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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니아전쟁 살인마 카라지치 21일 체포
[국제동향] 세르비아 친서방정권 EU가입 위해 8천명 무슬림 학살도
 
최방식   기사입력  2008/07/22 [21:36]
1995년까지 3년여 간 보스니아전쟁을 통해 8천명의 무슬림을 학살한 보스니아 세르비아계 수반 출신이자 전범인 라도반 카라지치(63)가 수배된 지 13년만인 지난 21일 세르비아 경찰에 체포됐다고 인터내셔널헤럴드트리뷴이 22일 보도했다.

카라지치가 정확히 어디에서 체포됐는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지만, 세르비아 당국자는 그가 수도 베오그라드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비밀경찰에게 체포됐다고 말했다. 보리스 타디치 대통령실의 관계자는 헤이그 국제전범재판소로 인계하기 위한 세르비아 법원 심리를 앞두고 카라지치를 붙잡았다고 언급했다.

전범재판 당국에 의해 10년이 넘게 수배를 받아온 그가 회색 수염을 기르고 세르비아 정교회 사제로 위장해 숨어 살다 체포됐다고 현지 언론은 전했다. 그는 보스니아 동쪽의 한 산에 있는 사원 동굴에서 숨어 지냈단다.

사제 위장 은거 중 경찰에 체포

헤이그 전범재판소 관련자들과 유럽연합 관계자들은 오랫동안 그가 세르비아 안에서 숨어 지낸다는 첩보를 활용해 세르비아 당국에 그의 체포와 인도를 촉구해왔다. 보스니아전쟁과 코소보전쟁 뒤 전범 카라지치와 믈라디치의 체포가 이뤄지지 않음으로써 세르비아는 오랫동안 유럽연합에 가입하지 못해왔기 때문이다.
 
▲ 1995년까지 3년여간 발칸에서 벌어진 보스니아전쟁 기간 보스니아계 세르비아 정부 수반으로 크로아티아(주로 무슬림)계 20만명 학살을 주도한 전범 카라지치가 21일 체포되자 서방언론은 이를 일제히 보도했다. 인터내셔널헤럴드트리뷴 온라인판 갈무리화면.     © 인터넷저널
헤이그에 본부를 둔 유엔 전범재판소의 세르게 브라메르츠 검사는 카라지치 체포 소식에 2차 세계대전 이래 유럽 최악의 학살자 중 한 명을 심판할 수 있게 됐다며 과거사 청산의 중대한 진전이라고 기쁜 마음을 내비쳤다. 그는 카라지치가 곧 전범재판소에 인도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브라메르츠는 “지난 10여년이 넘게 전쟁범의 체포를 기다려온 희생자와 유가족에게 오늘은 매우 중요한 날”이라고 언급한 뒤, “국제법을 어긴 전범자는 아무리 숨어 지내려 해도 결국 지구촌 정의의 심판대에 서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중대한 상징”이라고 덧붙였다.

1995년 오하이오의 데이톤에서 보스니아전쟁 중단협정을 중개했던 리차드 홀브룩은 카라지치 체포소식에 “역사적 사건”이라고 평가했다. “발칸반도의 냉혈한인 밀로셰비치, 카라지치, 그리고 믈라디치 중 가장 극악한 한명을 꼽으라면 난 카라지치를 선택할 겁니다. 인중차별에 무슬림 죽이는 걸 즐긴 살인마이니까요.” 홀브룩은 이어 “세르비아는 믈라디치도 체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발칸 살인마 중 가장 극악”

카라지치가 체포된 직후인 21일 밤 베오그라드에 있는 전범재판소 인근에는 그의 지지자들이 모여들어 세르비아 국기를 흔들며 “세르비아를 구하자, 타디치에게 죽음을”이란 구호를 외쳐 무장경찰이 경비를 강화했다. 그들은 취재 기자를 폭행, 현장에서 체포되기도 했다.

세르비아 당국자는 경찰이 미국대사관을 보호하기 위해 추가 배치됐다고 밝혔다. 지난 2월 코소보 독립에 항의해 세르비아 인들이 미대사관에 불을 질렀던 적이 있어 사전예방 차원이라고 그는 덧붙였다.

카라지치가 숨어 지낸 지 10여년이 넘어 체포된 것은 서방세계의 오랜 세월 끈질긴 노력의 결과로 보인다. 특히 세르비아에 친서방 연립정권이 들어서고 몇 주 만에 나온 것이어서 관심을 끈다.

새 정권은 유럽연합 가입을 원하지만, 유럽연합은 EU가입 전제조건으로 전범 척결을 요구해왔다. 현 정부는 민주당 출신 대통령 타디치가 1990년대 전쟁을 저지른 밀로셰비치의 사회당과 연립으로 구성한 것이어서 서방사회의 더 큰 관심을 끈다고 언론은 전했다.

EU 회원국 자격 심사를 담당하는 올리 레헨은 21일 언론과 대담에서 카라지치 체포가 세르비아의 EU가입을 촉진하는 이정표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자신과 유럽연합 외무장관들이 22일 이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뷔르셀에서 만날 것이라고 덧붙였다.

UN전범재판소 신병인도 예정

베오그라드에 본부를 둔 인권법센터의 대표인 나타샤 칸디치는 IHT과 전화로 가진 인터뷰에서 “정말 놀랐고, 역사적 뉴스”라 언급한 뒤, “아무도 이런 일이 이뤄질 것이라 생각지 않았다”며 “카라지치가 교회에 숨어있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카라지치의 부인 릴리아나는 사라예보에 있는 그녀의 집에서 AP와 가진 전화통화에서 딸 소냐가 알려줘 남편의 체포소식을 접했다고 말했다. “심야에 딸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뭔가 불길했죠. 충격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가 살아있다는 소식에 안도했죠.”

카라지치는 유엔보호 하에 있던 보스니아 남동쪽 스레브레니차에서 세르비아가 옛 유고연방의 부활을 꿈꾸며 일으킨 보스니아전쟁 기간인 1992~1995년 사이 발칸 전쟁역사상 가장 잔인한 무슬림학살을 자행한 죄로 95년 7월 24일 유엔전범재판소의 기소·수배를 받았다. 당시 그는 보스니아 세르비아계 수반이었다.

세르비아는 3년여 전쟁기간 20만명의 무고한 보스니아 시민들(주로 무슬림과 크로아티아인)을 살해했다. 전범재판소가 구체적으로 카라지치에게 적용한 죄목은 세르비아 군경의 지원을 받아 민간인 보스니아 무슬림을 8천여명 죽인 ‘스레브레니차 학살’죄. 죄목을 보면, 학살, 고문, 박해, 추방, 그리고 보스니아 내 비세르비아계 인종차별 등 15개다.

유엔 전범재판소의 기소·수배에도 불구하고 카라지치는 보스니아 세르비아계 수반청사에 가끔 모습을 비췄다. 그는 세르비아 보수 민족주의자들 사이에선 영웅 칭호를 받는다. 하지만 1997년 이후론 공개석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의 움직임을 수수방관하던 NATO군이 체포 작전을 벌이기 시작하면서 부터다.

‘스레브레니차 학살’ 범죄 주도

NATO군의 그의 체포영장을 집행하기 위해 카라지치의 행적을 뒤쫓았다. 하지만 그는 보스니아 외곽 산악지대와 그가 태어난 몬테네그로 인근지역으로 피해 다녔다. 미 정보당국과 유럽국가는 그의 은신처관련 정보를 제공했지만, 그는 영웅대접을 받으며 잘도 숨어 다녔다.

또 다른 전범 슬로보단 밀로셰비치는 세르비아의 전직 대통령으로 보스니아계 세르비아 대표인 카라지치, 그리고 세르비아 군 총사령관 출신인 믈라디치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밀로셰비치는 2001년 체포됐고 이듬해 전범 재판정에 섰다. 하지만 재판이 끝나기 전인 2006년 감옥에서 사망했다.
 

 보스니아전쟁(1992~1995년)

보스니아전쟁은 티토가 죽고 유고연방이 무너지기 시작한 1980년에 이미 시작됐다고 볼 수 있다. 6개 공화국이 순환대통령제를 하기로 했지만 연방은 흔들거렸고 민족주의가 발호하는 터전이 됐다.

1989년 세르비아에서 슬로보단 밀로셰비치(Slobodan Milosevic)라는 극우 민족주의자가 권력을 잡으면서 유고의 분열은 촉발됐다. 12세기부터 발칸 북쪽의 패자였고, 1차대전 때엔 독일을 제압했던 ‘대세르비아 민족주의’로 5개 민족을 복속시키려 했던 게 거센 반발을 부른 것.

크로아티아가 가장 먼저 반발했다. 91년 밀로셰비치는 독립을 원하면 세르비아계 거주지역(60만명 거주)을 내놓으라고 종용했다. 1만 명의 사망자를 냈고, 이듬해 UN중재 하에 휴전했다. 세르비아는 크로아티아의 3분의 1을 장악했다. 슬로베니아와 마케도니아는 이 틈에 독립했다.

‘발칸의 도살자’ 밀로셰비치는 그 뒤 보스니아를 타깃으로 삼았다. 92년 2월 분리독립 투표에서 99%가 찬성했다. 31%인 세르비아계는 밀로셰비치의 사주로 불참했다. 결국 보스니아 내 세르비아계 민병대가 먼저 시작하고 밖에서는 세르비아가 지원하는 전쟁이 시작됐다. 일방적인 인종청소였다. 세르비아계 지도자인 라도반 카라지치가 주도했다.

3년 반동안 20만명의 보스니아 시민(주로 무슬림과 크로아티아인)이 살해됐다. 2백만명이 넘게 피난길에 올랐다. 주로 남자들은 살해, 여자들은 강간을 당했다. NATO의 개입 압력에 세르비아는 못이긴 척하며 1995년 미국 오하이오주의 데이톤에서 평화협정을 맺었다. 보스니아 영토의 49%를 인정받았다. 51%만 보스니아·크로아티아 영토가 됐다.
 

 코소보전쟁(1998~1999)
 
코소보전쟁은 신유고연방(세르비아-몬테네그로로 이름을 바꿨다가 결국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로 분리독립)으로부터의 분리·독립을 바라는 알바니아계 코소보 주민을 세르비아 정부군이 유린한 학살전쟁. 코소보는 알바니아계가 80% 차지하지만 신유고연방의 자치주. 1998년 3월 초 코소보의 알바니아 분리주의 반군이 세르비아 경찰을 공격하며 촉발. 이 전쟁은 세르비아 총사령관인 믈리지치가 주도했다.

세르비아군은 반군 거점을 공격하고 주민들을 대량 학살했다. 알바니아계는 코소보해방군(UCK)을 중심으로 게릴라전을 전개했다. 코소보를 탈출하는 알바니아계가 러시를 이루었고, 난민 수는 99년 1월 30만명에 이른다. 결국 99년 3월 미국과 나토의 공습이 시작됐다. 6월 3일 마침내 세르비아의회가 유엔(UN)의 평화계획을 승인, 전쟁이 끝났다. 자치구(독립)로 인정받고 있다.


* 평화를 사랑하는 최방식 기자의 길거리통신. 광장에서 쏘는 현장 보도. 그리고 가슴 따뜻한 시선과 글... <인터넷저널> (www.injournal.net) 편집국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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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8/07/22 [21:36]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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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르비아 2008/07/23 [23:10] 수정 | 삭제
  • 을 객관화하는 내공을 길러보시라고 글쓴이에게 부탁하고 싶네요. 세르비아 사람들의 의견도 들어보시고요. 헤이그 '전범 재판'의 속기록 읽어보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