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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열전! 여기가 치마타다, 여기서 뛰어라
이와사부로 코소의 『뉴욕열전』, 세계민중들의 흐름으로 뉴욕을 재구성
 
권범철   기사입력  2010/11/30 [17:02]
뉴욕열전(烈傳). 제목을 처음 들었을 때, 열전(熱戰)으로 생각했다. 그러면서 의아했다. 뉴욕의 열전? 책을 보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이 책은 도시공간을 둘러싸고 투쟁하는 뉴욕 세계민중들의 전기이다. 저자 이와사부로 코소는 아마도 열전(熱戰)보다 더 뜨거운 이 투쟁의 기억들을 들뢰즈와 가따리의 개념을 통해 분석, 복원하며, 19세기 파리를 조명하던 벤야민의 기획을 이어가고 있다.
 
▲ 뉴욕이라는 도시를 새롭게 재구성한 이와사부로 코소의 <뉴욕열전>     © 갈무리출판사, 2010
19세기 파리를 잇는 20세기의 수도 뉴욕은 화려하다. 나에게 그곳은 TV나 스크린에서만 보던 곳이었고, 그 속의 뉴욕은 세계 금융, 패션의 중심지, 스펙터클이 지배하는 도시다. 이는 “운동하는 뉴욕의 혁명적 이미지”를 무화하며, 자본의 이미지만을 재현한다. 여기서 거대한 마천루, 쇼핑가 이외에 다른 것을 상상할 수 있을까? 저자는 이처럼 일반적으로 여겨지는 뉴욕의 화려한 이미지를 해체하고, ‘운동으로서의 뉴욕’을 복원한다. ‘운동으로서의 뉴욕’이란 “이동하는 세계민중에 의해 전개되는 삶을 위한 투쟁”이다. 뉴욕의 투쟁하는 민중이란 대부분 아직 미국민이 아니었던 선주민, 노예, 이민자들로, 대지에서 영토로 재구성된 뉴욕에서 잘 드러나지 않는 이들의 활력을 저자는 다양한 영역에서 포착한다. 각종 파티, 클럽, 지하철 구내, 치마타, 스쾃, 공원, 지역사회 공동정원, 퀴어 스페이스 등을 통해 표출되는 이 운동은 “뉴욕의 역사성을 보여주는 아주 멋진 자기표현이었다.”

도시공간을 중심으로 한 뉴욕의 새로운 운동성은 대지의 영토화 과정, 좀 더 분명하게 얘기하면 젠트리피케이션에 의해 촉발되었다. 파리에 오스만 남작이 있다면, 뉴욕에는 로버트 모제스가 있었다. 그는 도시계획가이자 관료로서 자신에게 부여된 절대적인 권력을 사용하여 뉴욕의 몇몇 낡은 지역과 생활 공간을 파괴한 후, 다리나 건축물들을 만들었다. 또한 줄리아니 전(前) 뉴욕시장은 1990년대에 들어서서 부동산업자, 개발투자자들과 합작하여 뉴욕의 도시구획을 집중적으로 재편하였다. 벤야민이 ‘전략적 치장’이라 불렀던 오스만의 파리개조사업이 20세기 뉴욕에서 젠트리피케이션으로 돌아온 것이다(이를 마샬 버만은 ‘사회적 거름채’로 표현한다).

“자동차를 가지고 있지 않은 모든 사람들을 걸러내기 위한” 이 젠트리피케이션은 단순히 한 공간을 다른 것으로 개편하는 것을 넘어 그 장소의 다종다양성에 대한 영토화 과정이다. 때문에 토지나 건물을 소유할 수 없었던 이동하는 집합신체, ‘덧없는’ 존재들에게 뉴욕에서 산다는 것은 그 자체가 투쟁이었다. 이처럼 자신의 존재성에서 기반하는 생활=문화=투쟁은 “이념에 봉사하는” 투쟁이 아니라, 자신이 발 딛고 선 그곳에서의 가능성을 인종과 젠더조차 횡단하며 찾아가는 반反전위적인 운동이자, ‘공통의 공간(치마타)’을 구축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처럼 뉴욕에서의 투쟁은 본성적으로 아나키즘적인 것이었으며, “도시공간에 밀착한 투쟁”이었다. 이들의 운동은 치마타에 근거함으로써 현실성을 취해갔다. 이 책에서 상세하게 묘사되는 <블랙팬더당>, <영 로즈>, <블랙 마스크> 등의 운동이 모두 그러하다.

치마타란 본래 ‘길이 걸쳐 있는 곳’이라는 뜻이며, ‘이별의 길’이나 ‘교차로’를 의미한다고 한다. 치마타란 “사람이 집합하는 장소라면 어디라도 그 자리에서 만들어질 수 있는 ‘교류와 교통의 공간’을 지칭”한다. 따라서 각종 의식이나 축제의 공간, 퍼포먼스 공간, 시장, 정치적 주장을 할 수 있는 공간이 되기도 한다. 이러한 치마타는 공공 공간(public space)과는 다르다.
 
네그리와 하트는 지구화하는 삶세계가 세 개의 영역으로 찢어져 있다고 말한다.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 그리고 공통 영역이 그것이다. 공통 영역은 사유화와 공유화에 의해 크게 축소되었으며 잘 보이지 않고 또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기에 지각되기 어렵지만, 아직 중요한 부분으로 남아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코뮤니즘의 기획은 이 공통적인 것의 영역을 확장하고 지배적인 것으로 만드는 것인데, 현대의 사유화나 공유화 모두가 공통적인 것의 확장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그것의 실재적 가능성이 주어진다고 말한다. 이러한 공통적인 것의 주요한 형태는 객관적이라기보다는 주체적인 것, 다시 말해 주체성들이다. 같은 맥락에서 치마타란 공공 공간과 사적 공간 사이의 어딘가에 위치하는 민중의 공통 공간이다. 젠트리피케이션이 단지 건조환경의 교체로 말할 수 없는 것처럼, 치마타란 물리적 건축공간이라기보다 “이동하는 민중의 집합신체의 운동”이다. 그리고 “영토의 틈새 사이로 얼굴을 내민 대지”다.

이처럼 뉴욕은 다섯 개의 구로 표현되는 고정된 공간을 넘어서, 이동하는 세계민중들의 흐름으로 파악되어야 한다. 드러나지 않는 이들의 움직임, ‘치마타의 극소시간’의 집적이야말로 “대도시를 형성하는 힘의 본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직접 민주주의를 제1원리로 삼고 있는 오늘날의 투쟁에서는 ‘공통 공간’을 개발하는 기술’이 기본원리가 될 것이다.”
 
이 책의 미덕은 가까이하기엔 멀기만 했던 뉴욕을 익숙하게 만들어주는 데 있다. 이는 단순히 뉴욕의 길이나 지하철 노선을 알려주는 데서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살고 있는 이 곳과 뉴욕을 그다지 다른 곳으로 여기지 않게 하는 데서 생겨난다. 폭력적으로 진행되는 재개발(뉴욕에 로버트 모제스가 있다면, 서울엔 김현옥이 있었다), 여공의 슬픈 역사(청계천의 역사), 파업에 대한 벌금형(파업에 대한 기업의 손배소), 도망노예를 내버려두는 자를 처벌하는 도망노예법(불고지죄?) 등을 가진 뉴욕의 역사는 현대 한국에서 그대로 반복되고 있다.

하지만 이와 다른 움직임들도 반복된다. 책을 읽으면서 개인적으로 흥미로웠던 부분이 <아나키스트 뉴욕 메트로 연합(NYMAA)>의 조사위원회 중 한 단체가 스쾃운동의 부활을 지향하면서 뉴욕에서 사용되고 있지 않은 토지와 건물의 분포 등에 관한 독자적인 지도를 작성하려 한다는 것이었다. 이것이 흥미로웠던 이유는 똑같은 작업을 나와 나의 친구들이 서울에서 진행했었기 때문인데, 이 밖에도 우리는 많은 서울의 ‘치마타들’을 알고 있다. 이처럼 ‘공통 공간’의 형성을 위한 노력 또한 이곳에서 반복되고 있다. 이런 것이 바로 도시를 연결하는 촉수가 아닐까?

이처럼 뉴욕과 서울(다른 어디라도!)이 다르지않다는 것, 전지구적인 도시 구성력이란 자본의 영향력이 아니라 오히려 ‘잡다한 민중’들의 힘이라는 것을 보여주면서, 치마타란 ‘어딘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여기에서 ‘우리들의 치마타’를 구성하는 일이 중요하다는 것을 이 책은 잘 보여준다. 여기가 치마타고, 여기서 뛰어야 한다는 것.
 
이 책을 읽으며 잊고 있던 한 책이 기억났다. 뉴욕의 스쾃에서 지냈던 한 인류학자가 가져다 준 『임대하지 않고 생존하기』(Survival without rent)란 제목의 이 책은 1980년대 뉴욕에서 “정부와 기업에 의해 집을 빼앗긴 사람들”을 위해 만들어졌다(취지대로 이 책은 스쾃을 하기 위해 필요한 것들(어떻게 빈집을 찾아야 하고, 자물쇠는 어떻게 열어야 하는지 등등)을 아주 상세하게 알려준다). 뉴욕의 민중들에게 이 책이 하나의 지침서가 되었듯이, 『뉴욕열전』 또한 모든 이민자들, 세계민중들을 위한 지침서가 될 것이다. 위 책의 한 구절을 인용하며 글을 마칠까 한다.

“모든 것이 큰 문제처럼 들리거나 어쩌면 당신이 해결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을 수도 있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다. ‥‥‥ 우리들 중에는 충분히 준비되지 않았음에도 그 모든 것을 지나온 많은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우리는 아직 움직이지도 않았다.”
 
* 글쓴이는 예술과 도시사회연구소 연구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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