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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쨌든 말했고 그래서 죽지 않았다
성폭력에 대해 말한다는 것, 피해자의 고통을 헤아려야
 
정문순   기사입력  2003/12/07 [02:53]
망각과 기억
망각은 인간을 살린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이 맞다면 그 반대의 경우도 성립할 것이다. 지나간 일은 몽땅 잊어버리는 것이 소원이던 때가 있었다. 없었던 일로 하고 싶었던 기억이 괴물처럼 버티고 있는 동안 나는 내가 가장 딱한 인간 축에 든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내 고달픔을 말하는 데는 긴 진술이 필요하지 않다. 나는 대학 초년생 때 교수에게 성폭력 피해를 당한 적이 있으며, 그 기억에 오랜 세월 동안 시달렸다. 아마 이 정도만 말해도 망각에 대한 나의 집착을 남에게 이해시키는 데는 무리가 없을지 모른다. 아니다. 그 정도로는 충분하지 않다. 성폭력 피해자는 피해를 당한 것만으로도 가늠할 수 없는 좌절과 무력감에 시달려야 하지만 내가 정작 몰아내고 싶었던 기억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나는 당시에 가해자의 행동을 성폭력으로 인지하지도 못했으며 이후 몇 년 동안 아무렇지도 않게 잘 살았다. 훗날의 나는 십 수 년 전의 나를 불러내어 그런 무지가 어떻게 가능할 수 있었는지 끊임없이 심문해댔다. 성폭력에 무지했던 나 자신과 화해하는 것이 내가 넘어야 할 산이었다.
우리 사회의 상식이란
성폭력에 대한 무지는 곧 성적 무지로 해석되기 쉽다. 나의 경우도 어린아이처럼 성에 무지한 탓에 가만히 앉아서 피해를 당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전혀 아니라고 말하기도 힘들지만 그렇다고 전적으로 수긍하기는 어려워진다. 내가 정말 성에 어두워서 그랬을까. 성에 캄캄했다고 하여 성폭력을 인지하는 것이 불가능했을까. 스무 살 즈음의 여자가 성추행을 당하고도 전혀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것이 상식적으로 납득되기 힘들다는 점은 알고 있다. 사실이라고 믿기 힘들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사회의 보편타당하고 합리적인 것으로 통용되는 관점이 결코 성폭력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범죄와 폭력에 대한 단호한 대응을 주문하는 것이 사회의 상식이라면 성범죄도 똑같은 적용을 받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성폭력이 빈발할수록 단죄를 당하는 것은 가해자가 아니라 애꿎은 피해자이다. 성폭력은 피해자가 정신만 차린다면 얼마든지 예방할 수 있기 때문이란다. 
'어르신'과 성범죄자
성폭력이란 것이 피해자가 가해자가 될 만한 사람을 경계한다고 하여 막을 수 있다면 서로 간에 신뢰가 전제된 관계에서는 여성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 어린 여학생의 처지에서 가해자의 행동을 '어르신'의 선의나 친밀감과 다른 것으로 받아들인다는 것, 그것만도 어려운데 그를 성범죄자로 의심한다는 것은 더욱 감당하기 힘든 일이었다. 만약 가해자가 교수라는 자리에 있지 않았어도, 나와 지위가 엇비슷했어도 내가 상대방의 폭력을 호의라고 해석할 수 있었을까. 아닐 것이다. 남자 교수와 여학생의 권력 관계, 그리고 여성이 교육을 통해 어떤 존재로 길들여지는가에 대한 상황맥락이 파악되지 않으면 여성이 성폭력에 노출될 수밖에 없는 구조에 놓여있음이 인지되기는 힘들다.
알에서 깨어나다
▲정문순씨의 인터뷰기사     ©오마이뉴스
<오마이뉴스> 인터뷰 기사에서는 피해 사실도 모르고 살던 여자가 자신을 피해자로 인지하게 된 과정은 나와 있지 않다. 그저 나중에야 깨달았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 면벽한 수도승처럼 용맹정진 끝에 어느날 갑자기 눈이 떠진 것이 아니다. 과거의 아무렇지도 않았던 기억이 전혀 다르게 재구성된 것은 남자를 알게 되면서였다. 이성과의 스킨쉽은 먼지를 뒤집어쓰고 파묻혀 있던 묵은 기억을 들추어냈다. 손을 잡으니 따스하구나. 이런 느낌은 좋아하는 사람한테서나 가능할 테지? 그런데 예전에 누군가와 신체를 접촉한 적이 있다. 그때는? 그 때 기분은 좋은 것으로 남아 있을 턱도 없었고, 그 상대방은 성적인 친밀감을 느낄 만한 사람일 수도 없었다. 생각이 거기 미치자 나는 혼란스러워졌다. 전혀 좋아하지도, 좋은 느낌도 갖지 못한 신체 접촉이라면 그것이 성폭력이 아니라고 말할 도리는 없었다. 장담하건대 내가 아직 이성을 모르고 살고 있다면 그 옛날의 기억을 끄집어내어 다시 살피는 일은 없었을 지 모른다. 아직도 성폭력 피해자인 줄 모르고 살고 있을 수 있다는 얘기다.

[관련기사] 박형숙, 16년만에 교수 성추행 고발한 문학평론가, 오마이뉴스(2003. 8. 11)
 
가해자를 배려하다니
성폭력 피해자를 달랠 수 있는 방법은 많지 않다. 그나마 최선의 치유책은 가해자를 처벌하거나 최소한 그에게서 사과라도 받아내는 길일 것이다. 내 속이 타들어가는 동안 가해자는 일말의 죄책감도 없이 잘 살고 있을 것이다. 자신이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모를 가해자를 두고 체념하고 마는 것은 어떤 일보다 견디기 힘들다. 그러나 가해자를 찾아가 사과를 요구하는 것은 내게는 그보다 한층 더 어려운 일이었다. 입이 천근이나 되는 듯 움직여지지 않았다. 언제라도 찾아가면 반가이 맞아줄 것 같은 교수에게, 실제로 옛 제자를 환대해주는 가해자에게 당신이 내게 성폭력을 저지르지 않았느냐는 말을 꺼내놓을 수가 없었다. 누군가를 몹쓸 사람으로 낙인찍을 것만 같다는 두려움, 내게 그만한 자격이 있는가 하는 어처구니없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 사람이 고통을 받는다면 내 마음인들 편할까. 가해자를 염려해주는 피해자의 심정 역시 상식적인 잣대로만 따지자면 이해되기 힘들 것이다. 성폭력 피해자라는 자각마저 없었던 어리석음 못지 않은 바보 천치 짓이라고 해도 할 말이 없다. 어쩌면 피해자가 가급적 입을 열지 않기를 바라는 것 역시 사회의 지배적 가치관에 속한다면 나는 그런 요구에 충실한 셈이 아니었을까. 
나는 왜 아프지 않을까
우여곡절 끝에 가해자에게 사과를 요구하기는 했다. 입만 터지면 살 것 같았는데 허탈감만 한아름 몰려왔다. 어쨌든 나는 할 말은 했다. 어차피 사과하리라 기대하지는 않았잖아? 그렇게 자족하며 이제는 한시름 놓았다고 생각하고 싶었다. 그러나 모 대학의 성폭력 피해자가 인터넷에 올린 글을 접하면서 기대는 부서져버렸다. 피해자는 병원 치료를 받지 않을 수 없을 만큼 앓고 있었다. 누군가는 싸우고 다치고 앓고 있을 동안, 나는 해결되지 못한 성폭력을 잊고 아무 탈없이 잘 살고 있다. 이렇게 멀쩡히 살고 있는 것은 견딜 수 없었다. 모든 것은 원점으로 돌아갔고 길 가다가 아무 여자나 붙잡고 빌고 싶었다. 도와주세요, 제발.
자기 학대는 그만
<아웃사이더>에 글을 쓴 것은 내 나름의 치유책이었다. 나는 내면에 가두어놓고 경멸하고 학대했던 나 자신을 놓아주고 싶었다. 왜 진작 글을 통해서라도 떠들 생각을 못했을까 생각이 든다. 그러나 쉽지는 않다. 지난 일을 들추어낼수록, 더 자세히 들여다볼수록 돌덩이에 가슴이 짓눌리는 것 같다. 아직도 내 안에서 저항하는 힘은 그만큼 거세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언제까지고 혼자만 끙끙 앓았다면 과연 사람꼴을 하고 살고 있을까 생각해본다. 가해자에 대해 입장을 정리한 건 아니지만 자멸할지 모른다는 예전의 두려움만큼은 벗었다.   
소원이 있다면
어쩌면 나는 섬약하고 약해빠진 나만의 넋두리를 합리화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물론 나는 내 경험이 이 땅의 모든 여성들이 겪을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일반화할 의도까지는 없다. 그러나 여성이 폭력에 노출된 상황에서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게 하는, 가해자에게 떳떳이 말할 수 없게 하는 억압 기제가 있다는 것만은 말하고 싶다. 그것은 내 입에만 물렸던 재갈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이 사회의 통념은 성폭력에 노출된 많은 여성들이 당당하게 대응하지 못한다는 비난을 곧잘 던진다. 그러나 피해 여성들의 가슴을 움츠려들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아무도 이야기하지 않는다. 이제라도 그들의 입을 틀어막고 발목을 잡는 걸림돌이 무엇인지 논의되지 않으면 안된다. 재갈을 풀어주지는 못해도 피해자의 고통을 헤아릴 자세는 되어야 하지 않을까. / 편집위원

* 필자는 문학평론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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