심적인 사상을 차지하고 있는 기독교에 대해서도 비판적으로 접근한다. 대표적으로 남한의 보수 기독계가 북한의 봉수교회를 ‘가짜’로 판명하는 그 기준은 무엇인가. 세계적으로 민중신학, 생태신학 등 기존 교리에 대한 재해석이 널리 알려지는 추세에서 국내 보수 기독교는 여전히 미국 부시정부를 지지하는 미국 남부의 기독교 근본주의를 가감 없이 받아들이면서 다른 신학의 여지는 봉쇄했다.
 
“오늘날까지도 미국교회를 따라하면 정상교회, 진짜교회가 되고 ‘우리 식으로’ 믿으면 이단교회, 가짜교회가 되는 것은 전형적인 종교제국주의의 지배논리일 뿐이다. 이런 제국주의자들의 미국식 복음을 전달하지 못해 안달하는 한국 목회자들의 종교적 노예근성은 남북의 통일문화를 이루는 데 큰 걸림돌이 된다.”(65~66쪽) 
 
저자는 포스트모더니즘 역사관을 도입하면서 주체사상을 한물간 주사파들의 화석이념으로 볼 것이 아니라 현재도 주체사상을 신봉하는 북한사람들을 이해하고, 주체사상의 인간중심과 기독교 본디의 인간중심(최초의 휴머니스트가 예수라는 누군가의 주장처럼)을 복원하여 남북한 통일의 사상적 원천이 되기를 시도한다. 여기서 포스트모더니즘이 괜한 사치단어가 아니다. 6.15공동선언에 밝혀있듯이 남북한 상호 간에 대등한 통일의 주체로 보는 ‘인정의 정치’와 각 체제 속의 다양성을 용인하자는 것이다.
 
북한에 대한 몇 가지 편견에 대한 해명
 
저자는 우리 안에 작동하는 ‘북한은 항상 전쟁만 생각하는 국가’라는 편견, 단견을 깨는 몇 가지 사례를 언급했는데 몇 가지를 소개한다면 첫째, 종교와 관련해서는 미국이 종교탄압국으로 지목했던 북한은 김일성 종합대학에 종교학과가 생기면서 세계종교에 대한 연구와 더불어 성당, 교회, 절 등이 구축되었다.

다만 북한종교의 차별성은 ‘정치화된 종교’라는 점인데 이는 한국전쟁 이후에 미국의 경제제재로부터 살아남기 위해서 “북은 한국전쟁을 경험하면서 미국에 의해 전멸된 국가를 재건하는 과정에서 강력한 수령론과 공동체적 문화가 뿌리내렸다. 그들은 피어린 땅위에 서양의 기독교가 뿌리내릴 수 있는 도덕적 기초가 존재하지 않았다.”(129쪽)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주체사상과 맞물려서 외부적 요인에 의하여 정치화된 민족종교의 측면이 있더라도 기독교에 대해서 무조건 억압만 했던 것은 아니다. 김일성은 “‘하늘을 믿어도 조선사람은 조선의 하늘을 믿어야 한다’는 민족적 입장을 고수”(95쪽)하며 즉, 민족에게 도움이 되는 종교를 강조했고, 외세의 압력 속에서 북한이 생존할 수 있는 정신적 지주로서의 종교는 받아들였다. 이러한 국제적 상황을 무시하고 미국의 대표적 종교인 기독교를 믿지 않으면 종교탄압국이라고 지목하는 것은 어린애가 생떼를 부리는 것과 같지 않을까.
 
다음으로 흔히 북한사람들은 ‘미제타도’를 외치면서 미국에 대해서 적대적이기 만하고 폐쇄적일 거라 생각하겠지만 이러한 편견도 의심해볼 필요가 있다. 미국을 비롯한 남한의 북한에 대한 개혁개방만이 유일한 방법인가에 대해서 회의를 해봄직 하다. 북한은 이미 자신만의 개혁개방을 시도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북한)학생들에게 “여러분은 왜 영어 배우는가”하고 물으니, 과거 같았으면 아마도 “조국의 적 미제국주의자의 압살책동을 까부수기 위하여...” 하면서 아주 공격적이고 전투적인 대답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예상과는 달리 “이제는 세계가 다원화된 사회이기 때문에 서로 공존하기 위하여 다른 문화양식을 배우기 위하여 영어도 배운다”고 대답했다. 북의 청년들의 사고가 그렇게 부드럽고 유연하다니... 정말 북도 많이 변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아니 어쩌면 내가 북의 현실을 너무 모르고 있었는 지도 모른다.”(26쪽)
 
좀 더 구체적인 경험을 인용한다면 평양외국어 대학의 경우에 학생과 교직원들은 교내에서 영어를 비롯한 외국어를 통한 의사소통을 의무적으로 하고 있으며 해외유학이나 연수를 가지 않았더라도 영어로 농담을 할 정도의 실력을 보유하고 있다고 술회했다. 
 
이러한 북한의 모습은 우리가 지금까지 알고 있었던 폐쇄적인 북한의 모습과는 매우 상이하다. 저자는 “외부에서는 북의 교수들이 대단히 단순하고 경직되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들은 문화 상대주의와 가치의 다원성을 지극히 잘 이해하고 있었다.”(260쪽)고 말한다. 
 
그간 북한에 대한 우리의 편견이 얼마나 강고한 편견이었는지를 확인해준다. 서로를 왜곡되게 바라보게 만드는 편견이 앙금처럼 자리한 이상 통일은 정말 요원하다.
 
우리 다시 사랑할 수 있을까?     
 
지난해 처음에 책 표지만 보고서 <통일뉴스>에서 출판된 책이 맞는 가하고 의아했던 게 생각난다. 책제목이 ‘우리 다시 사랑할 수 있을까’라니... 연애소설로 보아도 무방한 디자인과 제목이지 않은가. 얼마 전 남북철도개통을 보면서 오랫동안 서로를 그리워했던 연인의 만남처럼 설레었고 조심스럽게 TV를 시청했던 것을 상기하면 신은희 교수의 비유가 그리 틀리지는 않는 듯하다.
 
사랑은 상대방에 대한 존중에서 시작한다. 이번에 소개한 책은 바로 포스터모더니즘, 주체사상, 기독교 등 하나같이 민감하고 서로 어색하기도 한 뜨거운 화두들을 통해서 저자는 독자들에게 사랑의 기술을 알려주고자 한다.
 
그런데 이러한 상대방의 존중을 통한 사랑이전에 선행되어야 할 사랑이 있는데 바로 나 자신에 대한 사랑이다. 지금 남한은 북한에 연정을 품을 준비가 되어 있을까. 앞서 서두에서 언급했었던 민경우 사무처장에 대한 석방을 촉구하는 칼럼을 쓴지도 5년이 지났는데도 불구하고 <통일뉴스>에 또 다른 필자였던 사진작가 이시우씨가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된 게 대한민국의 우울한 현재다.
 
자신부터 사랑하지 않는다면 남을 사랑할 자격이 없다. 이는 남북관계에서도 유효하다. 민감한 사안을 다루는 신은희의 본서에서 생각이 다르다고 격분하기 전에 그러한 생각이 공존할 수 없는 대한민국의 현실에 대해서 먼저 분노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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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7/06/06 [12:24]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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