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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침략사를 망각한 대일외교정책
[김영호 칼럼] 몰역사적-반민족적 행태가 한반도 위기로 몰고가고 있어
 
김영호   기사입력  2013/11/06 [15:10]

 2012년 6월 26일 이명박 정권이 국무회의에 안건 하나를 기습상정해 비공개로 의결했다. 그 내용이 알려지자 비판여론이 들끓었다. 결국 이 정권은 6월 29일 양국간의 서명을 1시간 앞두고 연기했다. ‘한-일 정보보호협정’파동이었다. 당시 이 정권은 속임수를 썼다. 국민적 반발을 우려해 ‘군사’와 ‘포괄’이란 단어를 삭제했다. 본래 협정명칭은 ‘한-일 군사정보포괄보호협정’이었다. 이 정권은 이 한일군사동맹을 두고 일본의 신호정보를 이용하면 북한의 움직임을 면밀하게 관찰할 수 있다고 변명했다.    

 1년이 지나 금년 6월 24일 미국 CRS(의회조사국)이 작성해 상-하원에 보고한 문서에서 그 진상이 드러났다. 이 보고서는 문제의 한-일 군사정보포괄보호협정이 한-미-일 3국의 MD(미사일방어)체제 구축을 위한 사전조치라고 명시하고 있다. 미국이 이 협정의 체결을 한-일 양국에 요청해 성사단계에 이르렀지만 한국의 반일감정 탓에 난관에 부딪혔다고 한다. 한국, 일본, 등과 MD체제를 구축하면 잠재적 적국의 미사일을 효율적으로 요격할 수 있다는 것이다.

 미국과 일본이 한국을 끌어들이는 MD체제는 중국과 북한을 겨냥한 것이다. 청와대 외교안보실장 김장수가 최근 워싱턴에 가서 많은 논의를 했던 모양이다. 흘러나온 뉴스를 종합하면 미국의 MD를 사실상 조인하고 일본의 집단적 자위권을 인정한다는 것이다. 한국정부의 동의라는 조건을 달았지만 유사시 일본군의 한반도 상륙 길을 열겠다는 뜻이다. 누가 국가안위에 관한 이 중대한 사안을 국민적 논의도 생략한 채 멋대로 결정할 수 있는지 묻는다.

  ‘정명가도(征明假道)’-“명을 칠 테니 길을 빌리자” 전국시대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요구였다. 조선이 거부하자 이를 빌미로 일본이 조선을 침공했다. 1592년 5월 23일 일본군 20만명이 부산포에 상륙했다. 조총으로 무장한 일본군은 전투경험이 풍부해 그야말로 파죽지세였다. 20일만에 한양을 함락했고 그 후 25일만에 평양을 점령했다. 삽시간에 조선 전역이 일본군 손아귀에 들어가고 말았다.

 선조는 피신하고 곳곳에서 관군이 패주했다. 다행히 이순신이 이끄는 수군은 탁월한 전술과 화력으로 제해권을 장악해 보급로를 차단했다. 이듬해 2월 명군 4만명과 조선군이 합세해 평양을 수복했다. 전국 각지에서 일어난 의병의 타격으로 일본군은 1년만에 창원 이남으로 퇴각했다. 1958년 겨울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사망소식이 알려지자 남해안에 퇴각해 있던 일본군이 철수함으로써 전쟁이 끝났다.

 임진왜란이란 임진년에 왜놈들이 일으킨 난리라는 뜻이다. 이런 전근대적 표현이 일본의 조선침략전쟁의 성격과 의미를 왜곡한다. 조선의 요청에 따라 명이 파병해 이 땅에서 1592~1598년 7년간 전쟁이 벌어졌다. 종전 무렵에는 명군 10만이 조선에 주둔했다. 인구의 1/3쯤이 일본군에 의해 살육되거나 돌림병에 걸려 죽고 노예로 끌려가 서양 노예상에게 팔렸다. 농토는 절반이 넘게 초토화되었다. 

 1894~1895년 청-일전쟁도 조선의 지배권을 놓고 벌인 각축전이다. 1893년 전라도에서 민중봉기가 일어나 들불처럼 번졌다. 조선의 요청에 따라 청군이 아산만에 상륙하자 일본이 천진조약을 구실로 출병해 인천에 상륙했다. 서해안에서 벌어져 중국본토로 번진 청일전쟁에서 청이 패배했다. 시모노세키 조약에 따라 청은 조선을 독립국으로 승인했다. 이것은 장차 일본이 조선을 병탄하는 빌미가 되었고 나아가 노일전쟁(露日戰爭)의 단초가 되었다. 

 1904∼1905년 노일전쟁은 일본이 조선과 만주에서 러시아의 지배력을 배격하려고 일으킨 전쟁이다. 1904년 2월 일본함대가 여순항에 정박중이던 러시아함대를 기습공격함으로써 전쟁이 발발했다. 일본군은 인천항에서 러시아 함대를 격침하는 한편 한양으로 진격했다. 독도를 점령한 것도 그 때였다. 동해해전에 대비해 무선전신기지로 만들었던 것이다. 국내에서 혁명이 나고 전세도 불리하자 러시아가 1905년 9월 일본과 포츠머스 강화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에 따라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로 굳어졌다.

 오늘날 한-중-노-일 동복아 4국의 독도, 북방4도, 조어도(釣魚島)를 둘러싼 영토분쟁은 청일전쟁-노일전쟁이 잉태했다. 한 세기가 지나서 중국이 경제대국으로 부상하자 미국이 봉쇄전략에 나서섰고 일본이 군국주의의 부활을 획책하고 있다. 아베정권이 침략전쟁과 식민지배를 거침없이 부정하고 때로는 조롱까지 한다. 이런 상황에서 친일세력이 득세하더니 북한의 위협을 빙자해 일본군의 군화가 다시 이 땅을 밟도록 길을 열겠단다. 몰역사적-반민족적 행태가 한반도를 위기로 몰고가고 있다.   




언론광장 공동대표
<건달정치 개혁실패>, <경제민주화시대 대통령> 등의 저자  
본지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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