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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와 이슬람교, 어느 쪽이 더 호전적인가?
[류상태의 종교산책] 이혜훈 의원의 왜곡된 이슬람 인식, 너무나 위험하다
 
류상태   기사입력  2017/09/22 [16:45]

 “이슬람은 정말 무서운 종교입니다.”

 

“무슬림들은 기독교인들만 찾아내서 핀셋으로 뽑아내듯이 기독교인들을 처형시키고 있어요. 그런데 이 사람들은 왜 그러느냐? 알라의 명령이라는 거예요. 분명히 그분들이 얘기하는 경전에 의하면 기독교인들을 죽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얼마 전까지 바른정당 대표를 지냈던 이혜훈 의원이 한 말이다. 나는 이런 말들이 담긴 그의 동영상을 우연히 보게 되었다. 이슬람 관련 자료를 찾아 인터넷 서핑을 하던 도중 그가 어느 교회단체에서 한 것으로 보이는 간증 동영상이 있어 호기심에 보게 된 것이다.

 

이혜훈 의원은 독실한 기독교 신자지만 우리나라 국회의원이기도 하다. 이런 사람이 17~18억 인구가 믿는 세계종교에 대해 이런 인식을 갖고 있을 뿐 아니라 (비록 교회 조직 내에서 발언한 것으로 보이기는 하지만) 대중 앞에서 자신의 부정확한 인식을 거르지 않고 발표했다는 사실에 안타까움을 넘어 두려움마저 느낀다.

 

아마도 그의 인식은 오늘날 한국의 주류 기독교인들이 갖는 보편적인 생각과 같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인식이 과장되고 왜곡되어 있다는 걸 증명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참고로, 그의 간증 동영상은 2016년 3월 23일자 <이슬람 실체 간증>이라는 제목으로 유투브에 올려져 있다. (https://www.youtube.com/watch?v=dEKop5KG2WA)

  

1. 이혜훈 의원이 인용한 꾸란 구절과 실제 꾸란의 내용 비교

 

해당 동영상에서 이혜훈 의원은 꾸란을 인용하며 이슬람이 “얼마나 무서운 종교인지” 설명하고 있다. 나는 그의 주장을 실제 <꾸란>(‘코란’이 표준어지만 무슬림은 ‘꾸란’이라고 정확하게 발음하기를 원하기에 그들의 의사를 존중하는 의미에서 ‘꾸란’으로 표기함을 양해해 주시기 바란다)과 비교하면서 그가 이슬람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 아니면 잘못 알고 있거나 왜곡하고 있는 것인지 독자들이 객관적으로 비교 검증할 수 있도록 하겠다.

 

비교본으로는 ‘파하드 국왕 꾸란 출판청’에서 발간한 <성 꾸란 - 의미의 한국어 번역>을 택했다. 나는 이 책을 몇 년 전에 구입하여 직접 갖고 있다. 하지만 내가 갖고 있는 <꾸란>은 무슬림으로부터 정본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꾸란 해설서’로 취급받는다. (사실상 꾸란의 한국어 번역본이지만 무슬림은 아랍어 꾸란만 정본으로 인정하고 외국어로 번역된 것은 ‘꾸란 해설서’라고 주장한다.)

 

이혜훈 의원은 꾸란을 인용하면서 1장 8절에 “기독교인과 단절한다”는 구절이 있다고 말했다. 그는 “무슬림은 하루에 매일 5번씩 기도하는데 그때마다 ‘기독교인과 단절한다’고 고백하도록 교육받고 있다며 이 구절이 꾸란 1장 8절에 나온다고 말한 것이다. 하지만 꾸란 1장은 7절에서 끝난다. 8절은 없다.

 

그는 또 4장 91절을 인용하면서 “너희가 어디서 그들을 발견하든지 그들을 살해하라. 이들에 대해 알라께서 너희에게 권한을 부여하였노라.”라고 기록되어 있다고 말했다.

 

그의 간증을 듣는 교인들, 즉 “너희가 어디서 그들을 발견하든지 그들을 살해하라”는 말을 듣는 사람들은 살해당할 대상이 기독교인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꾸란 4장 91절은 이렇게 되어 있다.

 

“한편 너희로부터 안전함을 꾀하고 그들의 부족을 안전케 하려는 또 다른 위선자의 무리를 발견하리니 그들이 돌아가 불신할 때마다 패배할 것이라. 만일 그들이 너희로부터 물러서지 아니하고 또 평화를 제안하지 아니할 때는 너희가 어디서 그들을 발견하던 그들을 포획하여 살해하라. 이는 하나님이 너희를 위해 그 권한을 부여하였노라.”

 

내가 갖고 있는 꾸란 해설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에 대해 역사적 배경을 설명하고 있는데, 본문이 살해하라고 말하는 ‘위선자의 무리’에 대해 다음과 같은 해설을 곁들이고 있다.

 

“또 다른 위선자들이 있으니 ‘아싸드’와 ‘가뜨관’이 대표적 인물이었다. 이들은 메디나에 와서는 이슬람에 귀의한 후 무슬림들 사이에서 안전하게 살 것을 맹세하였으나 그들 백성들에게로 돌아가면 그들 사이에서 안전하게 살기 위해 다시 불신하면서 그들의 맹세를 위반하였다. (사프와트 타파씨르 제2권. p.116-117).”

 

이상의 본문과 해설에 의하면, 꾸란 4장 91절은 무함마드의 전사들이 메카의 기득권자들과 싸우던 당시 사회의 역사적 배경 아래서 주어진 말씀이다. 그 역사적 맥락을 무시한 채 “기독교인을 살해하라”는 일반적인 명령으로 해석하는 것은 엄청난 비약이고 왜곡이다. 

 

이혜훈 의원은 8장 12~17절의 긴 내용을 간추려 이렇게 소개하기도 했다.

 

“그들의 목을 치고 그들의 손가락을 자르라. 그들을 살해하는 것은 너희가 아니라 알라께서 그들을 멸망시킨 것이라.”

 

여기서도 그가 인용한 내용을 듣는 사람들은 ‘목을 치고 손가락을 잘라 살해해야 할 대상’이 기독교인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정확한 내용을 알기 위해 이제부터 12~17절 내용을 하나하나 짚어보자.

 

12절 - “그대의 주님께서 천사들에게 말씀으로 영감하여 나는 너희와 함께 있으니 신앙인들에게 확신을 줄 것이며 내가 불신자들의 마음을 두렵게 하리니 그들의 목을 때리고 또한 그들 각 손가락을 때리라.”

 

위의 본문에 ‘불신자’라는 단어가 등장하고 “그들의 목과 손가락을 때리라(치라)”는 내용이 나온다. 그러나 이 ‘불신자’를 ‘기독교인’이라고 해석하는 것 역시 비약이고 왜곡이다.

 

본문이 말하는 불신자들은 일차적으로 무함마드 당시 이슬람을 배척하고 무함마드의 추종자들과 전투를 벌였던 메카의 부유한 상인들과 귀족 계급, 즉 하나님(알라)의 계명을 받아들이지 않은 기득권자를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어지는 내용 역시 이슬람을 거부했던 당시 메카의 기득권자들을 대상으로 말하고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3절 -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과 선지자를 거역했기 때문이라. 하나님과 선지자를 거역하는 자에게는 하나님께서 무거운 벌을 내리시니라.”

14절 - “너희를 위한 벌이 있나니 그것을 맛보라. 실로 불신자들을 위해서는 유황의 벌이 있노라.”

15절 - “믿는 자들이여 너희가 싸움터에서 불신자들을 만날 때 그들로부터 너희의 등을 돌리지 말라.”

16절 - “그러한 날에 등을 돌리는 자는 그것이 전쟁을 위한 준비나 어떤 무리에 합류하려는 의도가 아니라면 이는 분명 하나님의 분노를 자아낼 것이며 그의 주거지는 지옥이 되리니 최후가 저주스러우리라.”

17절 - “그들을 살해한 것은 너희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들을 멸망케 하였으며 그들에게 던진 것은 너희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던지셨음이라. 이는 훌륭한 시험으로 믿는 자들에게 은혜를 베풀고자 함이니 실로 하나님은 들으심과 아심으로 충만하심이라.

 

이처럼 ‘불신자’를 언급하는 내용은 꾸란에 수없이 등장한다. 하지만 그 단어를 오늘날의 기독교인과 일치시키는 무슬림은 극단적 테러리스트 외에는 거의 없다. 이슬람에도 오늘날의 기독교인들처럼 진보주의자, 온건보수파, 극단주의자 등이 함께 있는데 이런 현실을 무시하거나 외면하고 일반 무슬림과 테러리스트를 명확히 구분하지 못하면 이처럼 위험한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이혜훈 의원은 계속 불신자를 언급한다. 물론 그는 계속해서 꾸란의 ‘불신자’를 오늘날의 ‘기독교인’으로 읽고 있다. 그가 인용하는 47장 4절은 이렇게 소개되고 있었다.

 

“불신자들을 만났을 때는 저들의 목을 치라. 너희가 완전히 저들을 제압했을 때에는 저들을 포로로 취하고 그런 후 저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석방을 하든지 전쟁이 종식될 때까지 보상금을 받고 저들을 풀어주라.”

 

이 구절에 대한 꾸란의 내용은 이렇다.

 

“너희가 전쟁에서 불신자를 만났을 때 그들의 목을 때리라. 너희가 완전히 그들을 제압했을 때 그들을 포로로 취하고 그후 은혜로써 석방을 하던지 아니면 전쟁이 종식될 때까지 그들을 보상금으로 속죄하여 주라. 그렇게 하라. 너희에게 명령이 있었노라. 하나님께서 원하셨다면 그들에게 율법을 내렸을 것이라. 그러나 그분은 너희로 하여금 성전하도록 하였으니 이로 하여 너희를 다른 자들에 비유하여 시험코자 하심이라. 그러나 하나님의 길에서 살해된 자 있다면 그분은 그의 행위가 결코 손실되지 않게 하실 것이라.”

 

본문은 “너희가 전쟁에서 불신자들을 만났을 때”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니까 이 구절은 전시상항에서의 지침이다. 구체적으로 무함마드가 메카의 기득권자들과 전쟁을 치르던 상황을 말하고 있다는 점은 이제 더 이상 자세히 설명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하지만 그의 간증을 듣는 사람들은 여전히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언제 어디서든 “기독교인들의 목을 치라”는 말로 듣고 있을 것이다. 정말 너무나 무서운 왜곡이다.

  

2. 기독교와 이슬람교, 성서와 꾸란, 어느 쪽이 더 호전적일까?

 

이혜훈 의원이 인용하는 다음 구절은 정말 자세히 살펴보아야 할 부분이다. 그는 98장 6절을 이렇게 읽고 있다.

 

“이슬람에서 기독교인들은 지옥의 불속에 떨어져서 영원히 형벌 받을 자들이고 피조물 중에서 가장 사악한 자들이다.”

 

이 구절에 대한 꾸란의 실제 내용은 이렇다.

 

“실로 성서의 백성들 중에 진리를 거역한 자들과 불신자들은 불지옥에 있게 되리니 그들은 그 안에서 영주하매 가장 사악한 무리들이라.”

 

주목할 점은, 꾸란이 기독교인을 직접 언급할 때는 ‘성서의 백성’이라고 정확히 지적한다는 점이다. 그런데 이혜훈 의원이 읽은 내용을 보면 “기독교인은 모두 지옥에 가서 영원히 형벌을 받는다”로 읽힌다. 하지만 꾸란은 ‘성서의 백성들 중에 진리를 거역한 자들과 불신자들’이라고 말한다. ‘성서의 백성들 중에 진리를 거역한 자들과 불신자들’은 ‘기독교인’과 완전히 일치하는 것일까?

 

한국의 보수 기독교인들은 대부분 “무슬림은 모두 지옥에 간다”고 믿는다. 하지만 “기독교인들이 모두 지옥에 간다”고 용감하게(?) 믿는 무슬림은 별로 없다. 하나님(알라)께서 명백히 말씀하시지 않은 일에 대해 감히 자신의 생각을 확신하는 만용을 부릴 수는 없기 때문이다.

 

꾸란에 기독교인이 지옥에 간다고 암시하는 부분이 있기는 있다. 예를 들면, “마리아의 아들(예수)을 신이라 부르는 자는 지옥불에 던져진다.” 이런 식이다. (유감스럽게도 그 말씀이 꾸란 어디에 나오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하지만 분명히 읽은 기억은 있다. 나는 꾸란을 2번 통독했다.) 반면 꾸란에는 이런 말씀도 나온다.

 

“꾸란을 믿는 자들이나 구약을 믿는 자들이나 그리스도인과 천사들을 믿는 사비안들이나 하나님과 내세를 믿고 선행을 행하는 자에게는 주님의 보상이 있을 것이며 그대들에게는 두려움도 슬픔도 없을 것이라.” (꾸란 2장 62절)

 

한국의 보수 기독교인들 중에는 “이슬람은 사탄의 종교며 예언자 무함마드는 악의 괴수”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무슬림 중에 기독교를 사탄의 종교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하나님의 뜻을 왜곡하여 타락했다고 생각하기는 하지만 기독교인 역시 하나님께서 택하신 ‘경전의 백성들’이기에 애증의 감정을 동시에 갖고 있는 무슬림이 많다. 

 

무슬림은 또한 예수님에 대한 존경심을 누구나 갖고 있다. 꾸란에 의하면 하나님(알라)의 예언자로서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신 분이기 때문이다. 무슬림은 예수의 신성과 십자가와 부활은 부정한다. 하지만 예수께서 동정녀 마리아를 통해 탄생하시고 수많은 이적을 행하셨으며 가난한 자와 억눌린 자를 돌보아주신 알라의 진정한 예언자라고 누구나 믿는다.

 

하지만 한국의 보수 기독교인 중에 무함마드를 존경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예언자 무함마드가 어려서부터 주위 사람들로부터 “자비로운 이, 성실한 사람”이라는 말을 듣고 자랐다는 것은 거의 역사적 사실이다. 그가 예언 활동 내내 가난한 사람들 편에 서서 부유한 기득권자들의 착취를 비판하고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고 역설한 것은 반론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그의 행적은 예수님과 너무나 비슷하지만 이런 사실을 아는 보수 기독교인은 매우 적다.

 

혹자는 무함마드가 과부와 결혼했다든지 여러 명의 아내를 두었다는 것으로 그를 부도덕한 사람으로 매도한다. 하지만 누구나 그렇듯이 무함마드 역시 ‘시대의 아들’이다. 당시의 사회적 배경과 서기 7세기라는 역사적 한계를 보지 못하고 지금의 시각으로 세계종교의 창시자를 무자비하게 재단하는 그들의 무지와 만용에 대해서는 더 이상 언급을 하고 싶지 않다.

  

3. 이슬람을 ‘평화의 종교’라 부를 수 있을까?

 

이혜훈 의원의 간증 가운데는 “이슬람은 평화의 종교”라는 주장을 반박하는 내용도 나온다. 이에 대해서는 내가 쓴 책 <교양으로 읽는 세계종교>의 일부분을 소개하는 것으로 설명을 대신하고 싶다.

 

“이슬람을 ‘평화의 종교’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이 문제에는 간단히 답하기 어렵다. 하지만 이슬람의 원래 정신이 평화를 지향한다는 점을 부인할 수는 없다. 과거에 수많은 원주민을 학살하고 정복한 전력이 있다고 해서 그리스도교를 ‘사랑의 종교’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리스도교를 ‘사랑의 종교’라고 말할 수 있다면 이슬람 역시 ‘평화의 종교’라고 말할 수 있다.” (류상태 저 <교양으로 읽는 세계종교> 150쪽) 

 

기독교성서에도 꾸란 못지않게 호전적인 내용이 있다. 다음은 그와 관련된 성서의 몇 구절이다.

 

“아말렉 족속을 쳐서 그들의 모든 소유를 남기지 말고 진멸하되 남자와 여자와 어린이와 젖 먹는 갓난아이와 소와 양과 약대와 나귀를 남김없이 쳐 죽여라.” (사무엘상 15장 3절)

 

“그 성읍에 사는 주민을 칼로 쳐죽여야 한다. 그 성읍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말끔히 없애버려야 한다. 거기에 있는 가축도 칼로 쳐죽이고 모든 전리품을 장터에 모아놓고 그 전리품과 함께 온 성읍을 불살라 너희 하느님 야훼께 바쳐야 한다.” (신명기 13장 16-17절)

 

이혜훈 의원에게 묻고 싶다. 이 구절을 일반화하여 "기독교는 불신자들을 잔인하게 몰살시키는 종교“라고 해석한다면 동의할 수 있는가? 이혜훈 의원은 자신이 꾸란을 읽고 해석하는 방식이 이와 같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런데 그는 한 사람의 평범한 기독교인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국회의원이다. 이점이 더욱 염려스러운 것이다.

 

꾸란에는 이런 구절들도 있다.

 

“너희에게 도전하는 하나님의 적들에게 도전하되 그러나 먼저 공격하지 말라. 하나님은 공격하는 자들을 사랑하지 않으시니라.” (2장 190절).

 

“종교에는 강요가 없나니 진리는 암흑 속으로부터 구별되느니라.” (2장 256절)

 

이혜훈 의원에게 충고한다. 독실한 기독교인으로서 당신은 기독교를 ‘사랑의 종교’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렇다면 무슬림도 자신의 종교를 ‘평화의 종교’라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4. 글을 마치며

 

한쪽 얘기만 듣는 건 위험하다. 불행하게도 한국의 보수 개신교인들은 한쪽 얘기, 그것도 극단적인 주장만 듣고 있다. 그들에게 기독교는 하나님께서 계시해주신 유일한 구원의 종교다. 물론 무슬림도 하나님께서 계시해주신 유일한 구원의 종교는 이슬람뿐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는 단언한다. 오늘날 한국의 보수 개신교인이 이슬람 세계에 태어나 그들의 가르침만 받았다면 거의 모두 무슬림이 되었을 것이다. 무슬림들 역시 한국이나 미국에서 태어나 보수적인 기독교 교육만 받고 자랐다면 독실한 기독교인이 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솔직히 나도 이슬람이, 정확히 말하면 극단주의 이슬람이 두렵다. 하지만 나는 기독교가, 아니, 근본주의 기독교가 더 무섭고 두렵다. 이 두 종교의 공통 특징인 원시 유일신사상이 너무나 무섭고 두렵지만, 자신들의 오류의 가능성은 전혀 생각하지 못하고 형제종교를 원수처럼 여기는 보수 기독교인들의 무모한 신앙과 확신에 대해 더욱 공포심을 느낀다.

 

안타깝게도 오늘날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은 열린 무슬림의 권고를 귀담아듣지 않고 테러를 저지른다. 근본주의 기독교인들 역시 열린 기독교인들의 권고를 귀담아 듣기는커녕 오히려 이단시하고 적대하며 끝없는 갈등을 만들어낸다.

 

무슬림이건 기독교인이건 극단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신앙만이 순수하고 거룩하며 하나님의 뜻에 부합한다고, 그걸 모르는 저들은 무지한 자들이며 저주 아래 놓여있다고 똑같이 확신한다. 이들이 지구마을에 가져올 결과가 파멸이 아니기를 간절히 기도할 뿐이다.  

류상태 선생은 장로회신학대학원 졸업이후 20여 년을 목회자, 종교교사로 사역했지만, 2004년 ‘대광고 강의석군 사건’ 이후 교단에 목사직을 반납하였고, 현재는 종교작가로 활동하면서 ‘기독교의식개혁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지은 책으로는 [교양으로 읽는 세계종교] [소설 콘스탄티누스] [신의 눈물] [한국교회는 예수를 배반했다] [당신들의 예수]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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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7/09/22 [16:45]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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