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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진 초이와 미국서 만난 안창호, 실화라면?
<미스터 션샤인>에 등장한 애국의 표상, 도산 안창호는 누구인가
 
이영일   기사입력  2018/09/29 [20:11]

"안가() 창호요."

 

지난 16일 방송된 tvN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 22회에서 유진 초이(이병헌)와 도산 안창호(박정민)선생이 만나는 모습이 화제를 모으며 새삼 안창호 선생에 대한 관심이 뜨겁다. 16.6% 시청률을 올리며 고공행진을 하고 있는 드라마의 폭발적 인기에서 연유한 것도 있지만, 구한말 고종을 위협하며 나라를 팔아먹는 정미칠적의 매국 행위와 국권 찬탈 과정이 세밀히 묘사되는 울분의 스토리 전개 앞에서 애국자의 표상인 청년 안창호의 등장은 그 어떤 장면보다 무게감이 있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유진초이와 청년 안창호의 만남은 픽션으로 설정되었지만, 유진초이가 미 해병대라는 신분만 빼고는 이런 만남은 실제였을지도 모른다. 안창호가 가진 애국적 상징성과 실제 활약상을 보면 전혀 불가능한 일도 아니기 때문. 여튼, 언제 독립운동가들이 인터넷 검색 실시간 1위를 차지한 적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이유야 어찌되었건 안창호에 대한 관심은 흥사단 단원인 필자로서는 그지없이 감격스럽기 짝이 없다.

 

안창호와 유진초이의 인연을 실화라 가정한다면?

 

▲ 지난 16일 방송된 tvN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 22회에서 유진 초이(이병헌)와 도산 안창호(박정민)선생이 만나는 모습     © tvN

 

 

도산 안창호 선생(1878. 11. 9~1938. 3. 10)은 평남 강서군에서 출생, 청일전쟁이 발발하자 우리 땅에서 남들이 싸우고 그 피해는 고스란히 우리가 받는 처절한 광경을 보고 깨달은 바 있어 1895년 상경한다. 신미양요(1871) 때 미국으로 간 소년 유진초이가 미 해병대 대위가 되어 조선으로 돌아와 있을 무렵과 비슷한 시기다.

 

1897년에 독립협회에 가입하고 평양에 지부를 설치하기 위한 만민공동회에서 그 유명한 쾌재정(快哉亭)연설로 대중들에게 깊은 감동을 준 안창호는 1902년 부인과 미국으로 향한다. 국내에서는 러일전쟁의 혼돈과 일제의 식민지 야욕이 가중되던 시기에 유진초이가 활약했고 미국에서는 안창호가 조국 광복을 목표로 한 공립협회를 창립해 활약하고 있었다.

 

드라마에서 유진초이가 군법으로 3년형을 선고받고 풀려나던 것이 1907년인데 안창호는 을사5조약과 한국통감부 설치에 대응하기 위해 리버사이드에 대한인신민회를 결성하고 1907220일에 국내로 귀국하였으니 이들은 19071~2월 사이에 뉴욕에서 만날 가능성이 크다. 안창호는 왜 뉴욕에 있었을까?

 

▲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원 성립기념 사진 (1919. 10. 11)     © 도산안창호기념관

 

아마도 안창호는 콜롬비아대학교에서 공부하던 우리 독립운동가들과 국내에서의 독립투쟁을 논의하러 가고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실제 그는 일본 동경을 거쳐 국내로 들어와 비밀결사조직인 신민회를 결성하여 본격적인 구국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했고 1909년에는 흥사단의 전신인 청년학우회, 1912년 대한인 국민회, 1913년에 흥사단, 1928년에 한국독립당을 차례로 조직한다.

 

안창호는 2015년 개봉한 영화 <암살>에 등장하는 의열단이 1919년 이후 식민통치기구 파괴공작을 전개하는데도 중추적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동시에 미국에서 흥사단원 김종림이 1920년 캘리포니아주 윌로우스에 한인비행학교를 설립, 공군 조종사를 훈련시키는 데에도 깊숙이 관여한 것으로 추측된다.

 

1931년 일제가 만주를 침략하자 본격적인 반일 투쟁을 위해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을 결성하려던 도산은, 이듬해 일경에 의해 체포되어 국내로 끌려왔으며 두 차례의 옥고를 치른 끝에 결국 해방을 보지 못하고 1938310일 세상을 떠난다.

 

2, 3의 유진초이를 길러낸 안창호 

안창호 선생은 말 그대로 오로지 나라와 겨레를 위한 삶을 살아가면서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의 사상적 독립투쟁 방향을 제시하고 영향을 주었다. "밥을 먹어도 대한의 독립을 위해, 잠을 자도 독립을 위해" 노력하다가 마침내 두 차례의 옥고를 치른 끝에 타계한 안창호의 존재는 <미스터 션샤인>의 등장인물과도 일맥상통한다.

 

안창호 선생이 서거한 지 80. 도산은 국민들의 가슴을 아프게 사로잡은 드라마에서 화려하게 복귀했다. 그가 새삼 이렇게 조명받는 것이 드라마에서뿐만이 아니길 필자는 바란다. 그가 창립한 흥사단은 아직도 건재함을 넘어 왕성한 활동을 전개하고 있고 무실역행(務實力行)을 근간으로 하는 흥사단 정신은 21세기 시민사회의 NGO지도자들에게까지 큰 영향을 주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직도 우리 사회에는 일제 잔재의 완벽한 청산이 이루어지지 않았고 조국을 위해 죽어간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의 후손들이 폐지를 줍고 택시를 운전하며 살고 있다. tvN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이 이토록 인기를 모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잊고 있었던, 분노해야 하지만 무뎌져 망각하고 있었던 아픈 우리의 사랑과 역사가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까지 계속 이어지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경희대NGO대학원에서 NGO정책관리학을 전공했다. 대학 재학 시절 총학생회장과 문화일보 대학생기자, 동아일보e포터 활동을 했고, 시민의신문에서 기자 교육후 오마이뉴스 시민기자, 중앙일보 사이버칼럼니스트, 한국일보 디지털특파원, 보도통신사 뉴스와이어의 전문칼럼위원등으로 필력을 펼쳤다. 참여정부 시절 서울북부지방법원 국선변호감독위원, 대통령직속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자문위원, 국무총리실 삼청교육피해자보상심의위원등 다양한 민간위원을 역임했다. 2015년 3월, 사회비평칼럼집 "NGO시선"을 출간했고 각종 온오프라인 언론매체에서 NGO와 청소년분야 평론가로 글을 써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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