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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심한 영국의 복지, 그래도 우리보다 낫다
[정문순 칼럼] <나, 다니엘 블레이크>가 보여주는 영국 사회복지 '우월성'
 
정문순

외국 영화에서 부러운 것 중 하나는 인물에 대한 고정관념적 설정이 우리보다는 덜하다는 것이다. 우리 영화야 남자 주인공과 여자 주인공을 어떻게든 애인 관계로 엮으려고 애쓴다. 한국 영화에서는 서로 러브라인을 이루지 않는 남자·여자 주인공들을 찾아보기 힘들다.

영화 <, 다니엘 블레이크>가 돋보이는 것 중의 하나는 주인공들의 미묘한 관계이다. 다니엘과 케이티는 각각 싱글남싱글맘이다. 복지 수급권을 얻기 위해 주민센터에서 볼 일이 많다는 점에서도 처지가 비슷하니 처음부터 애인 관계로 설정하는 것이 자연스러울 법도 하지만 영화는 쉬운 접근을 피한다.

▲ <나, 다니엘 블레이크>의 한 장면, 창원아이쿱생협 제공     © 정문순


인물의 성격이나 심리를 대하는 영화의 시각도 단순하지 않다. 다니엘은 선량한 사람이다. 자신도 어려운 처지이면서도 자신 못지않게 어려운 케이티에게 호의를 베풀고 어린 딸도 예뻐해 준다. 다니엘처럼 착한 이웃만 있다면 우리 사회에 말썽이 날 일은 없을 것 같다. 그러나 다니엘이 사는 세상은 이웃을 돌볼 줄 아는 선량한 덕목만으로는 살아 갈 수 없다.
 
중병에 걸려 노동능력을 상실한 다니엘이 의지해야 했던 국가는 다니엘을 비참한 처지로 내몰았다. 최소한의 생존권을 확보한 인간다운 삶을 얻어내기 위해서 다니엘은 정 많은 이웃에 그쳐서는 안되었다. 투사가 되어야 했다. 어리숙하고 순한 사람을 극한으로 내모는 것은 인간이 얼마나 자신의 다양한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지 증명해준다.
 
사실 한 사람의 다양한 면모는 다니엘에만 해당하지 않을 것이다. 평범한 성격으로도 영웅 드라마를 쓸 수 있는 사람들은 나이기도 하고 당신이기도 하고 우리 모두이기도 하다. 켄 로치 감독의 뜻은 영웅 스토리를 만드는 데 있지 않았다. 그의 관심은 평범한 사람을 투사로 만드는 사회 현실이었다. 자신을 내세울 줄 모르는 착한 소시민을 인간의 존엄을 지킬 수 없는 극한의 지경으로 몰아감으로써 , 다니엘 블레이크라는 자존과 위엄의 목소리를 외치게 만드는 현실이었다.
 
고장 난 집을 고치고 가구를 만들어 이웃을 기쁘게 해주는 다니엘이 영국 정부에게는 생계능력이 있어도 일하지 않고 수급 자격이나 탐내는 사람일 뿐이었다. 몸 아픈 다니엘이 정부에게는 꾀병 부리는 게으름뱅이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러니 다니엘이 할 수 있는 방법은 불성실한사람이라는 비난을 감수해서라도 가짜 구직활동을 통해 생계 지원금을 받아내는 것밖에 없다.
 
그러나 구직 신청은 모두 인터넷으로 해야 하며 인터넷이 없는 사람을 위한 구직 신청 방법도 인터넷에만 나와 있다. 손으로 나무를 다듬을 줄이나 알지 평생 컴퓨터 자판과 마우스를 만져본 적 없는 다니엘이 주민센터에서 옆 사람의 도움으로 어렵사리 접근한 인터넷은 왜 그리 느려터지고 오류가 잘 나는지.
 
그렇다고 공무원들이 사근사근한 것도 아니다. 그 나라 공무원들은, 술 취한 채 주민센터에 무턱대고 들어와서 돈 내놓으라고 하는 일부 복지수급 탈락자들을 상대해야 하는 우리나라의 일선 공무원들과는 처지가 매우 다르다. 답답하고 기막힌 행정의 불편을 호소하는 다니엘에게 담당 공무원들은 정해진 매뉴얼만 앵무새처럼 읊어줄 뿐이다.
 
영화를 보면서 영국이라는 나라의 까다롭기 그지없는 복지 대상자 선정 절차를 대하자니 실소를 금할 수 없었다. 다니엘 블레이크는 복지를 쓸모없는 것으로 치부하는 신자유주의의 폐해를 잘 보여주는 사람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세계에서 가장 앞서서 1948년에 전면적 복지제도를 도입했지만 그와 정반대로 1980년대 초 신자유주의에도 앞장서면서 아직 그 여진에 시달리고 있는 이 나라가 한편으로는 부럽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나마 복지 수급자 탈락에 불복할 경우 재심의 기회를 몇 단계 더 갖춘 이 나라의 복지제도가 우리보다는 훨씬 나아 보였다. 영국은 탈락자에게 몇 번의 기회가 더 있지 않는가. 그 기회가 심장을 터지게 할 만큼 답답하고 느려 터져서 문제지. 실제로 다니엘은 심장병이 악화하여 끝내 숨진다.
 
다니엘은 항고 절차를 빨리 하게 해달라고 1인시위에 돌입하지만 우리나라의 다니엘 블레이크들에게는 정부의 행정 판단에 불복할 경우 재심의 기회조차 사실상 없다. 다니엘은 없는 걸 만들어달라고 하지 않았다. 영국의 다니엘은 정부에 복지 행정 메뉴엘을 법대로 집행해 달라고 요구했지만, 우리나라의 다니엘들은 자신이 제도의 부품이 아니라 인간임을 입증해 줄 메뉴엘조차 없는 것이다.
 
몇 년 전 일이다. 거제에 사는 한 할머니가 어느 날 기초수급자 대상자가 더 이상 아니라는 통보를 받고 주민센터를 찾아갔다. 알고 보니, 연락이 끊어진 사위에게 퇴직금이라는 수입이 생겼기에 국가가 이 할머니를 부양할 이유가 없단다. 교류도 없는 사위에게 자신을 부양해 달라고 차마 요구할 수 없었던 할머니는 주민센터 앞에서 극약을 먹는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하고 말았다.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송파 세모녀 사건보다 몇 년 앞서 일어난 비극이었다. 두 사건 모두 부양의무자 제도가 문제였다. 이번 대선에서 현실성 없는 부양의무자 제도 폐지를 내건 후보도 있다. 최소한 영국 정부는 혼자 사는 다니엘에게 부양능력이 되는 가족이 있는지 없는지 묻지는 않았다.
 
우리 정부와 지자체들은 부정 복지수급자를 신고하는 전담 부서를 두고 대대적으로 홍보하고 있다. 부정하게 세금을 타먹는 사람들이 왜 나오는지 따져보는 것은 뒷전이다. 혹시 수급 대상자 선별이 현실과 동떨어져 있기 때문은 아닌지, 법과 제도의 구멍이 있기 때문은 아닌지 생각해 보았는지도 의문이다. 정부가 부정한 국민을 색출하겠다며 눈을 희번덕이는 것 못지않게 복지 사각지대를 찾고 우리 곁에 있을지 모르는 다니엘 블레이크들을 살피고 다닐 수는 없을까.
 
영화의 한국 포스터에는 다니엘이 물웅덩이를 사뿐하게 건너뛰는 것 같은 모습이 그려져 있다. 만만하게 보이는 물을 건너는 것은 쉬운 일이다. 그러나 물웅덩이가 삶에서 단 한 번만 나타나지는 않을 것이다. 웅덩이를 건너뛰다 보면 결국은 가랑비에 옷 적듯 옷을 버리게 된다. 한 사람의 삶을 좌우하는 큰 일도 처음 한두 번은 대수롭지 않아 보이지만, 개인에게 쌓인다면 끝내는 그의 삶을 망가뜨리는 병폐가 되고 사회 전체에 쌓인다면 구조적인 적폐가 된다. 정부가 시민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은, 웅덩이를 아예 없애지는 못하더라도 그걸 건너뛰는 일을 낙담하지 않을 만큼의 시스템은 마련해 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이번 대선에서 국민에게 뭐든 다 해주겠다는 후보를 기대하지는 않는다. 그런 사람일수록 나중에는 말을 바꿀 가능성이 높다. 전체 노인 기초연금 지급, 4대 중증질환 건강보험 적용, 영유아 보육 국가 지원 등 표가 급할 때는 다 해줄 것처럼 설레발을 치더니 나중에는 거짓말을 한 사람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차라리 실패하거나 좌절해도 다시 도약할 수 있는 기회를 주겠다는 후보를 살펴보겠다. 이왕이면 패자부활의 기회를 여러 번 준다면 더 좋을 것이다.
 
 
iCOOP소비자활동연합회 시민기자단 블로그에 실린 글을 손 본 것입니다





* <대자보> 편집위원, 문학평론가로 [한국문학의 거짓말- 2000년대 초기 문학 환경에 대한 집중 조명](작가와 비평, 2011)의 저자입니다.
 
기사입력: 2017/04/16 [16:13]  최종편집: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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