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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혁명이 본 민주주의 위기
[김영호 칼럼] 4월 함성이 아직도 귓가에 쟁쟁해도 민주주의 위기 심화
 
김영호   기사입력  2010/04/22 [15:49]

50년전 4월 19일. 서울 세종로, 태평로, 서대문 등 도심일대는 시위인파로 뒤덮였다. 도로 중앙은 독재타도를 외치는 대학생들이 올라탄 트럭들이 달리고 시위군중은 박수를 치며 환호했다. 대학생들은 효자동 경무대(구 청와대)입구까지 진입했다. 마침 수도관 매설공사를 하려고 도로변을 따라 놓였던 대구경 주철관을 발로 굴리며 대치경찰과 일진일퇴를 하고 있었다. 태평로 국회의사당(현 서울시의회) 앞에서는 박순천 의원이 열변을 토하고 있었다. 따다당 총성이 들리는 순간 시위군중은 땅바닥에 엎드리거나 뒷길로 피신했다.

그 날 오후 1시를 기해 경비계엄령이 서울 일원에, 4시에는 부산, 대구, 광주 등 4개 도시에 선포되었고 5시에는 비상계엄령으로 바뀌었다. 탱크를 앞세운 계엄군은 경찰과 달리 일반시민에게 적대행위를 하지 않았다. 25일 오후 5시반께 전국 27개 대학 교수 300여명이 학생의 피에 보답하라며 평화적 시가행진을 펴며 대통령 이승만의 결단을 촉구했다. 이튼 날인 26일 오전 10시 이승만은 국민이 원하면 대통령에서 하야하겠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28일 부통령 이기붕 일가는 경무대에서 자살했고 29일 이승만은 하와이로 망명의 길을 떠났다. 이로써 12년 자유당 일당독재의 장막이 내렸다. 

1948년 8월 15일 취임한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발췌개헌안 날치기’, ‘부산정치파동’, ‘4사5입 3선개헌’을 통해 장기집권을 획책했다. 제4대 대통령과 제5대 부통령 선거는 당초 1960년 5월로 예정되었다. 그런데 민주당 대통령 후보 조병옥이 신병치료차 미국으로 떠나자 선거일을 3월 15일로 앞당겼다. 2월 28일 일요일인데도 대구에서는 초-중-고등학교에 등교령이 내렸다. 야당유세에 참석을 막으려는 술수였다. 이 날 경북고교, 대구고교 학생들이 거리로 뛰어나가 항의시위를 벌였다. 이것이 4월혁명의 시발점이었다. 

3월15일 선거일에는 공개투표, 사전투표, 야당참관 불허, 정치깡패 동원 등으로 부정선거를 자행했다. 마산에서는 부정투표에 맞서 민주당이 선거포기를 선언했다. 오후 3시 대규모 학생시위가 일어났고 경찰발포로 16명이 죽고 72명이 부상을 입었다. 그 때 행방불명이었던 마산상고 학생 김주열이 한 달 가까이 지나 시신으로 바닷가에 떠올라 낚시에 걸렸다.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 바다에 내던졌던 것이다. 마산에서의 분노의 함성이 전국으로 번져 4월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 18일 고려대 학생 3,000여명이 국회의사당 앞에서 연좌시위를 마친 다음 대오를 짜고 귀교하는 길에 청계천 4가에서 정치깡패의 습격을 받았다. 쇠갈퀴와 몽둥이에 맞아 1명이 죽고 수십명이 부상을 당했다. 

이튿날 19일 거리마다 성난 시민들이 메워 민중혁명의 횃불을 올렸다. 4월혁명 뒤에는 언론이 있었다. 그 때 언론은 시민의 편에 서서 진실을 전달했다. 취재차량이 나타나면 시위군중은 박수를 치고 격려할 정도로 언론의 신뢰가 높았다. 그런가하면 거짓을 일삼던 정부기관지 서울신문사는 불타는 수난을 겪었다. 3, 4월 시위군중을 향한 발포로 183명이 사망하고 6,259명이 총상을 입었다. 고교생의 시위로 발단한 4월혁명은 피의 대가가 컸지만 주도세력이 없었다. 그 탓에 기성정치세력이 혁명완수의 과업을 맡았다. 선거에서 집권세력으로 떠오른 민주당은 분열과 대립으로 양분됐고 통일논의가 분분한 가운데 경제난이 심화됐다. 

사회혼란이 적화통일의 빌미를 준다며 박정희가 1961년 5월 16일 반공을 국시로 삼는 쿠데타를 일으켰다. 총칼로 국권을 찬탈했지만 정통성-합법성이 결여된 군벌은 4월혁명의 의미가 두려워 정권유지의 수단으로 정치적 의사표현을 억압했다. 언론-집회-결사자유를 박탈했던 것이다. 4월혁명의 가치와 의의를 의도적으로 폄하했다. 4월혁명을 무가치-무의미의 뜻으로 그냥 4․19라고 격하했던 것이다. 박정희의 사생아적 군벌의 전두환도 4월혁명의 가치를 매장했다. 정권홍보에 순치된 언론은 아직도 4월혁명을 타성적으로 4․19라고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 혁명정신은 1980년 광주항쟁, 1987년 6월항쟁으로 명맥이 이어지고 있다.

87년체제 이후에도 헌법상의 권력구조를 떠나서 제왕적 대통령체제를 유지함으로써 4월혁명은 미완의 단계에 머물고 있다. 이명박 정권 들어서는 절차적 민주주의마저 훼손함으로써 민주주의가 누란의 위기에 처해 있다. 반세기전 4월의 함성이 아직도 귓가에 쟁쟁한데도 말이다.




언론광장 공동대표
<건달정치 개혁실패>, <경제민주화시대 대통령> 등의 저자  
본지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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