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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시 승려의 힘, 호국불교 조명했다
[책동네] 진관 스님의 '조선승군의 임진왜란 참여 연구'
 
김철관   기사입력  2017/11/26 [13:16]
▲ 표지     ©


임진왜란 시기 조선을 구하고자 나섰던 승군들의 호국정신을 고찰한 책이 나왔다.

 

불교인권위원장 공동대표인 진관 스님(문학박사)이 펴낸 <조선승군의 임진왜란 참여연구>(2017년 11월, 한강)는 호국불교의 역사를 휴정·의엄·유정·처영·영규 스님을 중심으로 고찰한 책이다.

 

선조(25년)는 임진왜란이 한창이자 그해 7월 1일 승군을 지휘할 수 있는 최고 승통으로 묘향산에 거주하고 있는 휴정을 임명한다. 휴정은 제자인 의엄·유정·처영 등을 승군의 장수로 삼았다.

 

불교의 정선이 불살생인데 승려들이 칼을 들고 살생을 해야한다는 점이 아이러니한 일이지만, 위기의 조국을 지키기 위해 금계를 어기고 조국백성을 위해 전장에 나섰다. 이 시기 조선에서 불교를 탄압하고 있을 때, 일본 사신으로 승녀 현소가 등장한다.

 

현소는 조선에서 불교를 인정하지 않고 있는 것을 알았고, 조선에서 불교를 회복하면 강력한 힘을 가지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는 선조 앞에서 불교에 대한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실제로 현소는 승려의 역할이 아니라 일본을 대표하는 사신이었기 때문이었다.

 

충청도에서 승군을 조직한 영규는 청주성을 탈환하고 의병들과 금산전투에 참여해 자신의 육신을 조국에 바친 승려이다. 전쟁 반발 4개월이 지났는데도 일본이 점령한 청주성을 회복하지 못하자, 계룡산 갑사에 거주하고 있던 영규가 승군 700명을 이끌고 의병 조헌과 함께 청주성을 공격해 탈환한다. 이후 이들은 금산전투에 참여했다가 700여명의 승군과 의병들이 전원 전사했다. 영규 스님도 이때 전사한다.

 

이렇게 조선 승군들은 전투에 직접 참여했을 뿐 아니라 성축조, 군량미 나르는 역할, 화살을 만드는 일도 거뜬히 해냈다.

 

선조 25년 4월 17일 삼도순변사 신립이 충주전투에서 패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선조 25년 5월 3일 선조가 개성부에 있을 때 일본군에 의해 경성이 함락됐다. 선조 25년 9월 12일 금산전투에서 영규가 전사한다.

 

시대별로 승군들의 역할을 보면 선조 26년 2월 12일 승통 휴정이 평양전투에 참여해 평양성을 수복했다. 선조 25년 3월 27일 승장 유정에게 선종·교종 판사를 제수해 전국 승군을 통제할 수 있는 권병을 준다. 조선 백성을 버리고 몽진했던 선조(26년)가 5월 1일 다시 경성에 돌아온다. 그해 5월 15일 선조는 도총섭 휴정을 당상관에 제수했지만 노승이라는 이유로 대우를 해주지 않았다. 하지만 휴정의 제자들에게 그 공이 돌아갔다.

 

선조 27년 2월 20일 비변사에서 조총사용법 전습, 승군 통섭 등을 건의했다. 승장 유정은 경상도에서 군량미를 마련키 위해 조달운동을 전개했다. 이 때 유정 휘하 승군들은 조국수호에 총력을 다했다. 경상도 승군은 해인사에서 궁전을 만드는 일을 하기도 했다. 선조(27년)는 3월 28일 총섭승 유정에게 승군의 훈련을 명했다. 선조(27년)는 7월 8일 항해도 총섭승 의엄의 역할을 찬양했다. 선조 27년 11월 1일 승장 유정에게 첨지중추부사를 임명했다.

 

선조(29년)는 4월 12일 팔도 선교종 도총섭 의엄의 상소문을 발표한다. 선조 29년 9월 12일 승장 유정이 남한산성에 거주해 승군활동을 이어갔다. 선조 30년 1월 21일 가등청정이 바다를 건너와 일본과의 2차 전쟁이 시작됐다. 선조 30년 원균이 지휘한 수군이 패했고, 선조 30년 7월 도원수 권율이 올린 한산도 군사사항 상소에 따라 권율은 이순신의 파견을 선조에 건의했다. 이로써 수군통제사 이순신은 선조 31년 10월 13일 명랑해전에 참여한다.

 

선조 31년 11월 이순신이 전사한다. 이순신은 전사했지만 일본 해군의 전몰은 조선 주둔의 명분을 상실했고, 일본에서는 풍신수길과 덕천가강이 권력다툼에서 덕천가강이 권력을 장악해 일본군 철수는 필연이었다.

 

한마디로 일본군의 철수는 조선군이 독자적으로 철수하게 한 것이 아니었고, 명군의 협력도 아니었다. 일본 풍신수길의 사망으로 인해 조선에서 전쟁에 대한 명분이 없었다. 그리고 덕천가강의 등장으로 인해 조선을 침공할 명분이 없어 끝내 철수하게 된 것이다.

 

7년의 전쟁이 끝난 후 승군 도총섭인 유정은 일본에 통신사로 파견돼 일본의 덕천가강을 만나 조선인 포로 3000여명을 귀국시키기도 했다.

 

승군들은 국가(조선)에서 불교를 탄압했는데도 불구하고 국가의 위기를 맞이해 전쟁에 참여한 반면, 불교를 위기로 몰았던 대부분의 유생들은 전쟁에 직접 참여하지도 않았고, 당시 한 점의 반성도 하지 않고 있었다는 점은 비판 받아야 할 대목이다.

 

전쟁이 끝나고 한동안 승군은 조국을 위해 싸웠지만 국가로부터 인정받지 못했고, 오히려 전쟁이후 승려들에게 도성을 출입하지 못하게 하는 금지조치를 당했다. 승과제도도 주어지지 않았다. 승려의 지위를 얻으려면 노역을 수행한 후, 도첩을 받아야 했다. 선조는 임진왜란 시기에 활동했던 조선불교에 대해 아무런 역할도 수임하지 못했다.

 

선조(41년)는 2월 1일 세상을 떠난다. 선왕의 유고로 1608년 2월 2일 광해군이 어좌에 올랐다. 힘겨운 시기인 임진왜란 때 세자로 책봉돼 소임을 다했고, 마침내 임금에 오른 광해군은 유정에게 승장의 호칭을 부여했고, 승군에 대해 호칭을 줌으로써 불교의 중요성을 인식했다.

 

광해 1년, 선조 때 활동이 많아 늙은 승장 유정이 병에 걸리자 약을 지어 보냈다. 광해2년 9월 23일 승군들에게 단종의 묘를 지키라고도 했다. 그해 9월 28일 승통 유정이 열반에 들자 광해는 장례식에 필요한 물품을 보냈다. 하지만 광해 시대에도 승과시험이 치러지지 않았다. 광해의 정치력을 보면서 조선불교계는 방향을 새롭게 설정하면서 발전했어야 했다. 하지만 조선불교는 회복하지 못하고 승군의 형태로 전승하는데 머물렀다. 조선불교계가 자신들의 역할에 대해 철저히 준비하지 못한 이유이기도 했다.

 

이 책은 조선 선조 25년 일본이 조선을 침략한 임진왜란시기 승군들의 역할을 기록했다. 왜란이 일어나자 국왕인 선조는 도성을 버리고 한양성을 떠났다. 이를 접한 민중들은 도성에 불을 지르면서 폐허로 만들었다. 이 시기 선조는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한다. 세자는 전장에 나가 나름 역할을 수행한다. 이 때 조국을 지키기 위해 승군과 의병이 일어나 전투에 참여했다. 특히 이 책은 전쟁 중 승군들의 활동을 조명하고 승군들의 참여와 역할에 대해 자세히 적고 있다.

 

저자 진관 스님은 동국대에서 철학박사와 중앙승가대학에서 문학박사를 받았다. 현재 불교인권위원회 공동대표이고, 동방문화대학원 석좌교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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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7/11/26 [13:16]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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