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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만 까면 인터넷논객? 방향성 있는 비판해야
한국의 정치지형과 올바른 정치논객의 자세
 
뒤집기   기사입력  2004/02/27 [14:11]

1. 한국의 정치지형

서양의 8등신 개념을 떠 올릴 필요까진 없지만 신체의 각 부위가 일정한 비율로 구분되는 것은 정상적인 몸의 기본 요건이다. 우리나라의 정치지형을 몸의 부위에 비교해 보면 어떤 모습일까.

민주노동당으로 대표되는 진보라는 머리통은 손톱만한 크기로 목 위에 혹처럼 붙어 있고, 퇴화되어 없어져야 할 수구(한나라당으로 대표)라는 꼬리는 몸 전체 크기만큼 부풀어 있는 모습. 한마디로 괴물의 모습 바로 그것이다.

진보세력과 수구세력의 사이에 있는 몸통인 중도세력은 보는 시각에 따라 다양한 스펙트럼을 가진다. 일부 진보세력은 중도와 수구를 뒤섞어 “보수세력”으로 정의하고, 극단적 수구세력의 눈엔 중도세력이 진보세력만큼 “빨갛게” 보인다. 서구언론은 한국의 이 중도세력을 종종 중도좌파나 좌파로 칭하고, 수구세력을 보수나 우파로 칭하는데 이것은 자신들의 정치지형을 한국에 기계적으로 투영한 오류이다. 서구는 정치지형이 좌파와 우파로 양분되지만, 한국은 지금까지는 크게 수구와 중도로 양분된다는 걸 간과한 것이다.

사실 한국의 중도세력은 서구의 우파는 물론이고 심지어 극우보다 사회보장, 노동문제에 있어 더 오른쪽일 때가 많다. (유럽 극우파의 주관심사는 외국인 문제이지 노동과 복지문제가 아닌데 이는 다시 말하면 극우파조차도 유럽식 노동, 복지를 어느 정도 당연한 것으로 여긴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좌우파의 구분에 대한 논의가 실천적 의미를 상실하면 무의미한 말장난으로 끝나기 십상이다.

수구세력이 틈만 나면 중도세력을 좌파로 규정하는 이유는 “그들이 왼쪽으로 치우쳐져 있으니 그보다 오른쪽인 우리가 지지를 얻어야 한다”는 목적의식이 숨어 있다. 진보세력이 중도세력을 보수세력이라 규정하는 이면에도 한국사회가 더 왼쪽으로 갈 때에야 좀더 정상적인 사회가 된다는 믿음이 깔려있다.

이런 실천적 의미에서 난 중도세력을 중도좌파라 칭하는 데 반대한다. 우리 사회가 더 오른쪽으로 가야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세계에서 3번째로 많은 전투병을 파병하는 정부가 반미세력이고 사회주의자의 뿌리를 부정하는 국가보안법이 시퍼렇게 살아있는 나라의 정부가 좌파라는 한나라당의 잠꼬대 같은 주장에 결코 동의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한편, “보수”라는 용어도 수구세력이 스스로를 칭하는 데 잘못 쓰는 바람에 본래적 의미를 상당히 상실하였다. 이런 수구 냄새가 나는 “보수” 이미지를 중도세력에게 덧씌울 유의미성도 크게 느끼지 못한다. 이 두 가지 이유로 이글에서는 중도세력을 그대로 쓰거나 수구와의 대립적 의미에서 때때로 개혁세력이라 부르겠다. (덧붙여 필자가 사용하는 진보세력은 서구의 관점으로 중도좌파를 포함한 좌파 일반의 의미라는 걸 밝힌다)

중도세력은 말 그대로 중도일 수밖에 없는데, 진보세력과 수구세력의 영향력에 따라 시계추처럼 왔다갔다하기 때문이다. 88년 DJ, YS, JP를 수반으로 한 야3당이 국가보안법 폐지와 노동3법 개정을 통과시킨 것, 97년 초 노동법 날치기 통과를 무효화한 것 등은 진보세력이 장, 단기적으로 강했던 때의 중도파의 행동이라 할 수 있다. 그 외 대부분은 중도파가 수구세력에 의해 코뚜레 꿰인 소처럼 질질 끌려 다녔다고 할 수 있다. 민자당 3당합당 이후는 말할 것도 없고, DJ 정권도 여론을 장악한 수구언론에 의해 끌려다니기만 했다.

2. 수구언론의 여론조작술

무소불위의 권력을 지닌 수구언론의 힘은 막강했다. 수구언론의 여론 조작은 크게 두 가지로 이루어진다. (1)색깔론, (2) 지역감정 조장 등 거시적 전략이 그 하나라면, (3)정치인이나 정치세력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 구축이 그 두 번 째이다. 인간의 본성이 사랑보다는 미움에 약하다는 걸 이용한 교활한 전략인데 가랑비에 옷 젖는다고 부정적 이미지 구축의 효과는 몸서리 칠만큼 무섭다.

DJ 만큼 장기적으로 이 두 가지 전략의 피해자가 된 경우도 드물다. 많은 이들이 DJ를 체념하고 새로운 대안을 찾아 나선 것이나, 반대로 그 한축을 허물기 위해 DJ가 JP와 결합한 것은 수구세력의 여론조작이 얼마나 집요하고 성공적이었나를 반증한다.

수구세력이 이처럼 여론의 장(場)을 장악해 버리면 마치 중력이나 자기장이 그러하듯 여론은 쏠림이 일어난다. 이 場속에 흡입된 이후에는 지식인이고, 진보세력이고 할 것 없이 수구세력의 장단에 춤추게 된다. 많은 이들은 스스로 중립적 입장이라 착각하지만, 그 중립은 수구세력의 場 속에서의 중립이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편향적이 된다. 마치 우리가 무서운 속도로 태양 둘레를 돌고 있다는 사실을 느끼지 못하는 것과 같다.

80년 한국 사회의 가장 진보적인 모습을 대표했던 광주를 보자. 거리에 나온 시민들 중 “김일성은 오판 말라!”는 구호를 외치는 무리가 있었다. 아무런 상관도 없었지만, 무엇이든 일단은 북한에 대해 반대를 표명해야만 “중립적 태도”가 보장되었기 때문이다. 당시의 반공이데올로기에 억눌린 이성적 판단의 마비이다.

강준만의 처절한 지역주의 부수기 노력 이전에는 지식인이든 진보세력이든 아무 말도 하지 않음으로써 지역차별에 “중립”을 표명했지만 이것이 지금 보면 중립이라기보다는 지역차별에 수동적으로 동조한 것이라는 건 명백하다.

그러면 과연 (3) “정치인이나 정치세력에 대한 비본질적인 부정적 이미지 구축”에 대한 우리의 “중립”적인 태도는 과연 중립인가 아니면 수구세력에 굴복한 편향된 것인가. 이에 대한 심도 깊은 논의는 얼마나 있어왔나에 대해 자문하지 않을 수 없다.

이에 대해 논하기 전에 현재의 정치 정세를 간단히 짚고 넘어가자.

3. 현재의 정치정세

97년 정권교체로도 뒤집어질 것 같지 않던 수구세력과 중도세력의 거시적 역관계는 노무현이 검찰을 독립시키고, 사실상 측근 포기 선언인 재신임 선언을 함으로써 극적으로 역전되고 있다. 수구세력은 편파수사 주장, 특검법, 청문회, 개헌논의, 탄핵, 색깔론 등으로 이 거시적 정세를 다시 뒤집으려 안간힘을 쓰고 있지만 정치개혁 정국이라는 거대한 파도를 아직 넘지는 못했다.

87년 6월 항쟁이 수구세력 대 개혁+진보세력의 전선이었듯이 현재의 정국도 거시적으로 수구세력 대 개혁+진보세력의 전선이다. 민주당은 파병반대로 이것 외의 제3의 길을 찾는 듯이 보였지만, 민주당이 민주노동당-열린우리당-한나당의 세 정치적 입장 외에 선택할 수 있는 제3의 길은 없었다. 결국, 한-민 공조에 이어 최근의 김경재의 한나라당과의 합당론, 정몽준 입당 추진 등에서 보듯 민주당은 일관되게 수구세력에 편입되는 길을 택했다.

민주당은 여전히 한나라당과의 차별성을 주장하고 싶겠지만, 이것은 마치 6월 항쟁에 반대하면서도 전두환, 노태우와 차별된다고 하는 주장만큼이나 근거없는 주장이다.

어떤 점에서는 민주당의 이런 모습은 한나라당보다 더 수구세력에게 이바지하는 바가 큰데 그들이 수구세력과 중도세력의 전선을 흐트러뜨리고 제3자 입장을 가장해 수구세력 편들기를 하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분당 직후 개혁세력의 분열을 비판했던 자칭 개혁적 논객들 중 상당수는 아직도 자신의 입장을 정리하지 못한 채 수구세력의 장단에 놀아나고 있다.

그 한 예로, 아직도 열린우리당에게 분당 책임을 묻는 논객이 있다. 이런 논객들은 민주당이 분리되지 않고 지금 그대로 있다고 가정한 후 그 당은 지금 무슨 일을 하여야 하는가를 자문해 보아야 한다. 이 당은 한나라당의 편파수사 주장, 특검법, 청문회, 탄핵 등에 맞서 싸워야 하는가 아니면 공조를 해야 하는가? 그렇다면 그 일은 열린우리당이 하고 있는가, 아니면 민주당이 하고 있는가? 사실이 이렇게 명확한데도 분당책임론을 거론하는 자세는 사고가 정지해 있거나 아니면 자신을 속이는 것이다.

4. 노무현 증오에 함몰된 얼치기 개혁논객.

이제 앞에서 본 수구세력의 여론조작 (1)(2)(3)의 문제로 되돌아가보자. (1)색깔론의 문제는 상당수 논객들에도 면역력이 생겨서 웬만한 수구언론의 여론 몰이에는 끄떡도 하지 않는다.

그런데, (2)지역감정 문제는 미약하지만 역편향도 나타나고 있다. 지역감정의 피해자였던 민주당이 광주집회를 열면서 (2)의 문제를 역이용한 것이 그 한 예이다. 그 외에도 신기남, 유시민 등을 영남패권주의자라 몰아붙이는 어느 논객의 자세, 민주당 분당을 “호남인에 대한 능욕”이라 평한 강준만 등도 이런 역편향의 하나이다. 강준만의 경우는 그리 놀랄 바가 못 되는데, 그 비슷한 예는 (1)에서도 관측되기 때문이다. (북한에 대한 열린 자세가 지나쳐 맹목적 북한 추종자가 된 -- 극소수라 봐야겠지만 -- 경우가 이에 속한다)

여전히 한국사회에서 (1), (2)의 문제가 과잉이고 그 역편향은 아직 과소라는 점에서 이 문제는 정도로 마치고 (3)의 문제로 들어가자.

정치인이나 정치세력은 그 정치행위로 평가해야지 그 외의 비본질적인 문제가 개입되면 문제의 핵심을 놓치고 여론조작을 꾀하는 쪽의 의도대로 움직이기 십상이다.

대표적인 예가 조선일보가 야당시절 DJ가 외교순방 때 비행기 안에서 맨발로 돌아다녔다느니, 노무현이 상당한 재산가라느니 하는 보도를 해서 소송까지 벌어진 일들이다. 이 외에도 “아집, 독선, 오기, 말 바꾸기” 등의 표현이 DJ와 노무현의 뒤에는 항상 따라다녔다. 노무현은 여기에 더해 “불안, 말 함부로 하기” 등이 추가되었다. 조선일보의 이런 이미지 조작 전략은 여타 신문들도 어중이떠중이 따라하면서 더욱 증폭시키고 있는데, 민주당 편향이 지적되곤하는 프레시안이 노무현의 재산문제를 탑에 올린 것도 이런 아류의 하나이다.

자칭 개혁 논객이라는 이들도 수구세력이 조장한 이런 장에서 자유롭지 않다. 최근 무작위로 본 두 논객의 글에서 딴 다음의 표현을 보자.

“말과 이미지의 변화, 정치적 쇼, '노무현'에 환장한 집단, 생산없는 극단주의”, “배신과 국정의 난맥, 실정과 무능, 철학과 경륜이 부족”, “노무현이 대통령이 될 수 있었던 데에는 허구적 이미지와 조작된 상징에 현혹된 유권자 대중의 무지와 오해가 주된 동인”

수구언론보다 더 했으면 더 했지 결코 덜하지 않는 노무현에 대한 증오심을 읽을 수 있다.

이런 식의 글쓰기는 (ㄱ) 현재의 정세가 규정하고 있는 수구세력과의 전선에 대한 무지와 (ㄴ) 수구세력이 추진하고 있는 이미지 조작에 포로가 된 것을 고백하는 것에 다름아니다. 특히나, 정치평론의 대상은 정치인이지 자기를 버린 연인이 아니다. 자신이 바라는 바에서 벗어났다고 정치인에게 이러한 증오심을 퍼부어서는 이성적인 판단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 이런 류의 글을 읽고 나면 남는 것은 그 글의 논리가 아니라 한 정치인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런한 것은 진보세력에게도 위험한 것인데 -- 인용한 두 논객은 진보세력은 아니다 -- DJ 혐오, 노무현 증오라는 이미지 조작은 미래의 진보정치인에게 그대로 적용될 것이기 때문이다)

흔히 “대안 없는 비판”은 문제가 많다고 하는데 더 심각한 것은 이처럼 정치인을 정치적 잣대가 아니라 이렇듯 비본질적인 것으로 비판하는 “방향성을 상실한 비판”이다.

이처럼 실제로 수구언론이 조장한 장에 포섭된 순진한 논객들과 달리 한겨레의 손석춘씨나 성한용씨의 글은 “방향성을 상실하지 않는 비판”의 본보기를 보여준다. 그들은 노무현에 대한 증오심을 부추기기 보다는 개혁과 진보라는 명확한 방향에서 비판을 한다. 파병, 노동, 청와대의 보수적 인사 문제에 대한 따끔한 질책 등이 그것이다.

이렇듯 이 두 종류의 글쓰기의 진정한 차이는 노무현을 비판하느냐 아니냐가 아니라 그것이 가지는 한국사회 발전의 방향성에 있다. 구체적으로는 수구세력에 대한 관계의 문제이다. 얼치기 개혁논객의 비판이 수구세력의 場 속에 함몰된 것이라면, 손석춘 등의 글은 이 장을 뛰어 넘고 있다.

5. 얼치기 맹목적 노무현 지지자의 오해

한편, 앞에서 예를 든 논객과 다른 각도에서 방향성을 상실한 비판도 자주 볼 수 있다. 맹목적 노무현 지지자로 분류되는 논객이 이 경우이다. 한 논객은 일방적으로 노무현 정부의 정책을 지지하면서 손석춘, 오마이뉴스, 한겨레에 대해 그들의 자주를 “패권적 일방주의 자주 노선”으로 공격하는 등 대다수 논점에 대해 수구세력의 입장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시각으로 비판하였다.

위에서 썼듯이 비판이라고 다 같은 비판이 아니다. 증오심을 일으키는 파괴적 비난의 글과 손석춘 등처럼 생산적이고 건설적인 글은 구별해야 한다.

얼치기 개혁논객의 노무현 비판은 정치개혁 이외의 자질구레한 사안으로 노무현에게 부정적 이미지를 만들고자 하는 수구세력의 여론조작에 굴복하거나 이를 돕는다. 반면 중도세력보다 조금 더 진보적 입장에서 하는 올바른 비판은 맹목적 노무현 지지자가 포괄하지 못하는 다양한 방향에서 수구세력을 공격하고 중도세력을 방어한다.

(ㄱ) 우선, 이성적 비판은 정치인에 대한 올바른 방식의 비판을 수행함으로써 수구세력이 그동안 해왔고 앞으로도 할 비이성적이고 비본질적인 비난을 방어할 수 있는 토대를 구축한다.

(ㄴ) 다음으로, 방향성을 가진 비판은 수구세력이 끊임없이 요구하는 정책의 보수화, 우경화에 대한 맞불 성격의 비판을 수행함으로써 정세를 개혁적으로 유도하는 데 일조한다.

(ㄷ) 그리고, 진보적 비판은 중도파의 정책이 보수적이고, 우파적이라는 점을 바르게 지적함으로써 그것을 급진적, 좌파적이라고 공격하는 수구세력의 색깔론에 대한 정당한 방어를 한다.

(ㄹ) 이런 것들의 총합으로, 이런 비판은 노무현 정권의 정책이 보수적으로 경도되거나 수구세력에 굴복하는 것을 견제함으로써, 정권이 역사적으로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는 데 기여한다.

이런 이유들을 보더라도 노무현 지지자가 손석춘 씨 등의 건전한 비판을 비난하는 것은 온당치 못한 자세이다.

물론 노무현 지지자는 진보세력과 다른 입장으로 중도세력을 지지할 것이고 이 둘의 차이는 꽤 클 것이다. 하지만 오년 후가 될지 십년 후가 될지 모르지만 중도세력과 진보세력의 경쟁이 본격적으로 될 때 진보세력에 대한 비판을 해도 늦지 않다. 지금 싹을 죽이려 할 필요는 없다. 그때는 지금 수구세력의 논리가 아니라 더 생산적인 논리로 상호 비판을 해야 함은 물론이다.

(ㅁ) 정세적 입장에서 보더라도, 손석춘 류의 진보세력의 목소리가 커지는 것은 노무현 지지자에게도 유리하다. 진보세력이 제 목소리를 못 낼 때, 민주당이 객관적 제 3자의 입장으로 치장하며 정국에 개입할 것이다. 그들의 개입이 한나라당으로 대표되는 수구세력을 강화하는 쪽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것은 조순형의 탄핵발언 등에서 보듯 명확하게 드러나고 있다.

6. 결론

얼치기 개혁논객은 아직도 민주당에 한다리를 걸치고 민주당과 열린우리당의 중간지점에서 비판을 한다고 착각하고 있다. 그러나 위에서 논했듯이 그 중간지점이라는 건 한나라당과 열린우리당의 중간지점과 동일하다.

스스로 손석춘씨나 더 나아가 민주노동당 정도의 진보성향이 있다고 판단되는 논객은 그 방향에 입각해서 노무현 비판을 수행하면 된다. 그게 수구세력을 일소하고, 중도세력, 진보세력을 다 살리는 길이다. 권영길 민주노동당 대표가 “그놈이 그놈이다”고 하기 보다는 한나라당을 “최악의 정당”으로 규정한 것은 이런 의미에서 올바른 자세를 취한 것이다.

그 정도의 진보성향이 없다고 스스로 판단되는 자칭 개혁논객들은 그냥 노무현을 비판적으로 지지하면 된다. 이 두 가지 이외의 길은 없다. 이 두 가지 외의 길이 보인다면 그건 스스로가 겉은 개혁이로되 속은 수구로 가득 찬 논객이라는 걸 고백하는 셈이 된다.

설령 극좌파라 할지라도 조선일보 등 수구언론 식의 정치인 비판을 하면 그 정신구조는 수구세력과 동일하다고 보아야 한다. 실제 권영길에 대해 -- 마치 얼치기 개혁 논객이 노무현 헐뜯듯이 -- 인신공격성 비판을 하는 극좌파들을 심심찮게 볼 수 있는데 이런 점에서 좌-우의 정치성향이 일직선이라기보다는 원형에 가까울 수도 있다.

다시 한번, 수구세력 일소라는 시대적 과제와 현재의 정세, 수구세력이 행하는 비본질적인 비판의 문제점을 심각하게 인식해서 개혁적 논객들이 제대로 된 건설적이고 생산적인 비판 하기를 기대해 본다.  
 
* <주장과 논쟁>란은 네티즌들이 만들어가는 코너입니다. 많은 참여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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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4/02/27 [14:11]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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