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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 노무현'의 허상, '대통령 노무현'의 진실
어느 대중정치인의 대권도전, 이미지메이킹과 상징조작
 
기러기   기사입력  2004/02/25 [23:51]

한국의 제16대, 노무현 대통령이 취임한지 1년이 지났다. 한국인들은 그의 취임 전 1년 동안 커다란 이변을 경험했고, 그의 취임 후 1년 동안 거센 소용돌이 속에 있어야 했다.

2002년 한국정치는 이변의 연속이었다. 변방의 정치인 노무현이 집권당의 쟁쟁한 인사들을 제치고 대통령후보가 된 것이 이변의 시작이었고, 당선이 유력시되던 야당의 막강한 후보를 많은 우여곡절 끝에 꺾고 결국 대통령선거에서 승리한 것은 이변의 끝이었다.

2003년 한국은 거대한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불안하고 우울하다’로 시작되어 ‘대통령직 못해먹겠다’로 본격화된 국가운영의 최고 직책인 대통령직의 위기는 ‘재신임 받겠다’ ‘불법대선자금이 상대방의 10분의 1이 넘으면 정계를 은퇴하겠다’로 절정에 다다랐다. 그러는 동안 취임 초 80%가 넘던 대통령 지지도는 불과 7개월여 만에 최저 16.5%까지 곤두박질쳤다.

지난 두 해에 걸쳐 일어난 이러한 이변과 소용돌이의 한복판에는 노무현이란 한 정치인이 있었다. 노무현, 그는 도대체 누구인가.

노무현의 눈물

지난 대선당시 홍보전은 노무현측이 이회창측을 압도했다. 이회창측이 구태의연하고 판에 박은 듯한 내용과 형식의 홍보전으로 일관하는 동안, 노무현측은 CF업계에서 관록을 쌓은 광고전문가를 영입하여 눈물, 노타이 셔츠차림, 기타치며 노래부르기 등 신선한 컨셉과 세련된 포맷의 TV광고로 유권자에게 다가왔다.

정치광고에 그런 감성적 컨셉이 도입된 것은 한국의 대선 홍보전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으며 그 중에서도 압권은 단연, 눈물을 흘리는 대통령 후보-"노무현의 눈물"이었다.

한 연사의 격정적인 연설을 듣다가 한줄기 굵은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숙이는 노무현의 모습은 보는 사람들의 가슴 속을 깊이 파고들었다. 다큐멘터리적인 사실성을 강조하며 흑백화면으로 처리된 그 장면은 보는 이들의 심금을 울리면서, 그가 매우 진실하고 순수한 사람이라는 인상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노무현의 눈물은 이 때가 처음은 아니었다. 그가 초선의원이던 1988년 5공비리-광주학살 청문회 당시, 그는 당대의 권력자와 재벌총수인 증인들에게 호된 추궁성 질문을 하면서 때로 스스로의 격정을 이기지 못하는 듯 울먹거렸다.

또는 만인의 지탄을 받던 전직 대통령을 향해 국회의원 명패를 집어던지며 울분을 토하기도 했다. 이러한 상황에는 항상 TV카메라가 곁에 있었으며, 그것은 그대로 전국에 생중계되었다. 그리고 그는 무명의 초선의원에서 일약 전국적 지명도를 가진 유명정치인으로 부상하였다.

노무현의 눈물은 그 후에도 있었다. 대통령에 취임한 이후인 작년 봄, 동티모르에서 평화유지군 임무수행 중 순직한 장병의 유가족들과 만난 자리에서 희생된 군인들을 거론하다, 노 대통령은 크고 흰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찍어내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이 때에도 역시 TV카메라가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음은 물론이며, 당시는 노 대통령의 이라크파병 방침에 대한 반대여론이 거세게 일고 있던 때였다.

작년초 노무현 대통령이 당선자 시절이었던 때, 대중사우나를 출입하는 파격적인 모습을 보여 화제가 된 적이 있었다. 후보시절 내세웠던대로 역시 서민 대통령다운 소탈하고 인간적인 모습이라고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들이 있었는가 하면, 대통령 당선자 신분에는 어울리지 않는 즉흥적이고 무모한 행동이라는 비판이 제기되기도 했다.

이에 대해 노 대통령이 변호사로 활동하던 때부터 한 사무실에서 오랫동안 같이 일했으며, 서로 눈빛만 보아도 상대의 생각을 알 수 있다는 노 대통령의 20년지기 문재인 청와대 민정수석 비서관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대중사우나에 가는 것 등이 즉흥적으로 움직이는 것처럼 보일지는 몰라도 전혀 그렇지 않다. 노 당선자의 스타일이 즉흥적인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주도면밀한 사람이다. 설익은 실수를 하지 않는다. 그는 (먼저 일에 대해) 계획과 구상을 하고, 꽤 긴 시간에 걸쳐 치밀하게 준비하는 스타일이다.” (오마이뉴스 2003.1.16)

그랬다. 무명의 신인정치인 노무현을 전국적인 스타정치인으로 만들어 주었던 청문회에서의 울먹거림과 격정도, 많은 사람들의 감성을 파고들며 심금을 울렸던 대선후보 노무현의 한줄기 굵은 눈물도, 대중사우나를 출입하는 대통령당선자 노무현의 소탈한 행보도, 모두 그 것을 지켜보는 사람들의 반응을 의식하여 치밀하게 만들어진 이미지였다.

에피소드 하나

노 대통령이 취임하고 얼마 지나지 않은 작년 봄, 대통령 부인 권양숙 여사는 청와대관저에서 여성잡지 기자들과 환담을 나누던 중 자신의 골프실력이 싱글 수준이라는 것을 밝혀서 화제가 된 적이 있었다. 권 여사의 골프가 일반인에게 알려진 것은 그 때가 처음이었다.

권 여사가 수준급의 골프 실력을 쌓았다면 오래 전부터 골프를 즐겨왔을 것이고, 그 때는 노 대통령이 의뢰인이 납부해야 할 세금을 소송을 통하여 줄여주는 일을 전문으로 하는 세무변호사로서 많은 돈을 벌고 있던 시절부터였을 것이다. 지금은 골프가 대중화되어서 웬만한 중산층도 많이 즐기는 여가활동이 되었지만, 20여년 전까지만 해도 골프는 일부 부유층의 전유물이었다.

지난 대선에서 노무현 후보는 상대후보를 귀족-특권층이라고 몰아 부치며, 그에 비해 자신은 빈한한 농가에서 태어나고 상고졸업이 최종학력인 서민후보라는 점을 집중 부각시켰다. 그런데 만일 부인의 골프가 대선이전에 알려졌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의 서민 이미지에 친근감을 느끼고 서민 대통령 후보 노무현을 자신과 동일시하며, 자신들과 같은 서민출신자도 국가의 최고직책인 대통령에 도전할 수 있다는 사실에 열광하던 수많은 서민 유권자들의 표 중에서 상당부분이 날아갔을 것이다.

바보 노무현

정치인 노무현이 대통령이 되기까지 가장 큰 정치적 자산이 되었던 것은 한국사회의 오랜 고질병인 지역감정에 정면으로 도전한 정치적 이상주의자며, 원칙주의자라는 것이었다. 그는 학벌도 경륜도 심지어 집안이나 외모 같은 것까지도 다른 경선후보나 대선후보에 비해 현저하게 열악했지만, 지역감정에 맞서 싸워온 원칙주의자라는 상징으로 그 모든 것을 극복해낼 수 있었다.

노무현은 돈 잘 벌고 잘 쓰던 세무변호사 시절을 거쳐, 1980년대 초반 우연히 한 운동권 학생의 변론을 맡게 된 것을 계기로 인권변호사로 변신하게 된다. 그리고 인권변호사로서의 활동경력을 바탕으로 국회에 등원하게 되고, 초선의원 시절 벌어진 김영삼의 3당 합당을 거부했고, 결국 뒤이은 국회의원 선거와 부산시장 선거에서 연이어 낙선하게 된다.

3당합당을 거부하고 부산에서 출마했으나, 지역감정의 벽에 부딪혀 잇따라 낙선함으로써 좌절을 맛본 그는 이후 새로운 탈출구를 모색하게 된다. 부산을 떠나 지역구를 옮긴 것이다.

그는 김대중 김영삼 양 김씨가 각각 호남과 영남을 주요기반으로 한국정치의 양대주주로 군림하던 정당구도로부터 독립된 리틀민주당의 깃발을 들고, 지역감정과 비교적 무관하게 여겨졌던 서울의 종로에 출마했던 것이다.

당시 1996년 15대 총선의 종로에는 김영삼이 이끄는 신한국당의 이명박, 김대중이 이끄는 새정치국민회의의 이종찬이 출마했다. 그런데 이종찬은 그전까지 민정당 민자당을 거치며 줄곧 여당 소속으로 종로에서 당선되었던 인물이다. 따라서 그가 비록 야당인 국민회의로 옮겨왔으되 전통적인 여당성향의 표는 이종찬과 당시 여당후보였던 이명박이 나누게 되고, 노무현은 그 틈새에서 (이전까지 줄곧 여당의원이었던 이종찬에 대한 거부감으로 방황하게 될) 전통적인 야당성향의 표를 노리고 당선을 기대해볼 만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노무현은 당세가 월등한 상대정당들과 또한 당시의 그에 비해 경륜과 중량감에서 월등했던 상대후보들에 밀려 결국 여기에서도 낙선하고 만다. 그 후 한계를 절감한 그는 당시 대선을 앞두고 ‘지역감정의 극복보다 정권교체가 우선’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김대중이 이끄는 새정치국민회의에 합류하게 된다. 그리고 김대중이 대통령에 당선됨으로써 새정치국민회의는 집권 여당이 된다(1998년 2월).

그 후 이종찬은 김대중 정부의 국가정보원장으로 입각하게 되고, 종로의 당선자였던 이명박은 선거법위반으로 의원직을 사퇴하게 된다. 뒤이어 1998년 7월에 치러진 종로의 보궐선거에서 노무현은 새정부의 장관으로 재직중인 이종찬을 대신하여, 직전 선거에서 그 지역에 출마했던(당시 리틀민주당 후보) 연고권을 기반으로 집권당인 새정치국민회의의 공천을 받게된다.

당시 한나라당(신한국당의 후신) 공천자는 무소속으로 출발하여 김종필의 공화당을 거쳐 한나라당에 몸담고 있던, 종로의 단골 출마자이며 무명의 정치신인 정인봉이었다. 노무현은 이전 선거에서의 막강한 경쟁자들이 사퇴와 입각으로 사라진 보궐선거에서 무명의 정치신인을 상대로하여 거저 줍다시피 의원직에 당선된다. 그리고 초선의원시절 4년이후 6년간의 긴 공백끝에 2년간의 짧은 의정생활로 복귀한다.

그 후 노무현이 대선후보로 부상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던 2000년 16대총선이 다가온다.

이 때 노무현은 종로를 떠나 부산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그는 결국 그 선거에서도 낙선하고 만다. 그리고 그는 “지역감정의 벽에 맞서 싸우기 위해 당선이 보장된 종로를 버리고, 낙선할 줄 뻔히 알면서도 부산에 출마했다가 장렬히 전사한 우직한 원칙주의자”로 대중에게 다가오게 된다.

과연 노무현은 지역감정에 맞서 싸우기 위해 “당선이 보장된” 종로를 버렸던 것일까.

1999년 5월 국정원장직을 물러난 이종찬은 당(새정치국민회의)으로 복귀하고, 차기총선 출마를 준비하게 된다. 이종찬은 1981년 11대총선이래 1992년 14대총선에 이르기까지 종로에서 연속 4선을 기록한 그 지역의 이른바 정치적 터줏대감이었다. 뿐만 아니라 당시 집권당의 장관을 지냈으며, 이전에는 대통령선거에도 출마한 적이 있는 거물 정치인이었다.

또한 이종찬과 노무현이 함께 출마했던 96년 총선 종로에서 노무현은 이종찬에 비해 현저히 뒤지는 득표력을 보였었다 (1위 이명박 40.5%, 2위 이종찬 33.1%, 3위 노무현 17.4% - 자료:중앙선거관리위원회). 이런 상황에서 노무현이 타지역에서 옮겨와 98년 보궐선거에서 이종찬이 출마할 수 없었던 상황에서 거저 당선되다시피한 것을 가지고 종로의 연고권을 주장하며, 이종찬을 제치고 당으로부터 종로의 공천을 받을 수는 없는 것이었다. 결국 노무현은 1999년 8월, 종로를 떠나 부산으로 돌아가겠다는 공식입장을 밝히기에 이른다(연합뉴스 1999. 8.23).

노무현은 ‘당선이 보장된’ 종로를 자신의 적극적 의사로 버린 것이 아니었다. 당선은 고사하고 “소속 정당의 공천을 받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종로를 떠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 후 그가 부산이 아닌 어떤 대안을 선택할 수 있었을까. 공천과 당선가능성만을 쫓아 수도권의 다른 어떤 지역을 찾아 나선다는 것은 명분도 실리도 얻지 못하는 초라한 3류 정치인으로 전락하는 길이었을 것이며, 말 그대로 무모한 정치적 자살 행위였을 것이다.

노무현은 과연 “낙선할 줄 뻔히 알면서도” 부산으로 돌아갔던 것일까.

노무현의 2000년 16대총선 부산출마에서는 한가지 중요한 변화가 있었다. 이전의 부산선거에서 연속 출마했던 ‘동구’가 아닌 “북구강서구을”로 부산내에서 지역구를 옮겼던 것이다.

동구는 부산의 중심지에 있는 지역구로 그가 초선의원으로 당선된 1988년 13대총선, 낙선했던 1992년 14대총선에 연속해서 출마했던 곳이다 (이후 95년 부산시장선거 낙선, 96년 15대총선 종로낙선, 98년 종로보궐선거 당선이 이어진다).

북구강서구을은 당시 선거구 조정으로 통합신설된 부산과 경남의 경계선상에 있는 부산외곽의 도농복합 지역구로서, 당시에 삼성자동차 녹산공단 부산신항 등 중앙정부의 지원이 필요한 거대 지역현안이 산적한 곳이었다(연합뉴스 1999.8.23).

부산은 그때까지 오랫동안 여당소속 정치인이 당선되어온 도시였고, 노무현은 비록 김대중정부였지만 당시 집권여당의 부총재였다. 그리고 보궐선거에서 거저 당선되다시피 했지만, 어쨌든 수도 서울의 한복판에서 당선된 현역 국회의원으로서 고향으로 돌아온 입장이었다.

노무현은 ‘낙선할 줄 뻔히 알면서도’ 지역감정에 맞서 싸운기 위해 부산에서 다시 출마했던 것이 아니었다. 부산내에서 지역구를 변경하기도 하고, 이전의 부산선거에서 연이어 낙선할 때와는 여러가지로 달라진 조건과 환경을 바탕으로 “당선을 충분히 기대해볼 만한 상황에서” 부산에 출마했던 것이다.

2000년 총선당시 노무현은 소속 정당의 공천 자체가 불가능한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종로를 떠날 수 밖에 없었고, 다른 대안을 찾을 수 없었던 그는 나름대로의 충분한 당선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부산으로 돌아갔던 것이다. 그러나 그 것이 그의 이전 부산선거(92총선- 95시장선거) 연속낙선에 오버랩되면서, 2000년 부산낙선 역시 그 이전 부산출마 때와 마찬가지의 지역감정에 맞서는 싸움으로 포장되고 또 그렇게 오해되었을 뿐이다.

적어도 3당합당을 거부하고 이후 두 차례 연속 부산선거에서 낙선할 때까지, 그가 정치적 이익을 위해 불의와 타협하지 않은 원칙주의자이며 지역감정의 벽에 정면으로 도전한 이상주의자였다는 것은 맞다. 그러나 연이은 낙선에 좌절하고 부산을 떠나 서울의 종로로 옮길 때부터 이미 그는 더 이상 지역감정에 맞서 싸우는 투사가 아니었으며, 다만 정치적 생존을 위해 부심하며 당선가능성을 쫓아 좌고우면하는 평범한 정치인의 길을 걸어갔던 것이다.

그러나 정치권의 메커니즘과 지역구 내부사정 등을 소상히 알 리 없는 대중들에게 2000년 부산에서의 낙선은 ‘지역감정에 맞서 싸운 이상주의자의 아름다운 희생’, ‘실리를 버리고 명분을 쫓아 불가능에 도전한 우직한 원칙주의자의 장렬한 순교’로 다가왔다.

이전 부산선거에서 지역감정의 벽에 부딪혀 연이은 낙선으로 좌절하고 서울로 도피했던 그가 새삼스럽게 다시 지역감정에 맞서 싸우기 위해 부산으로 내려간다는 것은 내세우는 명분이나 포장이었을 뿐, 이미 그 허구성을 내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노무현은 자신의 또 한번의 부산낙선을 지역감정에 맞선 희생이나 순교로 과시했고, 대중들은 그렇게 받아들였던 것이다.

그 후 그에게는 ‘바보’라는 별명이 붙여졌으며, 그 것은 비하의 의미가 아니라 오히려 애정과 신뢰 존경의 마음까지 담긴 일종의 역설적 애칭이었다. 자신에게 불이익이 있게 될 줄 뻔히 알면서도 바보같이 올바른 길을 쫓아 걸어간 우직한 원칙주의자라는 상징이었던 것이다. “바보 노무현”의 상징은 노무현측의 적극적 선전에 의해서든, 대중들 스스로의 오해에 의해서든 그렇게 만들어졌던 것이다.

그렇게 조작된 상징의 현실적 결과물 중의 하나로 ‘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노사모)’가 탄생한다. 노무현이 2000년 총선의 부산선거에서 낙선하자, 그의 인터넷 홈페이지에 한 네티즌이 격려의 글을 남긴 것이 계기가 되어 정치인 최초의 팬클럽인 노사모가 결성되었던 것이다. 물론, 이 과정에 노무현측의 어떤 인위적 개입이 있었는지는 아직까지 확인된 바 없다.

노사모는 그 후 새천년민주당 대통령후보 경선과정의 결정적 승부처였던 이른바 광주대첩에서 노무현 후보의 승리를 이끌어내는데 큰 역할을 했다. 그 것을 기점으로 노사모는 더욱 세를 불리면서 이후의 경선과정은 물론, 대통령선거 과정에서도 대통령 노무현을 만드는데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당시 왜 이러한 조작된 상징의 허구성에 대한 문제제기가 없었을까.

대선후보 경선이 치러지기 직전까지, 노무현은 대선은 물론이고 당내 후보경선에서도 승리할 가능성이 거의 없었던 변방의 정치인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대통령후보 경선을 앞두고 있던 민주당내에서는 대세론의 중심에 있던 이인제, 당내 최대계파의 수장인 한화갑, 70-80년대 민주화운동의 적장자인 김근태 등 기라성 같은 후보들이 버티고 있었다. 그리고 노무현은 그저 자신의 정치생명을 이어가기 위해 더 높은 단계에 도전해보는 여러 경선후보중의 하나로 취급될 뿐이었다.

많은 사람들의 관심은 유력하다고 여겨졌던 후보들에게 집중되었을 뿐, 대선은 물론 당내경선에서의 당선가능성조차 없다고 여겨졌던 변방의 후보 노무현에 대해 특별히 문제제기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는 사이 그는 노사모의 열렬한 뒷받침을 기반으로, 한국정치사상 처음으로 실시된 국민경선의 예측못할 바람을 타고 대선후보 자리에 올랐다.

이후 후보단일화 움직임 등 여러 우여곡절이 있긴 했으나, 수구냉전 세력에 맞서는 개혁평화 세력의 대표자로 나서고 있는 그에게 개혁세력은 더 이상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그는 수구세력의 재집권을 막아야 한다는 시대적 열망을 타고 그렇게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대중민주주의의 빛과 그림자

지난 2년간 한국에 커다란 이변과 소용돌이를 불러왔던 것 만큼이나, 정치인 노무현은 대통령 취임이전과 취임이후에 많은 면에서 근본적인 변화를 보였다.

‘반미면 어떠냐’는 당당한 자주외교는 “정치범 수용소”의 굴욕적 사대외교로 바뀌었다. 대선당시 상대후보에게 ‘전쟁이냐 평화냐’를 들이대던 평화주의자는 “이라크파병”의 침략전쟁 참가자로 변했다.

지방자치연구소를 운영하던 ‘풀뿌리 민주주의자’는 부안사태의 음모적이고 폭압적인 “지배자”로 바뀌었다. 파업현장을 찾아다니던 ‘노동자의 벗’은 생존의 벼랑 끝에 내몰려 분신으로 절규하는 노동자들을 향해 “지금은 분신으로 투쟁하는 시대가 아니다”라고 싸늘하게 내뱉는 냉혹한 “권력자”로 변했다.

이러한 것들은 단순히 스타일의 변화가 아니다. 일개 국회의원에서 국정의 총책임자인 대통령으로 역할이 바뀐 것에서 비롯되는 변화도 아니다. 그 것은 철학의 변화이고, 본질의 변화이다. 또한 그 것은 철학과 본질의 변화도 아니다. “눈물”과 같은 이미지 메이킹과 “바보”와 같은 상징조작에 가려져있던 원래의 본질이 집권자가 된 이후 비로소 드러난 것이다.

대통령 취임이후 지난 1년간의 배신과 국정의 난맥, 실정과 무능에서 드러났듯이 철학과 경륜이 부족했던 정치인 노무현은 감성적 이미지 메이킹과 정치적 상징조작으로 대중들의 지지를 획득했다. 그리고 그 것을 기반으로 국가 최고지도자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노무현이 대통령이 될 수 있었던 데에는 허구적 이미지와 조작된 상징에 현혹된 유권자 대중의 무지와 오해가 주된 동인이었으며, 또한 그 것을 둘러싼 객관적인 국내외 정세가 반영되고 있다. 수구냉전 세력의 대표자로 나선 이회창 후보의 이전 대선에서 검증된 바 있는 당선권에 근접한 득표력은 국내 개혁평화 세력에게 수구세력의 재집권에 대한 위기감을 촉발했다. 거기에 더해 미국의 부시대통령 등장으로 초래된 신보수주의의 국제정세는 미국의 직접적인 영향력하에 있는 한국에서 수구세력의 재집권을 막아야 한다는 시대적 열망을 더욱 증폭시킨 역설적인 요인이 되었던 것이다.

정치인 노무현은 대중들의 몰이해에 의해 대통령후보가 되었고, 이미 후보가 되고 난 다음에는 그 것에 이의를 제기할 수 없을 만큼 국내외의 상황이 절박했던 것이다.

또한 이미지와 상징은 풍부했으나 경륜과 철학은 부족했던 정치인 노무현을 자신들의 대표자로 내세웠을 정도로, 수구세력과의 정치-사회적 역관계에서 개혁세력의 정치적 역량과 대중적 기반이 그만큼 허약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개혁세력이 자신들의 대표자로 알고 모든 노력을 다해서 만든 새로운 대통령이 수구세력이었던 것이다.

21세기 초입 한국에서 이미지와 상징의 대중정치인 노무현이 집권한 것은, 인류역사의 장구한 진행 끝에 현시대에 이르러 최선의 보편적 정치체제로 정착한 대중민주주의가 어떻게 중우(衆遇)정치로 변질될 수 있는 가를 보여주는 생생한 사례이다. 그 것은 앞으로 국내외 관련학계에서 대중민주주의의 빛과 그림자를 조명하는 하나의 연구사례로 널리 인용될 것이다. 
 
* <주장과 논쟁>란은 네티즌들이 만들어가는 코너입니다. 많은 참여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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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4/02/25 [23:51]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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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돌 2016/10/20 [10:06] 수정 | 삭제
  • 모든 정치인에게 공과 과가 있습니다.노무현 전대통령에게는 국정원, 검찰을 악용 안하려고 노려하고 권위주의를 타파하려는 오기가 있었죠. 쉬운 거와 타협 안했죠. 만일 조갑제씨가 지금 정권에서 그렇게 군을 선동하는 발언을 했다면 아마 감옥에 있겠죠. 그게 현 정권과 노무현정부의 차이입니다.즉 비판을 허용하는 열린 사회라는 거죠.
  • 지돌 2016/10/20 [09:29] 수정 | 삭제
  • 너무 편협된 의견이네요
  • 잘 썼습니다 2004/07/08 [15:04] 수정 | 삭제
  • 무조건 노비어천가나 외쳐대는 서프라이즈 광신도들이
    보아야 할 글로 사료되오.

    건필 하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