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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고교 시절 문학 소년 소녀의 시절을 보낸 사람들이라면 문학에 대해서 어떠한 고정관념을 갖고 있을 거라 생각된다. 그때의 문학은 저 멀리 아름다운 곳을 바라보는 꿈, 그리고 막연히 동경하는 사랑과도 같은 이름을 것이다. 그 이후 대학 때 학회에서 배운 문학은 이론과 실천을 위한 매개체로서의 역할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문학에 관심을 갖고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문학이 어떻게 생산되고 어떻게 유통되고 누가 한국 문단을 지배하는지에 대해서는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엄청난 독서량과 다작을 자랑하는 전북대학교 신문방송학과의 강준만 교수가 한국 문단의 고질병에 대해 비판의 칼을 들고 나섰다. 강교수는 자신의 전공분야인 언론과 대중문화는 물론 정치와 경제 분야까지 글쓰기의 영역을 넓힌 사람이니 그가 문학을 소재로 다루었다고 해서 이상한 일은 아니다. 하지만 다른 분야와는 달리 그가 마광수 교수의 필화사건 때부터 오랜동안 한국 문단의 침묵의 카르텔을 비판해왔다는 점에서 그의 문학권력 비판은 예사롭지만은 않다.
"나는 그간 문학권력 문제를 집중적으로 연구하는 작업을 하면서, 지난 십 수년 간 언론의 조명을 받진 못했지만 여기저기서 산발적으로 터져 나온 문단 내부의 증언들을 살펴보았다. 보스를 중심으로 한 상명하복식 체제에 관한 한 문단이 정당보다 나을 게 없는 동네라는 걸 입증하는 데 모자람이 없다는 결론을 내리지 않을 수 없었다.(9쪽)"
그가 다루는 문단 내부의 문제는 이렇듯 기존의 문학비평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문학의 텍스트 자체를 문제삼는데 더 나아가서 그 텍스트가 생산되고 유통되는 커뮤니케이션의 구조를 중심으로 한국 문단을 질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진단하는 한국 문단의 상황은 대단히 심각하다. 1인 보스 중심으로 이루어진 각 문예지의 집단 패거리주의 때문에 양질의 문학이 생산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것은 어찌보면 구조적 문제이다.
"한국 문단, 이대론 안 된다는 나의 문제의식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지 궁금하다. '내부 개혁 없이 외부 개혁 없다.'는 주장에 공감하지 못한다면, 나는 문학에 대한 파괴적인 '풍문과 전설'의 전파에 기여하는 못된 짓을 했다는 평가를 받을 가능성도 있겠지만, 내가 인용한 수많은 문인들의 값진 내부 비판의 총합이 힘을 발휘해주길 바라마지 않는다."(14쪽)
물론 그는 책 곳곳에서 타 분야의 전공자가 감히 문단 내부의 문제를 건드린다는 비아냥에 대한 부담을 적고 있다.
"나는 문학을 사랑하고 문인을 존경한다. 그런 사랑과 존경이 없었더라면 내가 감히 어찌 '한국 문학의 위선과 기만'이라는 구호를 외칠 수 있겠는가. 이는 결코 모순이 아니다. 나는 한국 문인들 거의 대부분이 원치 않는 구조와 질서 속에 갇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그 구조와 질서는 영원불멸의 것이 아님을 믿는다. 나는 기존 구조와 질서가 확대재생산되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는 데 미력하나마 일조하고 싶을 뿐이다."(14쪽)
이런 겸손에도 불구하고 그는 방대한 자료조사(이번 책을 쓰기 위해 300만원어치의 자료비를 투입했다고 한다.)를 바탕으로 문학이론의 깊은 곳까지 탐구하기도 한다. 덕성여대 영문과 윤지관 교수를 비판할 때는 영문학 전공자가 아니라면 이름도 들어보기도 힘들 만한 매슈 아놀드와 리비스의 이론까지 건드린다. 물론 그들의 이론을 적극적으로 탐구한다기 보다는 창작과 비평사의 백낙청 사단의 영문학 패권주의와 그들의 이론과의 관계를 탐구하는데 주력한다.
물론 그가 지난 해부터 집중적으로 해부하고 있는 이문열의 문학권력도 이번 책에서 빠지지 않았다. 그는 이문열의 대중적 파급력을 지적 교양주의로부터 찾아낸다. 무언가 어려워 보이는 서양의 학자들을 그의 소설에서 반드시 열거하여 독자로 하여금 소설의 재미도 맛보며 대단한 학식도 얻은 것처럼 만족을 주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그는 그러한 지적 교양주의를 강력하게 비판한다.
"이문열이 자랑하는 교양주의가 반지성주의와 통한다는 건 결코 아이러니가 아니다. 그의 교양주의는 어차피 지식폭력의 산물이었으므로 강력한 힘에 대한 숭배와 찬양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의 시대정신일지도 모른다. 그 시대정신이 살아 있는 한 이문열의 영광은 끝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 그 어두운 터널의 출구를 막 통과하기 직전에 있다는 걸 나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68쪽)
강교수가 이번에 비판한 문단계의 인사는 이렇듯 왼쪽에 서있는 윤지관, 백낙청부터 상대적으로 오른 쪽에 서있는 남진우, 이문열까지 다양하다. 그렇기 때문에 독자들이 이 책을 읽어나가다 보면 무언가 혼란스러움을 느낄지도 모른다. 강교수가 그리고 있는 한국 문단의 지형도는 어떠하길래 이념적 스펙트럼의 구분없이 좌충우돌 비판에 임할 수 있을까? 그것은 강교수가 윤지관을 비판하는 대목에서 제대로 형상화되고 있다.
"윤지관은 자신의 문학주의는 전투적이고 저항적이고 심지어 반체제적임을 강조하고 싶다고 선언한다. 그런데 나는 자꾸 자기가 과격하다는 걸 알아달라고 보채는 소리로 들린다. 살롱에서 고급 커피향내를 맡으면서 혁명을 부르짖는 자의 서글픈 모습이라고나 할까?"(257쪽)
이미 한국의 문학은 거대한 체제 안에 종속되어 있다. 그 안에서 저항하지 않는 이상 이문열과 같이 극우적 교양주의를 내걸든 윤지관과 같이 좌파적 급진주의를 내걸든 서로 화기애애하게 문학권력을 누리며 패권주의를 고착화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구조는 문학이라는 신비로운 단어로 포장되어 있다.
"그들만의 문학을 왜 학교에서 계도해야 하며 사회적으로 키워야 한다는 걸까? 문학은 신비하고 숭고한 것이기 때문에? 그래도 그 숭고하고 신비한 힘으로 사회 정의를 무력화시키는 짓을 저질러도 우리는 단지 문학이 신비하고 숭고하다는 이유만으로 문학을 우러러 보아야 하는가?"(6쪽)
이 책을 다 읽게 되면 바로 서문의 이 문단으로 돌아오게 된다. 우리는 무엇 때문에 문학을 읽어야 한다는 말인가? 현재의 한국 문학이 과연 현실과 삶에 밀착해 있다고 그 누가 증명할 수 있는가? 오로지 문학권력을 누리는 엘리트들의 지적 유희에 독자들마저 함께 놀아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에 대한 답을 내주지 않는다면 문학의 위기는 곧 문학비평가와 소설가의 밥그릇의 위기일 뿐이 아닐까?
역시 문학권력 논쟁에 참여하고 있는 문학비평가 이명원의 지적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지적 유희로서의 문학이 아니라 진정으로 문학을 사랑한다면 강교수의 비판까지 끌어안을 수 있어야 한다.
"나는 한국의 문학판이 비유컨대 `난장'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문학인들이 가장 경원하는 것이 억압과 부조리이며, 그들이 목숨처럼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 자유와 표현의 권리라면 말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나는 문학에 대한 강 교수의 `논쟁적 사랑'을 한국문학계가 적극적으로 끌어안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은가."(<한겨레신문> 2001년 11월 1일)
* 본 글은 대자보 69호(2001.12.10)에 발표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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