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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 속에서 정치의 존재 이유 파악"
[책동네] 샹탈 무페의 <정치적인 것의 귀환>, 한국적인 정치지형 조망
 
황진태   기사입력  2008/05/23 [19:03]
▲정치적인 것의 귀환     © 후마니타스
최근 몇 년 동안 적어도 절차적 민주주의만큼은 닦아 놓았다는 ‘87년 체제’가 위기에 봉착했다는 주장 혹은 국제통화기금조치 이후 신자유주의로 인하여 절차적 민주주의는 물론이고, 사회경제적 차원에서의 실질적 민주주의까지 파탄 났다는 ‘97년 체제’의 위기 등의 체제해석 논쟁이 벌어졌었다.
 
이러한 논쟁에서 시기야 어찌됐든 주목해야 할 부분은 공산주의 몰락이라는 80년대 말 이후 뭔가 ‘장밋빛 그날’이 오지 않을까 막연한 기대감을 갖고 있는 보수진영이나 87년 6월 항쟁, 7, 8월 노동자대투쟁 이후에 보수진영과 마찬가지로 장밋빛에 가까운 세상이 도래하지 않을까 하는 진보개혁진영의 생각이다.
 
그러나 이러한 희망사항은 보수진영의 눈으로 바라 볼 때 90년대 미국의 정보산업을 통한 일시적인 소위 신경제 호황이 90년대 한국경제에선 없었고, 진보진영에서도 민중의 삶 또한 딱히 지표상의 경제지표를 따지지 않더라도 살만한 세상이기 보다는 각박해졌다는 말이 가슴에 더 와 닿는다.
 
이번에 소개하는 여성 정치철학자 샹탈 무페의 <정치적인 것의 귀환>은 공산주의 진영이 무너졌었던 1990년대 초에 출간되었지만 기묘하게도 좌파신자유주의 참여정부에서 솔직한(?) 신자유주의 이명박 정권으로 이행을 맞이한 한국사회에서 ‘과연 국민들이 염원하던 민주화도 됐고, 민주화 정권도 뽑았는데 도대체 무엇이 문제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을 구할 수 있을 것이다.
 
‘정치적인 것’의 사유의 중요성  
 
본서의 제목이기도 한 정치적인 것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칼 슈미트의 개념인 ‘정치적인 것the political’을 인용한 저자의 의도는 기존의 경제, 사회와 단절된 제도권의 정치politics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기인한다.
 
공산주의 몰락 이후에 제도권 정치로 확고히 자리 잡은 자유민주주의는 “정치가 하나의 도구적 활동으로, 사적인 이익들을 이기적으로 추구하는 것으로 제한되었”고 “민주주의를 단순히 일련의 중립적 절차들로 제한하는 것, 시민들을 정치적인 소비자로 변형하는 것, 자유주의가 국가의 ‘중립성’이라는 전제를 고집하는 것, 이것들은 정치의 모든 실체성을 비워 버”렸다(177쪽).
    
이는 적어도 절차적 민주주의만큼은 확립시켰다는 87년체제의 믿음에 기대온 한국사회와도 포개어진다. 한미FTA나 한반도 대운하 등, 한국사회의 미래에 막대한 파급력을 미칠 사안에 대해서 정작 국민들은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반면, 5년 주기로 돌아오는 유권자 거수기 구실만이 대한민국 국민으로서의 전부로 간주되는 상황이다.
 
이러한 자유민주주의 한계에서 비롯된 ‘정치적인 것’의 사유는 한미FTA, 한반도 대운하에 대한 국민투표 제기, 지방자치제에서의 주민소환제 등의 직접민주정치로 발아된다.  
 
저자는 본서에서 자유민주주의의 공을 무시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자유주의는 모든 개인이 자유롭고 평등한 존재로 태어났다는 주장에 기반을 두고 보편적 시민권 통념을 형성하는 데 이바지했지만, 개인이 국가에 반해 보유하는 권리들을 가리키는 단순한 법적 지위로 시민권을 축소했다”(135쪽)는 점에서 그간 정치라는 딱딱하고 한정적인 명사에서 민주주의의 완성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갈등은 항상 내재되었음 인정함으로서 폭넓은 적용이 가능한 형용사인 ‘정치적인 것의 귀환’을 요청한 것이다.
 
“권위와 권력의 관계들은 완전히 사라질 수 없으며, 그 자체로 조화로운 투명한 사회라는 신화를 포기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런 유형의 환상은 전체주의로 통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급진적이고 다원적인 민주주의 기획은 다양성과 다원성, 갈등이 실존하기를 요구하며 그 속에서 정치의 존재 이유를 파악한다”(38쪽).
 
“정치에서 공적 이익은 항상 논쟁적인 문제이며 결코 궁극적인 일치에 이를 수 없다. 이런 상황을 상상하는 것은 정치 없는 사회를 꿈꾸는 것이다. 우리는 불일치의 제거가 아니라 자유민주주의 제도의 실존을 존중하는 형식들을 인정하는 가운데 불일치의 수용만을 희망해야 한다”(86쪽).  
 
대안으로서의 급진민주주의
 
저자의 ‘정치적인 것’의 문제의식은 당면한 난제를 풀어나가는 방법으로 다원주의적 급진민주주의를 제언한다. 급진민주주의 방법론은 이미 라클라우와 공저한 <헤게모니와 사회주의 전략>(1986)에서 묻어있다. <헤게모니와 사회주의 전략>를 통해서 포스트 맑시즘으로의 선회를 선언하고 맑시즘에서 바라보는 전통적인 계급에서 다양한 투쟁에 초점을 맞추며 이들의 연결고리로서 제시한 ‘접합’ 개념은 본서에서도 중요하게 다루어지고 있다.
 
“사회적 행위자를 일원적인 주체로 이해하는 틀로는 이런(급진민주주의) 접근을 제대로 정식화할 수 없다. 반대로 주체 위치들 집합의 접합으로, 다시 말해 특정 담론 내에서 구축되며 주체 위치들의 교차점에서 항상 불확실하고 일시적으로 봉합되는 접합으로 사회적 행위자를 이해하는 문제틀에서만 이 접근은 적절하게 정식화될 수 있다”(117쪽).
 
이러한 접합과 재접합은 저자가 신사회운동의 전략에 대한 고민의 산물이다. 특히 제5장 <여성주의와 시민권, 급진민주주의 정치>에서는 여성주의 운동에서의 “본질적 정체성의 해체”를 주장하는 탈근대적 방법론을 적극 수용하고 있는 데, 이는 유색인종, 장애인, 동성애자 등의 타자와의 연대를 위한 선행조건으로서 비단 여성주의 운동에 한정되지 않고, 모든 신사회운동 전략에 필요함을 강조하고 있다.
 
소결
 
본 지면에서 저자의 탈근대적 방법론에 의거한 운동전략에 대한 철학적 함의를 속속들이 언급할 필요는 없겠다. 하지만 민주주의의 교본으로 불리는 존 롤즈의 <정의론>에 대한 비판에서부터 시작하여 계급투쟁을 비롯한 신사회운동의 제반투쟁에서의 정체성을 형성하고 운동전략을 꾀하려는 고민은 한국사회에서 롤즈의 <정의론>처럼 교과서적인 민주주의 개념은 인지하지만 이를 넘어선 각종 주체들의 충돌과 자유민주주의의 한계를 목도하고 있는 현재다.
 
이번에 소개한 샹탈 무페의 <정치적인 것의 귀환>은 87년 체제 이후에 완성된 것으로 착각한 민주주의에 대한 한국사회로의 ‘정치적인 것의 귀환’을 고민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해줄 것이라는 점에서 출간된 지 20년 넘은 시간차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한국적인 생생한 정치지형을 조망할 수 있다는 점에서 독자들에게 자신 있게 일독을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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