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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 지식인들이여, 당당하라!
 
변희재   기사입력  2002/03/07 [12:17]
고려대학교 신문방송학과의 임상원 교수는 6월 28일자 『중앙일보』에 「언론싸움 자제해야」라는 글을 기고했다. 그는 그 글에서 자유주의자의 대명사나 다름없는 존 스튜어트 밀의 언론관을 통해 언론개혁 진영을 비판했다. 상대방의 비판의 자유를 존중하고 설사 그 비판이 틀렸다 한들 부도덕자로 몰고 가지 않으며 비판을 할 때 절대로 사실을 왜곡 과장 날조해서는 안 된다는 밀의 저서 『자유론』 2장의 내용을 그 근거로 삼았다. 그의 글을 직접 확인해 보자.

  "일찍이 존 스튜어트 밀은 『자유론』이란 저서에서 거의 무제한에 가까운 언론자유를 주장하면서도 언론행위는 온화하고 공정한 태도 속에서 이뤄져야 한다고 했다. 그 내용은 이렇다. 먼저 어떤 의견을 주장할 때의 태도는 비록 그것이 옳은 것이라 할지라도 반론이 제기될 수 있고 또 심한 비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
다음으로 자기와 반대되는 의견을 주장하는 사람을 비도덕적인 인간으로 몰아가지 않아야 한다. 특히 대중 사이에 인기가 없는 의견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이러한 비방을 받기 쉽다. 왜냐하면 그들은 소수이고 그들을 정의롭게 대우하려고 나서는 사람들이 드물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다수의견 보다는 소수의견이 이러한 모욕적인 공격을 받게 되는데 이들은 더욱 보호돼야 한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우리가 주장하는 의견에 반대자가 누구며 그 의견이 진정으로 무엇인가를 조용히 지켜보고 반대자에게 불리한 내용을 과장하거나 상대방에게 유리한 것을 은폐하지 않아야 한다. 과연 지금 매체간의 비난전(戰)에서 이런 규범들이 제대로 지켜지고 있는가.
언론행위에는 이런 것만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좀더 적극적인 관용이란 덕목이 있어야 한다. 언론이란 관용의 산물이다. 민주주의 사회의 시민들은 무엇이 선(善)인가에 대해 서로 다른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민주주의 사회란 다원주의 사회다."

밀이 이런 말을 한 것은 사실이나, 임상원 교수의 글만 보면 마치 밀이 토론을 무척이나 아름답게 평화롭게 그리고 화기애애하게만 해야하는 것처럼 말한 것으로 들린다. 하지만 존 스튜어트 밀의 다른 말을 직접 들어보자. 그는 토론에서 힘의 관계를 고려하여 힘있는 자들만이 항상 토론을 온건하게 할 것을 요구한다는 것을 통렬히 비판하였다. 과연 이 둘이 같은 사람인지 헛갈릴 정도이다.

"대체로 그들 일반적으로 용인된 의견에 대립한 의견들은, 일부러 언어를 부드럽게 하는 동시에 가능한 한 조심스럽게 불필요한 자극을 주지 않도록 함으로써 비로소 발언의 기회를 얻게 되는 것으로서, 이러한 태도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게 되면 거의 예외 없이 그들 의견은 쇠퇴하게 된다. 반대로 지배적인 의견 편에서 사용되는 무제한의 독설은 실제로 사람들로 하여금 반대 의견을 발표하지 못하게 하는 한편, 반대 의견을 발표하는 사람들에게 귀를 기울이지 못하게 한다. 그러므로 진리와 정의를 위해서는 지배적인 측의 그러한 독설사용을 단속하는 것이 그 반대의 경우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

비슷한 말이라도 강조하는 곳이 다르다. 밀은 말을 곱게 하자는 주장을 한 게 아니라 힘있는 자들이 힘없는 자들의 비판을 무력화시키는 방법으로 "너희 말 좀 곱게 해." 이런 수법을 사용하는 것을 지적하고 차라리 힘있는 자들의 독설을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임상원 교수가 지적한 부분은 분명히 『자유론』에 나와있다. 하지만 이처럼 나는 바로 그 부분이 『조선일보』를 비판하기에 가장 적당한 근거라고 생각하는 반면 임상원 교수는 언론개혁 세력 쪽으로 화살을 돌려버렸다는 것이다. 절대 반론을 위한 지면을 주지 않고, 한번 좌경으로 찍으면 공직에서 기어코 밀어낼 때까지 두들기고, 외신만 인용했다 하면 서슴없이 사실을 왜곡했던 신문이 과연 어느 신문이었던가? 언론 전문가인 임상원 교수가 이를 몰랐단 말인가? 임상원 교수가 어차피 『자유론』을 인용할 바에야, "주류 지식인들은 비판의 옳고 그름을 따지기 보다는 말을 온건하게 할 것만을 강요한다. 그리고 가급적 비판자를 난폭자로 몰아 다른 사람들이 귀를 기울이지 못하도록 노력한다." 이 부분도 같이 언급을 해줬어야 했다는 것이다.

언론개혁이라고 말하기도 힘든 국세청의 언론사 세무조사가 시작된 뒤 이상할 정도로 전선은 진보와 보수 지식인의 극한 대립 구도로 형성되었다. 또한 '위기의 지식인 사회'에 대해 기획 특집으로 다루며 지식인의 편가르기를 시도한 곳도 『한겨레』가 아니라 『조선일보』였다. 국세청이 세무조사를 하는데 왜 다른 동네 지식인들의 편이 갈리고 위기가 심화된다는 말일까?

자신을 진보도 아니고 보수도 아닌 일개 보통 시민이라고 규정한 계명대 철학과 이진우 교수는 저 멀리 <한겨레>에까지 나타나서 "지식인들에게 편가르기를 강요하다가 결국에는 지식인의 입을 틀어막을 수도 있다."l고 심히 걱정어린 눈빛을 던지기도 했었다.

  "우선, 좌우를 갈라놓았던 경직된 이데올로기가 사라진 시대적 상황에서 한가지 색깔만을 강요하는 것 자체가 폭력적이다. 어느 문제에 대해 진보적인 사람이라고 해서 다른 부분에서도 반드시 진보적인 것은 아니다. 인권 문제에서는 진보적이지만 민족 문제에 있어서는 보수적인 태도를 취하는 사람들도 많지 않은가? 서구의 진보적 지식인들이 북한의 인권문제를 서슴없이 거론한다면, 우리에게서는 민족통일이라는 대의명분을 내세워 논의 자체를 자제하는 사람들이 스스로를 진보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가? 진보와 보수를 가르는 경계선이 불투명한 상황에서 한 부분이 진보라고 해서 반드시 전체가 진보가 아니며, 한 사안에 대해 보수적 입장을 표명하였다고 해서 그 사람 전체가 보수일 수는 없다. (<한겨레> 2001년 9월 4일자)"

  이진우 교수는 사실 그 이전부터 이미 "『조선일보』에 기고를 했다고 해서 해당 지식인을 비판하는 것은 폭력이다."라는 입장을 밝혔다. 그러나 도대체 누가 이진우 교수의 『조선일보』 기고를 비판했단 말인가? 신문 기고 문제로 실명 비판을 하는 유일한 지식인인 전북대의 강준만 교수마저도 "이진우의 『조선일보』 기고는 정당하다. 왜냐하면 이진우는 『조선일보』와 똑같은 정치적 성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라는 답글을 내놓았을 정도이다. 혹시 철없는 안티조선 지식인이 이진우 교수의 『조선일보』기고에 대해 시비를 건다면 나라도 나가서 목숨 걸고 싸울 테니까  이진우 교수는 마음놓고 기고하셔도 될 것이다. 너무 걱정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한 가지 덧붙인다면 언론개혁 혹은 언론사 세무조사 및 사주 처벌이 과연 진보적 시각이라는 데에 나는 좀 회의적이다. 이것은 그야말로 국가 이데올로기의 구현 매개체인 법이 정하는 바에 따라 탈세자를 처벌하려는 지극히 보수적인 시각이다. 이제껏 법을 강조했던 사람들이 보수 지식인이었던가 아니면 진보 지식인이었던가? 이진우 교수는 자신이 진보도 아니고 보수도 아니라고 애매모호하게 발언하기 전에 다시 한번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해 보았으면 좋겠다. 국가의 합법적 힘을 동원하여 정부 비판세력을 탄압하려는 행위를 막는 것은 내 기준으로 볼 때 도저히 지킬 것은 지킨다는 보수적 입장은 아닌 것 같다.

  또한 원칙적으로도 『조선일보』 문제는 이진우 교수처럼 『조선일보』의 정치적 논조에 동의하는 입장을 가진 지식인이 끼어들 문제가 아니다. 그는 그냥 예전처럼 하면 그만이다. 아무도 그를 비판하지 않았는데 자기가 알아서 편가르며 들어와서 싸움판을 벌이고 있는 격이란 말이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오히려 더 문제가 되는 건 한양대 사학과의 임지현 교수 유형이다. 왜냐하면 그는 최소한 이진우 교수와는 달리 『조선일보』의 극우성에 반대의 깃발을 들었던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최근 그가 쓰는 모든 책을 『조선일보』에서 크게 기사로 다뤄주고, 그가 내놓은 진보적 담론인 일상적 파시즘론은 보수언론에서 언론개혁세력을 공격할 때 최고의 화력을 지닌 무기로 활용되고 있다. 임지현 교수가 그냥 모른 체 한다면 이해할 수도 있겠지만 『조선일보』에 나타나서 "우리 사회가 자꾸 매사를 예스 아니면 노 식의 흑백논리로 몰고 가는 상황은 짜증난다."느니 "선배 학자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당시에는 좌익, 우익으로 입장이 달라도 한데 어울리고 대화는 이뤄졌다."라는 말을 해대니 그가 도대체 지식인 지형도의 어느 위치에 존재하고 있는지 헛갈릴 따름이다. 내가 알기론 그는 『조선일보』의 극우성을 극복하는 것은 중요하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그의 최근의 행로가 극우성의 극복에 어떠한 도움이 된다는 건지 설명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임지현 교수를 성급히 비판하는 것보다는 표면적으로 진보를 표방하는 그에게 『조선일보』가 주도하는 극우성의 극복을 위한 실천 방법을 들어보는 기회를 갖는 것이 더 중요해 보인다.

이렇듯 언론개혁을 둘러싸고 자신들이 알아서 편가르기를 시도한 지식인의 유형에는 맥락없는 원칙론을 주장하는 임상원형, 초청장도 없이 참전하는 이진우형, 미필적 고의로 개입하는 임지현 형으로 나눠볼 수 있다. 행태는 달라도 그들의 주장 밑에 깔린 공통된 기본 이념은 존 스튜어트 밀의 비판의 자유와 관용일 것이라 판단된다. 나 역시 임상원 교수와 마찬가지로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주의 사상을 받아들인 보수 논객으로서 이들의 의견을 존중할 용의가 있다. 하지만 그렇다면  밀의 『자유론』 2장에 나오는,

"지식인들의 의견의 충돌이 유익한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은 당사자들에 대해서가 아니라 공평무사한 방관자들에 대해서이다. 진리의 부분과 부분과의 사이의 격렬한 투쟁이 위험한 것이 아니라 진리의 절반에 대한 조용한 침묵이 바로 가공할 해악이다."

라는 말도 우리 같은 보수논객들은 받아들여야 한다. 아무리 빗발치는 비판의 화살이 날아온다 해도 거대 언론사 뒤로 숨지 말고 정면에서 맞서 싸우며 사회의 상식을 지키내는 것이 보수논객들의 임무라는 것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설사 상식 이하의 인신공격성 비판이 나온다 하더라도 그건 그것대로 비판하고 핵심은 핵심대로 비판하라는 것이다. 특히 툭하면 『조선일보』 기자들에게 전화로 고자질하지 말고 지식인과 언론 문제에 대해서 더 구체적인 문제제기를 보수적 입장에 입각해서 내주었으면 한다. 더 당당하게!

[이어진 기사]지식인의 도덕적 합의로서 안티조선 / 김상철

* 본 글은 대자보 65호(2001.10.3)에 발표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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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2/03/07 [12:17]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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