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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신영복 선생, 삶의 철학 잊지못합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김철관   기사입력  2016/01/17 [09:16]
▲ 지난 2011년 9월 30일 인문학강연 모습이다.     © 인기협


“신영복 선생의 명복을 빕니다.” 

성공회대 석좌교수인 신영복 선생이 15일 오후 10시 10분경 자택에서 향년 75세로 별세했다. 고 신영복 선생은 통일혁명당 사건 당시, 박정희 정권 중앙정보부가 반국가단체 혐의를 씌워 20년 20일을 감옥에서 보내게 했고, 이 기간 동안 고문과 고통의 세월을 보냈다. 서울 올림픽이 열리는 해인 88년 출소해 89년 성공회대에서 강의를 시작했다. 출소 10년 후인 98년에 사면으로 공민권을 회복하며 자유인이 됐고, 정식 성공회대 교수로 임명됐다. 

고 신영복 선생과의 인연은 2000년 때부터 성공회대학교가 있는 서울 구로구 <구로타임즈> 취재부장으로 기사를 쓸 때였다. 

특히 두 번에 걸친 강연이 아직도 마음속에 남아 있다. 제가 직접 보고 들은 첫 강연은 2002년 1월이고, 두 번째 강연은 2011년 9월이다. 첫 번째 강연은 <인터넷한겨레> 하니리포터로 ‘신영복의 노동자 철학’이란 제목으로 기사를 남겼고, 두 번째 강연은 <오마이뉴스> 뉴스게릴라로 ‘신영복 “사람이 사람중심의 세계 인식하는 것이 공부”’라는 제목으로 기사를 남겼다. 

새로운 천년인 밀레니엄을 알리는 2000년 1월부터 첫 발행한 당시 격주간이었던 구로지역 풀뿌리지역신문 <구로타임즈)>에서 비상임 취재부장을 맡으며, 취재를 위해 가끔 인근 구로구 항동에 있는 성공회대를 찾을 때가 있었다. 풀뿌리지역신문과 관련해 조언을 구하기 위해 신문방송학과 김서중 교수와 최영묵 교수도 가끔 찾았다. 그래서 이들 제자들이 <구로타임즈>에 와 취재 실습을 하기도 했다. 

당시 기억으로 신영복 교수는 성공회대 사회교육원을 맡아 원장으로 재직하고 있었다. 그래서 성공회대를 들릴 때는 가끔 안부를 묻기 위해 연구실로 가 인사를 하고 나왔다. 하지만 있을 때도 있었지만 없을 때가 더 많았던 기억이 난다. 구로지역에 대학이 3개가 있었는데, 동양공업전문대학, 한영신학대학교 그리고 성공회대학교였다. 

2002년 1월 당시 지역교육과 관련해 세 학교 총장 중 한 분을 모셔 <구로타임즈> 신년 인터뷰를 하기 위해 정한 곳이 바로 성공회대학교 총장이었다. 당시 이재정 총장(전 통일부장관)이 떠나고 후임인 김성수 성공회대 총장이 재직을 하고 있을 때었다. 방학 때인 1월 초순경 김성수 총장과 약속을 하고 총장실에서 인터뷰를 끝내고 나오는데 1층 복도에서 방학인데도 불구하고 학교에 나온 3~4명의 학생 중 한 학생이 창문 밖으로 보이는 ‘신영복 교수’를 가리키며, ‘저 분이 감방도 오래살고 강의도 잘하고 글도 잘 쓴데’라고 수군거렸다. 

그래서 신영복 선생이 걸어가는 모습을 보게 됐고, 곧바로 그를 따라 교수연구실로 향했다. 새해 인사를 하기 위해서였다. 연구실로 곧바로 따라가 “구로타임즈 취재부장입니다. 선생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고 전하자, 선생은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제가 며칠 후 연세대에서 강의가 있어 좀 준비하려고 잠시 들렸다”고 했다. 

▲ 2002년 1월 17일 연세대 강연 모습이다.     © 인기협


다음 약속 시간이 촉박해 인사를 건네고 곧바로 나오려고 하는데, 신 선생은 “민주노동당 노회찬 본부장이 ‘노동자 철학’에 대해 신년 강연을 해달라고 끈질기게 부탁해 17일(2002년 1월 17일) 저녁에 하기로 했어요”라고 말했다. 그래서 “알겠습니다. 저 가보겠습니다”라고 밝힌 후, 다른 취재 약속을 위해 나왔던 기억이 난다. 

이후 17일(2002년 1월) 저녁 7시 30분경 연세대 신인문대 대강의실을 찾았고, 강의를 시작하기 전 신영복 선생과 노회찬 민주노동당 서울지역본부장이 함께 대화를 하고 있는 모습을 목격하고 잠시 신 선생과 노회장 본부장에게 인사를 건넸다. 이날 500여명 수강생들이 강의실을 가득 메웠고 곧바로 신영복 선생이 ‘노동자의 사상과 노동자 실천’을 주제로 강연을 시작했다. 2016년 1월 15일 별세를 했으니 이틀 부족한 만 14년 전의 강연인 셈이다. 

당시 기억을 더듬기 위해 인터넷을 검색해 봤다. <구로타임즈> 취재부장을 맡아 <인터넷한겨레> 하니리포터로 활동할 때 쓴 신 선생의 강연 내용 기사를 발췌해 봤다. 

“인간이 가장 싫어하는 것이 낮은 곳인데, 물은 항상 낮은 곳으로 흘러간다. 바다가 가장 낮은 곳이다. 바다는 모든 물을 받아 주듯이 이렇게 하방연대를 해야 한다. 중심에 있는 사람들이 아닌 주변이나 변방에 있는 사람들이 연대를 하는 것이 하방연대이다.” 

두 번째의 강의는 <구로타임즈>에 글을 쓰지 않고 있던 한참 후인, 2011년 9월 30일 오후 7시 30분경 서울지하철노조 주최로 우연히 신영복 선생 인문학 강좌를 들을 수 있었다. 당시 서울 성동구 성동청소년수련관 무지개극장에서 성공회대 김창남 신문방송학과 교수, 박경태 사회학과 교수, 김진업 사회힉학 교수로 이루어진 ‘더 숲 트리오’와 신영복 석좌교수가 함께 꾸미는 무대였다. 당시 잠시 만나 “안녕하세요. 선생님 건강하시지요”라고 건네자, 신 선생은 “어떻게 지냈어요. 여기서 만나게 됐네”라고 반가워했다. 곧바로 신 선생은 강의를 시작했다. 당시 강연 내용을 발췌해 본다. 

“진정한 공부는 어디서든지 자기 변화에 노력해야 한다. 머리에서 가슴으로 가슴에서 발로 이어지는 자기 변화가 진정한 공부이다. 공부는 머리에서 가슴으로 가슴에서 발로 다른 사람과 함께 공존하는 것이다. 개인의 인격완성이 아니라 사회와의 관계를 만들어 내, 한 알의 밀알이 나무가 되고 숲이 된 것처럼 숲으로 만들어 내는 과정이 공부이다. 공부는 갇혀있는 생각(사고)을 깨뜨리는 것이다. 갇혀 있는 문맥을 깨뜨리는 것이다.” 

▲ 2011년 9월 인문학강좌를 '더 숯 트리오'와 함께 했다.     © 인기협

이날 신 선생의 강의가 끝나자 성공회대 교수로 이루어진 ‘더 숲 트리오’가 선생과 함께 토크쇼를 진행했다. 이후 선생과 직접 만난 적은 없다. 기사 인터뷰나 책을 통해 선생의 삶의 흔적을 가끔 확인 할 수 있었다. 

고 신영복 선생은 <감옥으로부터 사색> <나무야 나무야> <처음처럼> <더불어 숲> <강의> <청구회 추억> <변방을 찾아서> <신영복의 마지막 강의> 등의 저작을 남겼다. 김제동과 토크쇼 진행, 소주 회사가 신영복 글씨체 ‘처음처럼’을 써 1억 원을 성공회대에 기부했고, 이후 이 글씨체 덕분으로 10배가 넘는 수익을 냈다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고인은 살아 살아생전 자주 강조한 “개인이나 사회가 정치적으로 자주(自主), 경제적으로 자립(自立), 문화적으로 자존(自尊) 등 뼈대가 튼튼해야 한다”는 말씀이 가슴을 찡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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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6/01/17 [09:16]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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