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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환경의 피해, 대물림하지 않기
[류상태의 문화산책] 부모로 인해 힘들어하는 젊은 벗들에게
 
류상태   기사입력  2016/05/02 [07:57]

서울의 한 여자중학교에서 일했던 어느 해 5월, 아마도 어버이날 전후가 아니었나 싶다. 수업시간에 조별토의를 시켰다. <내가 부모라면>이라는 주제를 주고 ① 내 아이들에게 ‘해 주고 싶은 말’은 무엇이며, ② 아이들을 위해 ‘하고 싶은 일’은 무엇인지, 조별로 의견을 모아 발표하게 했다.

 

이런 의견이 나왔다. “내가 부모라면, 저는 아이한테 사랑한다는 말을 해 주고 싶어요. 저는 지금까지 엄마 아빠한테서 사랑한다는 말을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거든요.” 이런 의견도 있었다. “저는 아이와 함께 저녁식사를 같이 하겠어요.” 이 의견을 낸 학생은 부모님과 저녁식사를 함께 하는 날이 한 달에 한 번도 안 된다고 했다.

 

내가 오래된 얘기를 꺼내는 건 지금이 5월, 가정의 달이기 때문이다. 많은 세월이 흘러 그때 툴툴거리며 발표했던 학생들은 대부분 40대 초반의 아이 엄마들이 되었다. 하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여건이 크게 달라지지는 않은 것 같다.

 

우리나라 부모들은 여전히 바쁘다. 자식에게 적극적으로 애정표현을 하는 부모가 많아지기는 했지만 그렇지 못한 부모 역시 많다. 아이에게 존댓말을 해주는 부모도 최근에 부쩍 늘어났지만 올해 연초에 수차례 보도되었듯이 부모에게 학대받고 자라는 아이들 역시 없지는 않다.

 

지금부터 하는 이야기는 바로 그런 아이들, 그러니까 부모의 사랑을 충분히 받고 자라지 못하는 십대 청소년들과 나누고 싶은 얘기들이다. 차분히 생각하며 들어준다면 가정의 사랑을 그리워하는 젊은 벗들에게 조금은 도움이 될 수 있지 않을까.

 

1) 부모에게 애정 표현 먼저 하기

 

“우리 엄마아빠는 다른 사람한테는 친절한데 나한테는 그렇지 않아요.” 학생들과 상담할 때 자주 듣던 말이다. 하지만 그건 자식을 사랑하지 않아서라기보다 생활이 힘들어서 그런 경우가 많다.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화내는 내 모습을 제일 많이 보는 사람은 내 아내다. 내가 화를 잘 내고 큰소리쳐서 마음 아프게 하는 사람 역시 내 가족이다. 왜 그럴까? 사랑하지 않아서? 그렇지 않다. 오히려 가장 가깝기에 화를 낼 수 있는 것이다. 아무리 힘든 일이 있어도 밖에서는 참아야 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그 속상한 일, 힘든 일을 무조건 참기만 하긴 어렵다. 그래서 가까운 사람한테 쏟아놓게 되는 것이다.

 

이건 확실히 역설이다.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게 오히려 화를 더 내고 힘들게 하다니! 하지만 입장 바꿔 생각해 보면 자식들도 마찬가지다. 속상한 일이 있다고 이웃집 아저씨나 아줌마에게 짜증을 낼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러니 엄마 아빠에게 투정을 부릴 수밖에.

 

자식들은 “엄마아빠는 어른이고 부모니까 당연히 자식인 나에게 무한 사랑을 베풀어야 해!”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엄마아빠도 생활에 지친 소시민으로서 누군가에게 위로받고 싶고 인정받고 싶은 마음은 자식과 다르지 않다. 그러므로 아들딸이 그런 부모의 마음을 헤아리고 먼저 사랑을 표시하고 감사의 말도 건넨다면 부모는 몹시 기뻐할 것이다. 어쩌면 너무 기뻐서 눈물을 흘리실 지도 모른다.

 

예외도 없진 않지만 50대가 넘은 부모세대들은 대체로 사랑한다고 말하는 걸 어색해한다. 이러는 나 역시 사랑한다는 말을 아내나 자식에게 거의 해보지 못했다. 그런 부모에게 “엄마, 아빠, 사랑해요.”라고 먼저 말을 해 보면 어떨까? “난 우리 엄마가 제일 좋더라.” “우리 아빠가 제일 좋더라.” 이런 표현도 좋겠다. 말 한마디가 생활에 지친 엄마아빠에게 큰 힘을 줄 수도 있다.

 

2) 경제력이나 학력 같은 외부 조건으로 부모님이나 자신을 평가하지 않기

 

부모의 경제력이나 학력 때문에 열등감을 갖는 청소년들이 꽤 많다. 우리 사회가 외적인 조건, 이른바 ‘스펙’으로 사람을 평가하니 우리 청소년들도 그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것이다. 부모님의 직업에 대해 부끄럽게 생각하거나 부유한 환경에서 태어나지 못한 불만을 자주 토해내어 부모님을 힘들게 하는 친구들도 있다.

 

내가 중학교 3학년 때, 아버지께서 하시던 사업이 기울어 살던 집을 팔고 낡고 허름한 집으로 이사를 한 적이 있었다. 물건을 하나 둘 처분하여 끼니를 때우기도 했다. 고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입학금을 마련하지 못해 힘들어하시는 아버지께 이런 말씀을 드렸다. “아버지, 저 고등학교 내년에 갈게요.” 아버지께서 말씀하셨다. “밥은 굶어도 너 학교는 보낸다.”

 

다행히 가난이 계속되지는 않았다. 이후 사업에 재기하신 아버지께서 대학과 대학원 등록금까지 모두 대주셨다. 하지만 지금까지 가장 감사하고 가슴 저리도록 기억에 남는 아버지 말씀은 “밥은 굶어도 너 학교는 보낸다.”였다. 그 말씀은 내가 살아가는 동안 평생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이 글을 읽는 젊은 벗들 중에, 생활에 지쳐 힘겨워하면서도 등록금 챙겨주시는 부모님을 모시고 사는 친구가 있다면, 그 부모님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말기 바란다. 오히려 그런 힘든 여건에서 이만큼 키워주셨다는 사실만으로도 부모님께 마음 깊이 감사해야 하지 않을까?

 

3) 가정환경 넘어서기

 

어쩌면 이 글을 읽는 청소년 중에는 “그 모든 것이 나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고 항변하고 싶은 친구들도 있을 수 있겠다. 부모님이 계시지 않는 친구들도, 너무나 무책임하고 난폭한 부모와 함께 사는 친구들도 있을 수 있겠다.

 

어쩌면 그런 부모는, 어려서부터 견디기 힘든 환경의 피해자가 되셨거나, 아니면 가정을 이루고 나서 열심히 살아보려 애썼지만 현실의 힘든 벽을 넘지 못해 그렇게 모난 성격을 갖게 되었을 수도 있다.

 

오랜 환경의 영향을 받으며 만들어진 성격을 고치기는 어렵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런 환경에서 자란 친구는 부모처럼 되기 쉽다. 욕하면서 닮는다고 하지 않던가? 이렇게 되면 대를 이어가며 악순환이 된다. 대개 무자비한 범법자들일수록 그런 환경의 희생자인 경우가 많다.

 

어떻게 하면 그 악순환을 끊어낼 수 있을까? 결코 쉽지 않지만, 그런 거친 환경에서 살아가는 젊은 벗들에게 긍정적인 의미의 오기를 가져달라고 부탁하고 싶다. “나는 결코 이런 악순환의 희생자가 되지 않겠다.”는 그런 오기 말이다.

 

혹 그대가 그런 환경의 피해자라면, 훗날 엄마 아빠가 되었을 때 지금의 일을 단지 지나간 추억으로 회상할 수 있도록, 환경에 눌리거나 포기하지 말고, 그 어렵고 힘든 환경을 꼭 넘어서달라고 부탁하고 싶은데, 그래도 될까?

 

그러려면 남들보다 배는 더 노력하고 참아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대가 만일 그 환경을 딛고 일어설 수만 있다면, 그대는 그만큼 더 깊고 넓고 큰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틀림없이 그럴 것이다.

 

류상태 선생은 장로회신학대학원 졸업이후 20여 년을 목회자, 종교교사로 사역했지만, 2004년 ‘대광고 강의석군 사건’ 이후 교단에 목사직을 반납하였고, 현재는 종교작가로 활동하면서 ‘기독교의식개혁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지은 책으로는 [교양으로 읽는 세계종교] [소설 콘스탄티누스] [신의 눈물] [한국교회는 예수를 배반했다] [당신들의 예수]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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