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여정부 시절 굵직한 국가적 현안이 등장할 때마다 나온 말들이 있다. 바로 '국익'이라는 말이다. 파병에서 한미FTA를 강행 추진하는 데 있어, 일명 참여정부라 불리는 정권에서 가장 자신의 정책 결정을 강행하는 데 있어서 활용한 것이 바로 '국익'이었다. '국익'이라는 말은 권력을 가진 집단이 자신들의 특정한 이해관계를 관철하는데 편리한 요술 방망이다. 국익은 대개의 경우 추상적이고 실체가 애매모호하다. 추상적이고 애매모호하면서 검증이 불가능한 것이 국익의 실체이다. 국익의 바로 이런 성격 때문에, '국익'은 권력집단과 정권이 이데올로기로 자주 사용하게 된다. 자신들의 정책이 가진 특정한 이익을 보편적 이익으로, 민주적 절차를 축약하여 권위주의적 방식으로 정책을 추진하는 합리화로 '국익'이 동원되는 것이다. 노무현 정권은 참여를 기본 가치로 내세우면서 낡은 정치와의 차별성을 강조하면서 집권하였다. 그런데 이런 그들의 성격과는 달리 노무현 정권이 가장 애용한 레파토리의 하나가 국익이었다는 점은 상당히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침략전쟁임이 이제와서는 확연해진(파병 당시에도 거의 드러난 것이지만), 이라크 파병이 강행된 것도 오로지 국익 때문이었다. 밀실의 고뇌를 통해 강행된 한미FTA 역시 거부할 수 없는 ‘국익’을 위해서라고 한다. 묻지마 황우석 지원도 ‘국익’이 빚어낸 해프닝이었다. 이외에도 미군 기지와 부안 방폐장 문제 등의 문제에서도 ‘국익’이라는 이름의 절대 명분은 모든 민주적 참여를 봉쇄하는 참여정부의 슬로건이 되었다. 최근 <국기법>에 대한 문제가 잠시 언론을 탔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 만들어져 ‘대통령령’으로 시행되던 <국기에 대한 맹세>를, 참여정부의 행정자치부가 ‘법률’로 지위를 상승시키고자 한 사건이었다. 그때 그 시절의 문구를 그대로 유지한 상태로 말이다. 물론 이 사건 이후 여론의 반대로 문구를 조금 수정하겠다는 방향을 보이고는 있다. <나는 자랑스러운 태극기 앞에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다짐합니다.> 한때 이 국기에 대한 맹세는 오전과 오후 국기가 게양되는 일정한 시간에 전국에 울려퍼졌다. 그럼 걸어가던 모든 사람들이 갑자기 제 자리에 서서 가슴에 손을 올리고 경건한 자세로 서 있는다. 그리고 극장에서도 영화 관람을 하기 전에는 애국가가 울려퍼지고 이 영화 관람을 가능하게 해준 국가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졌다. 국가와 국기가 시민의 광장을 지배하는 순간 모든 행위는 정지되고 절대적 애국과 복종의 시간이 나타난다. 이렇게 국익과 국가와 국기가 강조하는 권력 아래에서는 참여와 민주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오로지 지도자의 고뇌에 찬 구국의 결단만이 중요하다. 소란스러운 모든 논의는 국익과 국가를 위해 중지되고, 지도자의 밀실에서의 결단을 존중해야 하는 것이다. 침략전쟁에 대한 파병 이후 참여정부라고 불리는 노무현 정부는 <참여> 대신 <국익>을 통치의 슬로건으로 내걸었다. 그래서인지 이 국기법은 2004부터 행정자치부에서 검토되었다고 한다. 이후 국익은 시민사회의 논의와 참여를 봉쇄하면서 노무현 정권의 주요한 정책적 합리화의 수단이 되었다. 베트남전의 파병과 국익 하나로 독재를 이끈 박정희 정권이 노무현의 통치 모델이 되고 있는 느낌이다. 사회를 이루는 시민과 국가를 구성하는 국민들이 자신의 운명을 이끌고 만들어가는 주체가 될 때, 그리고 이렇게 만들어진 사회가 국제적 가치와 인류의 보편적 원칙에 이바지할 때, 국가와 민족은 시민과 국민들에게 긍지를 주는 집단으로 충성의 대상이 된다. 법적으로 강제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말이다. 보통, '국익'과 ‘국기에 대한 맹세’는 자신의 권력과 한 집단이 정당성을 상실할 때, 강제적으로 동원된다. 참여정부에서 국익과 국기의 맹세가 등장한 시점과 완성되는 지점은 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 노무현의 <참여> 정부는 <국익>을 통해 <국기에 대한 맹세>로 완성되어 가는 것 같다. * 본문은 필자가 <진보누리>( www.jinbonuri.com)에 기고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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