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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와 학생의 신체접촉과 체벌에 대하여
[류상태의 문화산책] 사람과 사람, 그 인격의 가치는 언제 어디서나 동등하다
 
류상태   기사입력  2017/09/01 [18:09]

초등학교 여교사가 제자를 성추행한 사건에 이어, 이번엔 유치원장이 두 살배기 원생의 뺨을 때린 일로 우리 사회가 충격에 휩싸였다. 교사와 학생의 신체 접촉 또는 교육자의 ‘교육을 위한 체벌’은 어디까지 허용될 수 있는 것일까. 이 문제에 관하여 내 경험에 비추어 독자들과 생각을 나누고 싶은 점이 있어 글을 올린다.

  

1. 달라진 시대, 사고의 전환이 필요하다

 

내가 처음 교직에 발을 들여놓은 때가 1983년이니 벌써 30년이 훌쩍 넘는 세월이 흘렀다. 이후 약 20년 동안 계속된 교직생활을 통해 여자 중학교와 고등학교, 남자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모두 경험할 수 있었다.

 

당시에는 교사라면 누구나 교편을 들고 다녔고 ‘교육을 위한 체벌’은 당연하게 여겨졌다. 간혹 몽둥이를 사용하여 학생을 다치게 하거나 손찌검이 지나쳐 문제가 되는 경우도 있었지만, 학생도 학부모도 교사가 매를 들었다는 것 자체로 이의를 제기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초보 교사 때 겼었던 일이다. 그때의 끔찍한 기억이 지금도 뇌리에 생생히 남아있다. 교무실에서 훤히 내다보이는 운동장에서 고등학교 체육교사가 여학생 한 명을 무차별 구타하고 있었다. (그건 분명 체벌이 아니라 구타라고 해야 한다.) 학생의 엉덩이를 발로 사정없이 걷어찬 그는 연이어 손으로 학생의 목덜미를 후려쳤다. 수십 명의 같은 반 학생들이 겁에 질린 채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도 학생들에게 체벌을 했던 기억이 없지 않다. 말을 듣지 않거나 말썽을 피운 아이들의 볼을 살짝 비트는 것이 내가 정한 체벌의 원칙이었고 가장 많이 사용한 체벌 방법이었다. 요즘이라면 문제가 될 수 있겠지만 당시에는 대부분의 학생들이 별 거부감 없이 받아들였던 것 같다.

 

하지만 그 원칙을 지키지 못하고 실수를 한 경험도 있다. 그 일은 남자 중학교에서 벌어졌다. 수업시간에 한 학생이 옆 친구에게 계속 말을 걸었다. 내가 눈총을 주자 한 학생은 대화를 멈추었지만 그 학생은 여전히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계속 했다. 학생에게 다가가 왜 수업시간에 떠드느냐고 물었다. 학생은 떠든 적 없다고 대답했다.

 

같은 말이 몇 번 오갔다. 학생은 끝까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다. 순간 이성을 잃었던 것 같다. 학생의 뺨을 때렸다. 다행히 일은 거기서 끝났다. 학생은 더 이상 대들지 않았고 수업은 별 탈 없이 진행되었지만 나는 그 일을 두고두고 잊지 못했다.

 

20~30년의 세월이 지났지만 그때 일은 나에게 여전히 부끄러움으로 남아 있다. 학생은 왜 끝까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던 것일까. 학생은 ‘떠들었다’는 내 말에 동의하지 못한 것일까. 비록 수업시간에 옆 친구에게 계속 말을 걸기는 했지만 ‘떠든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 것일까. 수업시간이지만 자기가 하고 싶은, 또는 해야 하는 말을 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한 것일까.

 

그 학생이 옆 친구에게 계속 말을 걸고 수업에 집중하지 않은 건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수업시간에 친구와 말을 해서는 안 된다는 규칙은 학생들의 동의를 얻은 것이 아니다. 교사들이 일방적으로 만든 것이다. 학생들 입장에서는 ‘왜 꼭 그래야 하는데?’라는 생각을 가질 수도 있지 않을까.

 

좀 더 생각의 진도를 나가보자. 학생은 수업시간에 반드시 교사의 설명에 집중해야만 하는 것일까. 수업 시간에 자기 일을 하거나 옆 친구와 대화를 하면 안 되는 것일까. 수업에 방해가 되니까 안 된다는 ‘모범답안’은 정말 이론의 여지가 없는 모범답안일까.

 

교사와 학생 간에, 나아가 사람과 사람 간에, 서로의 행복을 위해 이루어져야 할 가장 중요한 소통의 방법은 대화인 것 같다. 교사가 만들어놓은, 또는 기성세대가 일방적으로 만들어놓은 모범답안이 아니라, 함께 대화해서 기준을 만드는 건 어떨까? 대화로 의사소통이 불가능한 어린 아이의 경우, 최대한 아이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려는 노력이 교사에게는 꼭 필요하지 않을까.

  

2. 어떤 체벌도 ‘사랑의 매’가 될 수는 없다

 

이제 신체접촉 문제에 대해 내 경험에 비추어 생각해보고 싶다. 첫 교사생활을 여학교에서 시작했기에 이 문제는 나에게도 예민하게 다가올 수밖에 없는 문제였다. 오해의 소지를 주지 않으려면 아예 신체접촉을 하지 않으면 되겠지만 그게 최선일까. 나는 이 문제도 나름대로 기준을 세웠고 비교적 잘 지켰다고 생각한다. 체벌이 필요할 때는 볼을 살짝 비트는 것으로, 격려를 해줄 때는 어깨를 톡톡 쳐주는 것으로.

 

당시에는 이 정도로 문제가 될 일은 없었다. 하지만 오늘날의 눈으로 보면 어떨까. 어쨌든 체벌은 체벌이다. 학생의 잘못에 대해서도 일방적인 내 판단에 의존한 경우가 많았다. 학생들에게 일일이 물어보거나 동의를 구한 경우는 그리 많지 않았다. 학생들 가운데 억울하게 체벌을 당한 경우는 없었을까. 나는 격려의 행위로 한 것이지만 자신의 어깨에 손을 대는 것을 싫어한 학생은 없었을까.

 

여학생들의 언행으로 내가 아픔을 겪은 경험도 있다. 수학여행에 가서 학생들과 어깨동무를 하고 찍은 사진이 있었다. 한 학생은 내 무릎에 앉아서 찍었다. 내가 먼저 학생들의 어깨에 손을 얹은 것이 아니다. 아이들이 내 손을 잡아 자기 어깨 위에 걸쳐놓았다. 한 아이는 내 허락도 구하지 않고 무릎에 앉았다. 당황스러웠지만 아이들이 선생님에 대한 호감으로 한 일이었기에 그대로 사진을 찍어주었다.

 

나중에 이 사진이 학생들 사이에 돌아다녔다. 한 아이가 귀뜸해 주었다. “아이들이 선생님 응큼하대요.” 그냥 웃어넘겨도 될 일이었다. 하지만 그때는 교사생활을 막 시작한 20대의 초보교사였다. 수업 시간에 아이들의 얼굴을 쳐다보기가 무서웠다.

 

나는 나보다 젊은 사람을 만나면 기꺼이 먼저 악수를 청했었다. 하지만 그때의 일로 일종의 트라우마가 생긴 것 같다. 나이가 어려도 여자에게는 먼저 악수를 청하지 못하거나 망설이는 경우가 점점 많아졌다. 교생들이 교육실습을 마쳤을 때였다. 남학생들과 무심코 악수를 나누다 여학생 앞에서 손을 내리고 말았다. 왜 사람 차별 하냐는 항의를 받고나서야 겸연쩍게 웃으며 여학생과도 악수를 했다.

 

얼마 전부터는 남녀를 구분해서 행동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겠다는 생각에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악수를 잘 청하지 않게 되었다. 지나치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어떤 신체접촉도 일방적으로 이루어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 한 이 문제 역시 짚어볼 필요는 있을 것 같다.

  

3. 사람의 인격의 가치는 언제 어디서나 동등하다.

 

사람의 생각은 다양하다. 선생님이 칭찬이나 애정의 표시로 제자의 머리를 쓰다듬는 행위도 어떤 학생은 기분 좋게 받아들이지만 다른 학생에게는 기분 나쁜 행동이 될 수도 있다. 선의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학생의 문제로 돌릴 일이 아니다. 어떤 선의의 신체접촉도 상대방이 원하지 않는 경우라면 선의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시대가 바뀐 지금,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상대방의 동의 없이 일방적으로 이루어지는 신체접촉은 하지 않는 것이 좋지 않을까.

 

‘교육을 위한 매’라는 생각도 이제는 버려야 한다. ‘매’라는 것은 그 자체로 비교육적이기 때문이다. “미성년자이기에 매가 필요하다.”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미성년자란 신체적으로 덜 자랐다는 것이지 인격적으로 미숙하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미성년자이기에 매를 들어서는 더욱 안 된다. 생각이 다 자라지 못한 아이들에게 이해되지 않은 일에 복종하는 습관을 길러주는 것은 아이들의 인격 성장에 크게 해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대화로 상대를 이해시키지 못하는 상태에서 매를 드는 것은 상대방의 인격을 짓밟는 행위다. 그건 상대가 초등학생이건 두 살 배기 어린애이건 마찬가지다. 부모라도, 선생이라도, 그런 일을 일방적으로 행사할 권한은 없다. 사람이 기본적으로 갖고 태어나는 인격의 가치는 하늘이 내려준 것이며 나이와 상하관계를 떠나 언제나 동등한 것이기 때문이다.

 

류상태 선생은 장로회신학대학원 졸업이후 20여 년을 목회자, 종교교사로 사역했지만, 2004년 ‘대광고 강의석군 사건’ 이후 교단에 목사직을 반납하였고, 현재는 종교작가로 활동하면서 ‘기독교의식개혁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지은 책으로는 [교양으로 읽는 세계종교] [소설 콘스탄티누스] [신의 눈물] [한국교회는 예수를 배반했다] [당신들의 예수]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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