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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 열풍, 허상을 점검한다
[정문순 칼럼] 강남역 사건이 일으킨 페미니즘 부흥, 여성운동은 발전한 것인가
 
정문순   기사입력  2017/07/09 [13:54]

페미니즘 열풍, 여성의 현실을 묻는다
  
해방 이후 최대 불황기라는 요즘 호황을 누리는 산업을 찾기는 어려운 듯하다. 특히 경기 동향에 민감한 출판업계는 예전부터 힘들었지만 지금은 이를 악물고 버틴다는 말이 들려온다. 그러나 이 와중에도 베스트셀러가 전혀 나오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 중의 하나가 페미니즘 관련 책이라고 한다. 페미니즘을 다룬 책은 출판도 활발하거니와 나오는 대로 불티나듯 팔린다는 것이다.
 
물론 페미니즘 책이 처음부터 잘 나간 것은 아니다. 페미니즘 출판은 여성운동의 동향과 함께한다. 여성운동은 1990년대에서 2000년대 초기까지 적이 있다. 이 기간 동안 1세대 페미니스트들이라고 할 수 있는 여성운동가들이 또하나의 문화라는 동인을 중심으로 페미니즘 담론을 주도했고, 여성잡지 ‘IF’의 창간이 있었고, 문학에서는 여성시 운동이 활발했다. 정치적으로는 제대군인 가산점 위헌 판결이 나왔고, 여성가족부의 전신인 여성부가 만들어졌으며, 2000년을 넘어서면서 여성들의 숙원이던 호주제 폐지, 성매매특별법 제정이 이루어졌다. 여성 국무총리도 등장했으며, 성인지 관점에서 정부 정책을 마련하고 평가하려는 시도도 나왔다.
 
그러나 2000년대 후반 이후 잇따른 보수정권의 등장으로 여타 사회운동이 퇴조한 것과 마찬가지로 여성운동도 침체를 벗어날 수 없었다. 그러다가 최근 페미니즘 운동이 다시 물 만난 고기가 된 것은, 불행히도 지난 해 이맘 때 일어난 강남역 살인 사건의 여파가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이 사건은 여성 일반에 대한 증오감을 품은 한 남성이 치밀한 준비를 통해 신원도 모르는 여성에게 끔찍한 범죄를 저지른 것으로 알려지면서 혐오범죄로 인식되었다. 물론 수사 당국은 딱히 혐오범죄로 규정하지 않았지만, 많은 이들은 이 사건을 한국에서 여성혐오가 낳은 범죄의 첫 사례로 손꼽고 있다.
 
이 사건이 알려지면서 피해자와 비슷한 또래인 젊은 여성들이 대거 강남역에 모여 들어 이 땅에서 목숨을 걸고 여성으로서 살아가는 고통을 봇물 터지듯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방대한 대화의 네트워크에 모여서 경험을 나누고, 의미와 정의를 재고하고 새로운 이해에 도달했다는 페미니즘 이론가 리베카 솔닛의 말은 한국의 상황에 똑 들어맞는 발언인 듯하다. 이 정도만으로도 여성운동은 큰 도약을 이루고 있다고 볼 수도 있다.
 
맨스플레인’(여성을 가르치려 드는 남자들의 버릇), ‘강간문화’(성폭력이 사회 도처에 만연한 문화), ‘래드문화’(몰지각한 사내들의 반여성주의 문화. 일부 대학의 남학생들이 단톡방에서 여학생을 성적으로 모욕하는 대화를 나눈 것이 대표적), ‘페미포비아’(남성이 여성에게 느끼는 근거 없는 공포와 혐오), ‘미소지니’(여성혐오) 등 서구 페미니즘 운동에서 나온 용어들이 대중 속으로 저변을 넓히기도 했다. (‘맨스플레인을 비롯한 용어들은 리베카 솔닛의 저서,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원제 Men Explain Things To Me]에서 집중적으로 볼 수 있다.)
 
여성에 대한 공격성이 극단적으로 표현되는 여성혐오범죄는 해당 사회에서 여성의 사회적 지위에 조금이라도 발전적 변화가 일어났을 가능성을 암시한다. 여성의 지위가 예전과 조금이라도 달라지지 않은 사회라면 여성을 겨냥하는 혐오범죄가 나올 가능성은 드물기 때문이다.
 
통상적으로 혐오범죄는 정치적 소수자의 사회적 지위가 이전에 비해 조금이라도 개선됨으로써 이에 적응하지 못한 정치적 다수자 집단의 불안을 반영한다. 실제로 서구에서 여성혐오범죄가 기승을 부린 것은 1970년대 여성운동과 동성애자 인권운동이 활발한 시기였다고 한다. 반면 여성운동이 퇴조한 1980년대는 그것과 비례하여 줄어들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에서도 여성혐오범죄가 일어났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이 땅의 여성 권리가 한 발짝이라도 전진했음을 나타내는 증표라고 말할 수 있을까.
 
얼마 전 내가 사는 지역에서는 한 여성단체가 거리에서 여성 폭력 예방 캠페인을 벌였다. 그 단체 활동가들이 들고 있던 피켓에는 성폭력을 예방하는 방법을 십계명처럼 나열해 놓은 대목이 있었다. 다음과 같은 내용들이다. ‘남자(가해자)에게 싫다는 의사 표시를 분명히 한다.’, ‘낯선 사람 집을 방문할 때는 다른 사람과 동행한다’, ‘집에서 혼자 있을 때는 샤워를 하고 난 뒤라도 옷을 갖추어 입고 나온다…….
 
성폭력 예방 캠페인을 벌이는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성폭력은 미리 막을 수 있는 범죄라는 인식이 자리잡고 있을 것이다. 예방할 수 있는 범죄가 발생했다면 조금이라도 피해자의 책임을 탓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성폭력은 피해자의 부주의나 실수가 없다면 예방이 가능한 범죄라는 논리라면, 누구나 성범죄의 피해자가 될 수 있으며 이 땅에서 여성이 살아가는 환경이 구조적으로 성폭력적이라는 여성계의 주장과는 완전히 배치되는 결론이기까지 하다. 성폭력상담소를 운영하며 피해자들을 조력해 온 여성단체가 그동안 자신들이 해왔던 주장과 상반되는 주장을 펼친 셈이다.
 
가해자에게 싫다는 의사를 분명히 표현하라는 조언 어디에 피해자를 배려하거나 이해하는 태도가 자리 잡고 있는가. 오직 여성의 부주의나 실수, 소극적인 태도만 부각할 뿐이다. 여성이 자신의 의사를 분명히 밝히지 않은 것을 성범죄와 연결하는 어떤 시도든 그것은 전형적인 가해자 남성의 변명이나 자기합리화에 기울어진 생각일 뿐이다  

 

▲ 성폭력 피해 예방 요령을 서술한 정신의학 도서, 구글북스 이미지 캡처     © 정문순


자신의 의사표시를 뚜렷하게 하라는 식의 성폭력피해 예방법은, 자칫 성폭력이 가해자 남성이 피해자 여성의 언행을 오해하거나 피해자가 가해자의 오해를 살 만한 행동을 함으로써 빚어진 비의도적이고 우연한 산물이라는 인식을 줄 수 있다. 그러나 성범죄의 70%는 가해자와 피해자가 서로 아는 사이이며 성폭력 피해자의 30%는 아동이라는 통계가 보여주는 것은, 대부분의 성범죄가 피해자의 태도와 무관하게 가해자에 의해 처음부터 의도적이고 치밀하게 계획되었다는 점이다.

성폭력 가해자가 피해자와 아는 사이라는 것은 가해자로서는 피해자를 탐색할 시간이 부족하지 않았을 가능성을 나타낸다. 즉 가해자가 피해자의 속마음을 오해하거나 메시지를 잘못 읽고 성범죄를 일으켰다고 말하기 힘들어진다는 것이다. 또 피해자 중 아동이 많다는 것은 성폭력이 처음부터 가해자가 작정하고 일으킨 범죄일 가능성을 높인다.

더 큰 문제는 성폭력예방 요령이라고 알려진 것들은 이 단체뿐만 아니라 그동안 많은 여성단체에서 적극적으로 퍼뜨려온 것이라는 사실이다. 좋고 싫음을 상대에게 분명히 말하라는 조언의 경우 누구의 머릿속에서 처음 나온 것인지 모르겠으나 이제는 널리 알려진 것이기도 하다.

여성이 잘 나가서위협을 느끼는 남자들의 혐오범죄가 일어나는 세상과, “집에서 목욕할 때도어쩌고 하는 수준의 성범죄 인식을 가진 여성단체가 한 하늘 아래 공존하는 현실은 기묘한 부조화를 이룬다. 여성이 선진국형 범죄라는 혐오범죄의 희생양이 되기도 하지만, 그와 동시에 피해자 탓하기에 치우치기 쉬운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여성단체가 있는 나라에서 어느 것이 이 땅의 여성이 처한 정확한 현실을 말해주는 것일까.

따지고 보면, 강남역 살인 사건을 여성혐오범죄의 시작으로 규정하는 것이 얼마나 설득력이 있는지도 의문이다. 몇 년 전 내가 사는 지역에서는 등산 중이던 여성이 비면식범으로부터 성폭행을 피하려다 살해당한 사건이 일어난 적이 있다. 전혀 연고도 없는 여성에게 아무런 이유도 없이 극단적인 폭력을 가했다는 점에서 강남역 살인범이나 등산객 살해범이나 범행 동기는 별반 차이가 없다고 생각한다.

성폭력 가해자의 마음 바탕에는 여성 일반에 대한 혐오나 멸시의 감정이 크게 자리한다는 점을 감안하면, ‘강간문화가 일반적인 한국에서 여성혐오는 일상적으로 표출되는 일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유독 강남역 살인 사건이 두드러지게 부각된 이유는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도시의 핵심 번화가에서 일어난 사건이라는 점이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있다. 만약 지방에서 그것과 비슷한 사건이 일어났다면 폭발적인 관심을 끌었을지 의문이다.

지방에서 일어났으면 주목을 끌지 못했을 범죄가 수도 한복판에서 일어났다는 것 때문에 사회의 흐름을 바꾸는 데까지 일조했다면, 이 나라의 페미니즘도 서울과 지방의 격차, 또는 지역차별이라는 고질적인 병폐를 벗지 못했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이 땅의 여성 현실이나 여성운동이 디디고 있는 발판이 여전히 척박하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하다. 여성의 사회적 지위나 페미니즘 운동이 발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현상은 실상을 있는 그대로 반영한 것이 아닐 수 있다. 거품이나 허울을 걷어내어 여성이 처한 현실이나 여성운동의 환경을 정직하게 봐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iCOOP소비자활동연합회 시민기자단 블로그 게재 글을 손본 것입니다.


* <대자보> 편집위원, 문학평론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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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7/07/09 [13:54]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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