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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살아나는 '사법살인' 인혁당사건
어머니들은 차마 늙을 수가 없어, 사법부 스스로 사죄와 속죄해야
 
서태영   기사입력  2004/04/22 [11:08]
"누군가 가래 끓는 목소리가 내 이름을 부르더군요. 나는 뺑끼통(감방 변소)으로 들어가 창에 붙어서서 누구냐고 큰 소리로 물었죠. 하재완입니더/ 하재완이 누굽니까?/ 인혁당입니더/ 아항, 그래요! 인혁당 그것 진짜입니까?/ 물론 가짜입니더/ 그런데 왜 거기 갇혀 계슈?/ 고문 때문이지러/ 고문을 많이 당했습니까?/ 말 마이소! 창자가 다 빠져나와버리고 부서져버리고 엉망진창입니더/ 저런 쯧쯧/ 즈그들도 나보고 정치문제이니께로 쬐끔만 참아달라고 합디더/ 아항, 그래요!" (김지하, 「고행」)

인혁당 사건의 진위를 둘러싼 논란은 수사 발표 뒤부터 사건연루자들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고 나서도 계속 되고 있다. 평화의 사제 문정현 신부(인혁당 대책위 공동대표)는시신을 탈취하려는 사복경찰들과 온종일 처절한 몸싸움을 하는 통에 무릎을 다쳐 다리병신이 되었다고 했다. 지팡이는 그때 후유증으로 들고 다니시나 보다.

▲ 해마다 4월을 여는 4.9통일열사 29주기 추모제가 칠곡 현대공원에서 열렸다.     ©서태영

1975년 4월 8일 오전 10시 대법원 법정에서는 인혁당재건위사건 연루자 8명에 대해 사형을 확정했다. 다음날 아침 7시 사형집행. 대법원 상고가 기각된 지 20여 시간 만에 형을 집행한 것이다. 이들이 희생된 4월 9일은 '사법살인의 날'로 불려진다.

"면회도 한번 안 시키고 변호사도 제대로 변론 못하게 한다. 본인이 무슨 의사표시는 해야할 것이 아닌가. 변명이라도 해야 할 것이고, 그런데 전혀 이야기를 못하게 했다. 이런 재판이 어디 있나?" -도예종 선생 부인 신동숙 여사 증언
 
87년 박종철 열사 고문은폐조작 사실을 폭로했던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은 1975년 2월 24일 인혁당 사건은 날조된 것이라는 성명을 발표했다.

"인민혁명당은 조작된 것이며 충분히 어떤 정치적 목적에 의하여 날조된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보다 철저한 진상조사가 가능하도록 제반의 여건을 조성해야 한다. 아니면 정부 당국 스스로가 공개된 민간법정에서 재판하는 것만이 사건의 해결과 국민의 의혹을 푸는 열쇠임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바이다."

인혁당 사건 진상규명 및 명예회복을 위한 대책위원회(공동대표 이돈명 외 2명)는 2002년 12월 10일 기자회견을 갖고, 인혁당 사건에 연루돼 사형이 집행된 서도원, 하재완, 김용원, 송상진, 도예종, 이수병, 우홍선, 여정남 씨에 대한 재심청구를 서울지법에 냈다고 밝혔다.

29주기 4.9통일열사 추모제에 참석한 참가자 일동은 "열사들의 죽음에 대한 어떠한 명예회복도 이뤄지지 않고 있다. 조속하고 제대로 된 재심을 위해 계속해서 싸워나갈 것"을 결의했다. 모진 역사를 맞상대한 어머니들은 차마 늙을 수가 없었나 보다.

내년이면 30년째다. 한 세대가 가기 전에 바로잡아야 한다. 싸우는 자들의 말없는 민주주의가 다시 사법부의 문을 두드리고 있다. 진실은 죽지 않는다. '올드보이'의 박찬욱 감독은 <인혁당사건>에 강한 애착을 보였다. 꼭 영화로 만들고 싶다고 했다. "불의의 독재 권력에 의해 억울하게 사형 당한 이들이 나라와 민족의 가슴에 다시 살아나는 때가 이제야 오는가 보다. 강산이 두 번 바뀌고 한 세대가 흘러가고 있지 않는가? 저들의 뼈들이 일어나 춤출 날이 왔다. 죽은 자와 산 자들이 모여 함께 춤출 날을 만들자."(문정현 신부) 

사월은 푸르다. 인혁당의 후예들(?)이 대거 국회의사당으로 입성한 4월총선 또한 푸르렀다. 잔인한 4월이 푸르른 계절로 살아오고 있다. 인혁당은 기필코 새날을 맞이할 것이다.  

▲ 온 국민이 절하고 추모하는 새날은 언제쯤 올까?     ©서태영


겨레와 나라를 사랑한 것밖에 죄가 없다

-소위 인혁당 사건 대책위 출범에 부쳐

이기형 (시인, 민족문학작가회의 고문)

1974년 3월 초
유신 암흑에서도
매화꽃 개나리꽃 진달래는 방긋방긋
방향(芳香) 천지에 뿌렸다.

온 겨레가
새희망을 찾아 부푸는데
무슨놈 날벼락이냐
민청학련사건 배후로 지목
여덟 애국투사를 줄줄이 옭아갔다
조작하여 '인혁당 사건'이라고.

천하에 둘도 없는 고문 만행
발길질 주먹질
물과 고추가루와
전기와 불과
몽둥이와 대바늘과 철사로
생사람을 잡아
죄를 남산만큼 쌓았다.

일심에서도 줄줄이 사형
이심에서도 줄줄이 사형
일년쯤 지난 1975년 잔인한 4월 8일
대법원 판결 날
김용원 사형
도예종 사형
서도원 사형
송상진 사형
여정남 사형
우홍선 사형
이수병 사형
하재완 사형
천인 공노할 극형
찰칵 찰칵 수갑을 채운다
여덟 투사는 할 말을 잃었다
서로 멍히 쳐다봤다
한마디씩 분통을 터뜨려
'이따윗 법이 어딨노!'
'생사람을 잡아!'
'망할 놈의 세상!'
'나라와 겨레를 사랑한 것밖에 죄가 없다!'
한 사람 한 사람
독방에 등을 떠밀어 넣는다
그날 밤
투사들은 잠을 못 이뤘다
목이 바삭바삭 탔다
아름다운 고향 산천이 눈앞에 선해
부모 형제, 아내와 자식들의 얼굴
정다운 친구들의 얼굴이 선히 보이고
잠시도 눈을 못 부쳤는데
어느새 날이 훤히 밝는구나.

뚜벅 뚜벅 뚜벅
잰 발걸음 소리
앗!
저마다 신경을 곤두세워
집행까지는 꽤 시일이 걸린다던데...
'철컥!'
문 따는 소리
'서도원 나왓!'
수갑찬팔을 오랏줄로 묶는다
'이놈들 뭔 짓들이냐!'
"동지들! 비겁하지 말자!"
형리는 다급히 입을 틀어막는다
양쪽에 한 사람씩 붙어 팔을 잡고
뒤에는 총든 간수가 노려본다
'민, 민...'
틀어막은 서의 입에서 소리가 새어 나온다
저벅 저벅 멀어지는 발자욱 소리
'철컥!'
'도예종 나왓!'
'군사독재를 타도하자!'
'철컥'
하재완
'민주주의 승리 만세!'
'철컥'
송상진
'남북통일 만세!'
'철컥'
우홍선
'미군은 물러가라!'
'철컥'
이수병
'망국적 국가보안법을 철폐하라!'
'철컥'
김용원
'야만적 긴급조치법을 파기하라!'
'철컥'
여정남
'자유로운 조국 독립 만세!'
애국투사들은
이렇게 형장으로 끌려갔다
아!
목숨은 하늘인데...
목숨은 하늘인데...

외세를 등에 업고
정권을 찬탈한 독재자
나라와 계레를 끔찍히 사랑한 투사들의 고문 흔적을지우려고,
억지로 조작된 죄가 탄로날까봐,
언도 다음날 새벽
전례없이 부랴부랴 교수형을 집행
가족들의 항의와 애원도 뿌리치고
시신을 화장하는 만행도 서슴치 않았다.

오늘도 산천에 가득찬
부모님들의 한숨소리
자식들의 피울음소리
올봄으로 만산의 진달래는 피꽃으로 피어
님의 넋을 아로새겨 준다
세상이 운다 운다
천추의 한을 품고
슬픔을 가누지 못한 채
오랏줄에 묶여총칼에 내몰린
그 새벽 그 감옥도
지금은 독립공원으로 바뀌어
형장 앞 미류나무 잎새는
23년전 그날의 사연을 곡하듯
살랑살랑 슬픈 곡조로 운다
꽃나이 애국 선열의 목숨을 단칼에 앗아간
그날의 난폭자도 진작 비명에 갔거니
조국 분단 반백년!
아, 잔인한 세월이여!
그대들의 거룩한 길
우리들 가슴마다에 활활 타올라
중음신으로 떠도는 님들의 명예와 영광을
민주화와 통일의 길에서, 오늘
반드시 되찾아 드리오리다.

끝내는
백두산 높이 대통일의 깃발을 올려
님들의 넋도 빛나는 그 이름
남북 온 겨레와 어울려 덩실덩실 춤추려니
아, 남북 대통일의 그날이여!.

* 인혁당 공부는 인혁당사건 관련자료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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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4/04/22 [11:08]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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