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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정부주의와 월러스타인, 진보의 선취성
[진보의 개념2] 진보의 ‘선취성’만으로는 진보의 ‘진정성’ 이룰 수 없어
 
뒤집기   기사입력  2005/02/24 [10:58]
지난 글에서 진보성의 필수조건으로 선취성 여부가 있다고 하였다.

하지만 이 “선취성 여부”의 기준은 매우 미묘한 문제를 야기하기도 한다.

지금은 핵무기가 논란의 중심에 있지만 근본적인 변화를 주장하는 이들에게 이런 논란은 코웃음거리밖에 되지 못한다. 군대와 경찰이라는 “국가의 폭력” 자체를 부정하는 무정부주의자들 입장에서는 핵무기로 논란이 이는 것 자체가 비겁이요, 본질 흐리기가 될 것이다. 이들이 보기에, 진보세력이 북한의 핵무기 보유 선언을 격렬히 비난해야 하느냐 말아야 하느냐는 문제는 국가라는 존재의 “합법적 폭력”이라는 본질적 문제를 가리는 매우 교묘한 위장술일 따름일 것이다.

이러한 무정부주의자들의 입장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우선 근본적인 의미에서 이들이 진보적이지 않다고 판단하기란 어렵다. 인간이 몇 천년 후에도 지금과 같은 식의 군대와 경찰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 단언할 수 없다는 점에서 국가의 모든 합법적 폭력을 부정하는 무정부주의자의 주장이 몇 천년이 흐른 후 어떠한 판단을 받을지 우리는 쉽게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 무정부주의자들을 진보세력에서 가장 선취적인 자들로 인정하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만일 그러하다면, 과연 어떤 점이 무정부주의자들에게 그러한 지위를 부여하는 데 우리를 주저하게 하는 것일까.

이 질문에 답하기 전에 유사한 예를 좀 더 들어보자.

왈러쉬타인은 현존 세계의 발전을 전혀 “발전”이 아니라고 정의한다. 그에게 있어 의료의 진보는 다른 종류의 질병을 낳았으며, 제 3세계까지 포함한 지구촌 전체를 놓고 보면 우리는 지난 세기 진보한 것이 아니라 퇴보한 것이 된다. 그것도 상대적이 아니라 절대적으로 퇴보한 것이 된다. 이런 점에서 그가 보기엔 칼 맑스도 산업성장주의에 오염된 비진보적인 사상가로 취급된다.

왈러쉬타인의 입장에서 보자면, 한국의 노동운동 내부의 정규직에 대한 비정규직 차별 문제는 너무나 사치스러운 논쟁으로 보인다. 그가 보기엔 정규직이든 비정규직이든 그가 받는 월급의 적어도 절반을 아프리카의 굶어 죽는 어린 아이 돕기에 써야 마땅하기 때문이다. 정규직/비정규직 논쟁 자체가 전 세계 기아문제를 가리는 교묘한 핵심가리기로 보일 것이다.

이러한 일은 단지 학문이나 이데올로기 문제에 국한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극좌파로 분류되는 유럽의 트로츠키주의자들은 유럽의회가 토빈세를 도입하는 문제에 대해 반대의사를 표명하였다. 토빈세가 “공산주의자들이나 하는 과격한 일”이라고 공격해 왔던 미국 금융자본으로서는 대환영할 이런 일이 벌어진 것도 따지고 보면 논리적 일관성이 그 내부에 있다. 트로츠키주의자들이 토빈세에 반대한 것은 “토빈세는 결국 유럽의 금융자본 좋은 일만 시켜주기 때문”이었다.

사실 본질적인 문제로 따지자면 이 트로츠키주의자들의 주장도 진보세력에게는 일리가 있는 주장이다. 어차피 좌파는 자본보다는 노동자의 편이기 때문이다. 이 트로츠키주의자들이 보기에 한국의 진보세력이 “재벌 해체”를 주장하는 것은 너무나 노골적인 “자본가들의 구호”일 것이다. 중소자본가를 이롭게 하고 결국 한국 자본의 질을 높이려는 이런 구호는 “반노동자적인 구호”이고 그 뒤에는 “교활한 자본”이 있다고 판단할 것이다.

우리가 무정부주의와 왈러쉬타인의 예에서 확인할 수 있는 바는 진보를 옹호하면서 이들을 비판하기란 쉽지 않다는 점이다. 현존 체제가 인류가 이룩한 최고의 체제이며 만고불변의 진리라고 사고하는 보수주의자에겐 무정부주의, 왈러쉬타인주의, 트로츠키주의는 다른 진보세력과 함께 같이 묶어서 비판하면 되지만 진보세력 입장에서는 이 문제가 그리 녹록치 않다. 무정부주의와 왈러쉬타인주의의 과격성을 비판하자니 자신이 스스로 보수주의자가 되어 버린 느낌이고, 이들의 주장을 받아들인다면 자신이 이제까지 해온 모든 주장이 너무나 “수구적”으로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실제로 대부분의 진보세력은 그들의 주장이 너무 과격하다고 말하기가 꺼려질 것이다. 그 이유는 우선, 스스로 절차적 민주주의의 진보를 위해 싸웠던 일마저 과거 군사독재 정권으로부터 “과격”하다고 공격받아 왔기 때문일 터이다.
 
다음으로 일반적 진보주의자에게, 상대가 자신보다 더 한발 나갔기 때문에 즉 더 선취적이라는 이유 때문에 비판해야 하는 것은 받아들이기 힘들기 때문일 것이다. 상대를 비판할 때 그들이 “틀려서”라고 하고 싶지, “너무 진보적이어서”라고 말하기를 주저하기 때문이다. 이런 심리의 근저에는 중도세력이나 수구세력과 같은 입장에서 무정부주의를 비판하기가 꺼려진다는 것도 존재한다.

여기서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바는 “무엇이 진보인가”는 질문에 답을 하기 위해서는 단지 그 내용의 선도성, 선취성, 본질성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이다.

판단컨대, 우리가 다른 준거틀을 가지지 않는다면 무정부주의, 왈러쉬타인주의, 트로츠키주의를 넘어서는 점점 더 근본적인 주장만을 하는 세력이 진보세력의 대표주자라고 하는 일을 피할 수 없게 될 것이다.

따라서 앞서 제시한 (1) 선취성은 진보의 필요조건이기는 하나 충분조건은 아닐 수 있다는 판단이 필요한 것으로 보인다. 다시말해 진보는 필연적으로 선취성을 가지지만 선취성만을 앞세운다고 하여 모두 “진정한 진보”가 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사실 선취성만을 내세운다면 진보는 종교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아니, 포교에 힘쓰는 종교인에 비하면 종교보다 못할지도 모른다.

그러면 선취성과 함께 요구되는 진보의 다른 조건은 과연 무언인가.

이 문제는 다음 글에서 계속하기로 한다. / 독자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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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5/02/24 [10:58]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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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름 2005/02/24 [12:05] 수정 | 삭제


  • 진보 맑스 종교에 탐욕이 깃드네

    상식과는 달리 탐욕을 종교가 풀진 못해

    종교 자체가 탐욕

    대입한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