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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재자 박정희의 또 다른 분신, 피노체트-I
 
각골명심
-칠레의 정식 명칭은 칠레 공화국(Republic of Chile)이다. 남아메리카 남서부에 위치하여 인구 약1600만 명 일인당 GNP 대략 5천 달러 한반도 면적의 약 3.6에 달하는, 우리로선 비교적 큰 땅덩어리를 가진 나라다.
 
칠레를 중심으로 시계방향으로 돌아가면서 북쪽은 페루, 북동쪽은 볼리비아, 동쪽은 아르헨티나에 접하고 남쪽은 남극해에 면하며 서쪽엔 평야가 있다. 본래 칠레라는 이름은 잉카어의 한 갈래인 ‘아이마라’語로 ‘대지가 끝나는 곳’ 이란 뜻이라 한다. 이름 그대로 세계에서 제일 긴 나라다.

나는 박정희라는 세기적 독재자의 궤적을 좆다가 그가 끼친 부정적 영향이 비단 국내에서 뿐만 아니라 아시아 몇몇 나라는 물론 멀리 남미의 칠레에 까지 미친 것을 보고 한국인으로서 당혹감과 부끄러움을 동시에 느꼈다.


제발 누구도 이따위 것을 가지고 자랑스럽다 말하지 말라!

그건 나라와 민족을 떠나 보편적 인류애의 관점에서도 그런 독재의 사슬 뒤엔 반드시 짓밟히고 희생되어진 수많은 무고한 생명들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말년에 박정희는 과도한 권력을 주체 못하고 스스로 지나친 자아도취와 오만에 빠져들었었던 듯하다. 그것은 그가 수치상의 경제발전을 빌미로 필리핀의 마르코스를 비롯한 몇몇 나라들에 그의 자랑스런 노하우를 전수한단 명목으로 몇몇 동남아 후진국들의 공무원들을 대거 초청하여 벌였던 ‘새마을 운동’에 대한 ‘라이브 쇼’를 내가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아마도 그때부터 연예계에서 ‘방금 동남아 공연을 마치고….’ 운운하는 우스개 소리가 유행하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박정희 집권기간 무려 18년, 피노체트 역시 무려 17년의 장기집권과 단순히 독재자란 공통점 외에도 집권기간 중 그 독재와 자기정당성을 위해 반공을 이용하고 헌법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뜯어 고치는 등 마치 붕어빵 같은 행태를 보이고 있다. 피노체트가 사석에서 한국의 박정희를 가장 존경한다고 했을 정도로 그의 행적은 많은 부분 박정희의 모조품으로 보인다.

다만 차이점은 한 사람이 조금 앞서서 시작하고 또한 박정희가 그의 부하에
의해 비참하게 최후를 마친 것과는 달리 피노체트는 아직도 살아서 자신의 죄 값에 대하여 중대한 재판을 앞두고 있는 등 역시 행복한 말년은 이미 실종된 듯하다.

그럼 칠레의 박정희, 피노체트는 과연 어떤 인물인가? 먼저 거기에 대해서 간략하게 이 두 인물에 대한 총평을 비교하여 살펴 보고 본격적으로 본론으로 들어 가겠다.  지면과 시간상 부득이 몇 차례로 나눠서 게재하겠다.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Pinochet (Ugarte), Augusto, 1915.11.25~]

-발파라이소 출생.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육군사관학교 부교장을 지냈다. 1956년 미국 주재 대사관 무관에 이어 제6사단장, 1969년 육군참모장, 1973년 8월 대장으로 육군총사령관이 되었다. 9월 육군·해군·공군 및 경찰군 총사령관으로 군사평의회를 결성, 쿠데타를 일으켜 아옌데 정권을 전복하고 군사평의회 의장에 취임하였다. 1974년 12월 대통령에 취임하고 1980년 9월 국민투표로 장기집권을 노린 신헌법을 성립시켜 1981년 3월 신헌법의 초대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그후 계속되는 경제위기와 국민들의 민주화요구에 저항하다가 1986년 극좌단체에 의한 암살미수사건이 있었으며, 1988년 10월 대통령 집권연장찬반투표에서 패배하여 1989년 12월 대통령직을 사임하였다.(네이버 백과사전 인용)

* 박정희 [朴正熙, 1917.11.14~1979.10.26]

-경북 선산(善山) 출생. 가난한 농부인 박성빈(朴成彬)과 백남의(白南義) 사이에서 5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1937년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하고, 3년간 초등학교 교사로 근무하다가, 만주의 신경(新京:現 長春)군관학교를 거쳐 1944년 일본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였으며, 8·15광복 이전까지 주로 관동군에 배속되어 중위로 복무하였다.
광복 이후 귀국하여 국군 창설에 참여하였으며, 1946년 조선경비사관학교(육군사관학교 전신) 제2기로 졸업하고 대위로 임관하였다. 그 후 육군포병학교장, 제5사단장, 제7사단장, 제1군 참모장, 제6관구 사령관, 육군본부 작전참모부장, 제2군 부사령관 등을 역임하였다. 1949년 사상 관련사건에 연루되어 군법회의에 회부된 적도 있었다. 당시 신문보도에 의하면 여수·순천사건 관련공산주의 혐의자로 되어 있는데, 군법회의에서 무기징역을 언도받았으나 구명운동에 의해 복역은 면제되었다.
1961년 5·16군사정변을 주도하고 7월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되었으며 1962년 대통령권한대행을 역임, 1963년 육군대장으로 예비역에 편입되었다. 이어 민주공화당 총재에 추대되었고, 그 해 12월 제5대 대통령에 취임하여 1967년 재선된 후 장기집권을 위하여 1969년 3선개헌을 통과시켰다. 제3공화국 재임동안 '한·일국교정상화'와 '월남파병문제'를 국민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강행하였다. 1972년 국회 및 정당해산을 발표하고 전국에 계엄령을 선포한 후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이로써 유신정권인 제4공화국이 출범하였다.
유신시대 초기에는 새마을운동의 전국민적 전개로 농어촌의 근대화에 박차를 가하였고, 제5차 경제개발계획의 성공적 완성으로 국민들의 절대적 빈곤을 해결하는 데 어느 정도 기여하였다. 그러나 상대적 빈곤의 심화와 장기집권에 따른 부작용, 국민들의 반유신 민주화운동으로 그에 대한 지지도가 약화되자 긴급조치를 발동하여 정권을 유지하려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치인·지식인·학생·종교인이 중심이 된 민주화운동과 경제개발에서 소외된 노동자·농민의 생존권확보운동은 더욱 드세졌다.

이러한 가운데서 내치(內治)의 어려움을 통일문제로 돌파하고자 자주·평화·민족대단결을 민족통일의 3대원칙으로 규정한 1972년 7·4남북공동성명과 1973년 6·23선언이라 불리는 '평화통일외교정책'(할슈타인원칙의 폐기)이 제시되었다. 그러나 그 내용의 획기성에도 불구하고 실제 정책면에서는 북한의 비협조와 당시의 국제정세로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1974년 8월에는 영부인 육영수가 북한의 지령을 받은 조총련계 문세광(文世光)에게 저격당해 사망하였다. 이러한 정권의 위기는 결국 '부마민주항쟁(釜馬民主抗爭)'을 야기시켰으며, 1979년 10월 26일 궁정동 만찬석상에서 중앙정보부장 김재규(金載圭)의 저격으로 급서(急逝)하였다.
저서로 《우리 민족이 나아갈 길》 《민족의 저력》 《민족중흥의 길》 《국가와 혁명과 나》 《지도자의 길》 《연설문집》 등이 있다. (네이버 백과사전 인용)



[독재자 박정희의 또 다른 분신, 피노체트]-II

-1973년 9월 11일 칠레의 수도 산티아고 이날 하늘은 잔뜩 찌푸려 을씨년스러웠다.
박정희가 일으킨 쿠데타가 있었던 한국의 61년 5월 16일의 하늘도 아마 그러했으리라. 이렇게 추악한 피의 역사들은 그 잔혹한 달콤함으로 인하여 시공을 초월 지구촌의 또 다른 지역에서 그렇게 자행되었다.


칠레 시민들은 그날 아침 라디오 방송에서 흘러나오는 대통령 살바도르 아엔데가 전한 군부의 쿠데타 소식에 경악했다.  그러나 이러한 움직임은 사실 어떤 이들에게는 이전부터 예견된 것이기도 했다. 왜냐하면 이 쿠데타의 뒤에는 미국이 있었고, 미국은 이미 오래 전부터 ‘선거로 선출된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정부인 아엔데 정권’에 대하여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이를 붕괴시키려 착실히 준비해 왔기 때문이다.

해서 이 반란은 칠레의 육,해,공군 그리고 경찰에게는 이미 성공을 담보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한국의 5.16에 대한 미국의 지원설은 아직 논란만 있을 뿐 명확하게 정리된 바가 없다. 그러나 적어도 아주 소극적 측면에서만이라도 최소한 미국은 방관자 내지는 동조자 였음을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칠레 군부는 한국의 박정희가 그랬듯이 반란이 성공하자 우선적으로 ‘군사혁명위원회(군사평의회)’를 즉시 설치하고 그 의장에 아구스토 피노체트(Augusto Pinochet) 육군 최고 사령관을 선출함으로써 이후 장장 17년간, 칠레의 피의 비극적 역사를 스스로 자초한다.

아니 실질적으로 피노체트가 공식적으로 권좌에서 물러나 8년이 경과된 지난 1998년 3월에서야 비로소 육군 참모총장직을 내놓았던 것으로 볼 때, 즉 그 동안 실질적으로 내내 군부를 장악하고 왔었기에 칠레 대통령 조차도 함부로 할 수 없었던 ‘손댈수 없는 사람(Untouchable)’이었음을 볼 때, 사실상 사반세기의 긴 세월이라 봐도 그리 잘못된 과장은 아닐 것이다.

이런 면에서 볼 때, 지금 한국에서 박정희 철권 18년은 차치하고라도 그의 사후 이미 사반세기가 지났음에도 그 시대에 대한 사실적 접근 그리고 그 당시 억울한 희생자들에 대한 정확한 진실규명 조차 제대로 이뤄지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곧 한국민의 부끄러움이자 독재의 기나긴 사슬이 심어준 분명한 어둠의 경고임을 우리 모두 이젠 자각해야만 한다.

나는 이제 여기에 비록 사회주의를 표방했다 하지만 칠레 국민에 의해 지극히 정당하고도 가장 민주적 선거에 의해 선택되어졌던 살바도르 아엔데 대통령이 그 반란의 날에 최후의 순간, 제일 마지막에 점령당했던 국영방송 ‘마가야네스’ 라디오 방송에서 행한 감동적인 마지막 대국민 연설을 옮겨 놓고자 한다.




"이번이 제가 여러분에게 말하는 마지막이 될 것입니다. 곧 마가야네스 라디오도 침묵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에게 용기를 주고자 했던 나의 목소리도 닿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계속 들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항상 여러분과 함께 할 것입니다.

내가 이제 박해 받게 될 모든 사람들을 향해 말하는 것은, 여러분들에게 내가 물러서지 않을 것임을 이야기하기 위한 것입니다. 나는 민중의 충실한 마음에 대해 내 생명으로 보답할 것입니다. 나는 언제나 여러분과 함께 있을 것입니다. 나는 우리나라의 운명과 그 운명에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 다른 사람들이 승리를 거둘 것이고, 곧 가로수 길들이 다시 개방되어 시민들이 걸어 다니게 될 것이고, 그리하여 보다 나은 사회가 건설될 것입니다.

칠레 만세! 민중 만세! 노동자 만세!

이것이 나의 마지막 말입니다. 나의 희생을 극복해내리라 믿습니다. 머지않아 자유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보다 나은 사회를 향해 위대한 길을 열 것이라고 여러분과 함께 믿습니다. 그들은 힘으로 우리를, 우리를 지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무력이나 범죄행위로는
사회변혁 행위를 멈추게 할 수는 없습니다. 역사는 우리의 것이며, 인민이 이루어내는 것입니다. 언젠가는 자유롭게 걷고 더 나은 사회를 건설할 역사의 큰 길을 인민의 손으로 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고 이 연설이 끝난 후….아엔데 대통령은 경찰과 군 병력, 장갑차, 탱크 그것도 모자라 공중에는 공군의 전폭기들로 완전히 포위되었고…..마침내 정오…진입한 쿠데타 군에 의해 비참한 최후를 마쳤다.


나중에 당시 국사평의회 정보국에 근무하던 전직요원이 미국 언론인 토마스 하우저에게 증언한 바로는 "대통령의 유해는 머리가 갈라지고 뇌 속의 것들이 마루와 벽에 튀겨져 있었다"고 했다. 그러나 당시 군사평의회는 가증스럽게도 아엔데 대통령이 자살했다고 발표했다.

이것은 곧 피의 전주곡에 지나지 않았다. 이후 약 일주일간에 피노체트에 의해 자행된 피의 축제는 약 3 만명의 무고한 시민과 인민연합지지자들을 학살했으며, 이후에도 그의 집권기간 중 추가 사망자 3천여명, 실종 1천여명, 고문 불구자 10만여명, 해외망명 및 국외 추방자 약100만명에 이르렀다.

당시 칠레 인구가 고작 1000만명 남짓이었단 점에서 그 숫자 만으로도 가히 그가 얼마나 극악한 지도자 였는지 능히 짐작해 볼 수 있다.

한국의 박정희 시절의 희생자에 대한 정확한 통계는 불행히도 아직까지도 정확히 집계된바가 없다. 그것은 워낙 광범위하고도 긴 세월동안 사실상 그에 대한 논의 자체가 금기시 되어온 우리의 정치사회 현실과도 결코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단지 박정희 하나만을 기준으로 살펴보면 그가 일본군 장교시절 직.간접으로 저지른 살인의 수치가 어느 정도 인지는 알 수가 없지만 정황상 이미 그때부터 시작된 듯 하다. 그리고 이도영 박사의 주장에 의하면 제주 4.3사태나 여순반란 사건의 양민학살의 주범들이 결국 5.16의 주체가 되었음은 참으로 역사의 비극이다.

박정희는 이미 알려졌다시피 여순반란사건과 연계된 좌익전력으로 인하여 실제로 이런 극우 세력들에게 초창기에는 신임을 얻지 못했으나 결국엔 가장 핵심적 인물이 되었음을 볼 때 그의 탁월하고 천변만화한 변신엔 가히 혀를 내두를만 하다.

그리고 마침내 시작된 그의 집권기간 동안 그가 저지른 살육과 인권탄압은 가히 피노체트에 못지 않을 것으로 본다. 대략 유신헌법 이후인 1970년대 양심수 구속.구류 사례만을 대상으로 한 통계만을 살펴보아도 그의 만행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관련법규와 구속(구류)자 수 국가보안법.반공법 261명,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 72명, 공무집행방해및 폭행 38명, 국가보위법, 노동법  46명, 계엄포고령위반 53명, 내란죄 8명, 방화죄 9명, 경범죄처벌법 1184명, 긴급조치 1호 48명, 긴급조치 4호 142명, 긴급조치 9호 580명, 소요죄 108명, 기타 미상 155명…..총 2704명에 이른다. 하물며 그의 전체 집권기간에 대하여 통계를 낸다면 또 얼마나 늘어나게 될지는 여기선 일단 각자의 상상에 맡기겠다.


피노체트는 1998년 10월 신병 치료차 런던을 방문했다 스페인의 가르손 판사에 의해 범죄인 인도협정과 유럽테러협약에 따라 피노체트가 과거 스페니쉬 94명을 살해한 혐의로 기소하고 신병요청을 영국정부에 정식 요구하게 됨으로써 일약 국제적인 주목을 한 몸에 받게 된다. 영국은 이를 받아들여 일단 피노체트를 가택연금 시키고 이후 2000년 3월 2일 까지 약 일년 반동안을 끌며 세계인의 주목을 끌었던 이 재판은 결국 정치적 타협에 의해 마무리 되고 피노체트는 의기양양하게 자신의 조국으로 환대를 받으며 귀환하였다.

그러나 결국 악은 언젠간 응징 되는 법. 지난 2004년 12월 14일 페루 법정에 의해 전격 기소된 피노체트는 일부 밝혀진 그의 재산 중 미국내 계좌에서만 무려 1천 590만 달러라는 금액을 보유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법당국의 계좌 동결로 인해 지금 불과 3천 500달러의 보석금도 못 내는불쌍한 처지에 직면해 있다고 하는 최근의 외신기사가 있었다.

어찌됐든 그는 이제 꼼짝없이 그가 저지른 지난 죄에 대하여 심판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우리다.이제 우리도 이쯤에서 더 이상 미루지 말고 반드시 박정희 시대를 청산하고 가야한다…여기서 그가 살았느냐, 죽었느냐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역사든 무엇이든 산자를 위한 것이지 결코 죽음으로 모든 것이 용서되고 잊고 묻어버리고 가야한단 일각의 주장은 참으로 관대하고 뻔뻔한 수작이다.


아직도 수많은, 그에 의해 그 생채기와 가슴의 피멍을 안고 평생을 얼음덩이를 가슴에 안고 살아가는 그 희생자와 유족들, 자손들이 있음을 우린 잊지 말아야 한다. 비단 그들의 한을 풀어주는 차원에서 뿐만 아니라 우리가 진실로 우리 시대부터는 이땅에 정의를 세우고 역사를 바로잡는 과감하고도 뼈를 깎는 고통 없이는 이에 대한 극복이 불가능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약 그냥 우리가 이 기회를 놓치고 가버린다면 이는 반드시 또 다른 반복과 굴절된 역사로서 우리 자신과 후손들에게 업으로써 다가 올 것이다.

이제 칠레의 아엔데 대통령이 최후 순간에 했던 말을 인용해 이 글을 마무리 짓고자 한다.


“역사는 우리의 것이며, 인민이 이루어내는 것입니다. 언젠가는 자유롭게 걷고 더 나은 사회를 건설할 역사의 큰 길을 인민의 손으로 열게 될 것입니다.

대한민국 만세!
민중 만세!
노동자 만세!"

기사입력: 2005/03/02 [17:07]  최종편집: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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