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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숙 표절 <전설>은 일본 군국주의자의 영혼
[정문순 칼럼] 미시마 유키오의 <전설>, 표절은 작품이 아닌 작가를 훔치는 것
 
정문순   기사입력  2015/06/24 [20:24]

흑과 백을 분별하기 어려운 세상이다. 검은 것을 아무리 검다고 말해도 흰 것으로 보려는 애쓰는 사람들이 있다. ‘창비’와 ‘문학동네’ 평론가들은 여전히 표절 작가의 심사를 건드리기 싫은지 그녀를 두둔하고 변호하기 바쁘다.
 
작금의 문학 판은 비유컨대 말기암 진단을 받은 환자를 닮았다. 암 선고를 받은 환자의 첫 번째 반응은 대개 자신의 질병을 부인하는 것이라고 한다. 의사의 오진이 분명하다고, 자신한테 암이 떨어질 리 없다고 스스로 확신한다는 것이다. 치료가 하루라도 급한 터에 병을 부인하면서 병을 되레 키우는 일을 지금 한국 문단이 하고 있다.
 
어떤 작품의 표절 의혹을 제기하면 문단 일각에서 조건반사처럼 튀어나오는 반응은, 소재 정도야 닮을 수 있다는 것이다. 하늘 아래 새로운 이야기가 어디 있느냐면서 표절을 운운하려거든 두 작품에서 구체적으로 빼닮은 곳을 찾아보라고 한다. 그래서 구체적인 문구나 문장 배치의 닮음을 보여주면 나오는 반응은 이렇다. 낱말이나 용어가 유사한 정도로는 부족하다고, 표절 여부를 밝히려면 대상 작품들을 정밀하게 비교해야 한다고 한다.
 
작품의 몸통 차원에서 면밀한 분석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이들의 속셈이야 사실 뻔한 것이다. 표절을 밝히는 것은 전문가만이 할 수 있는 아주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암시함으로써 표절 논의가 퍼지거나 깊어지는 것을 차단하고자 함이다. 그러나 이 말은 일면의 무서운 진실을 담고 있다. 대상 작품들을 깊이 들여다볼수록 표절 혐의가 더 분명해지는 섬뜩한 진실과 만날 개연성이 높기 때문이다.
 
문장의 유사성만으로도 빼도 박도 못하는 표절 혐의를 벗을 수 없지만 두 작품을 뜯어볼수록 작가의식까지 닮아있음을 알게 되는 표절작이 있다. 신경숙이 미시마 유키오를 닮는다는 것이 가능할까. 군국주의 부활을 외치며 자살한 일본 극우 문인의 의식을 한국인이 갖고 있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다. 물론 아주 불가능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최소한 상식의 차원에서는 가능하지 않다는 것이다. <우국>(미시마 유키오)과 <전설>(신경숙)의 인물들은 도무지 ‘나’를 세계의 중심에 놓고 사고하는 근대인으로 보이지 않는다. 두 작품의 인물들은 타고난 본능도 없는 자동화된 기계처럼 행동한다.
 
<우국>의 신혼부부는 극우주의 작가가 이상적으로 형상화한 커플이요, 천황제 체제의 충실한 신민이다. 일왕을 위한다는 대의를 위해서라면 자살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남편과, 그의 죽음을 지켜보았다가 순사하는 아내는 욕망이라곤 한 톨도 없는 껍데기 개인일 뿐이다. <우국>의 부부는 처참하고 끔찍하기 이를 데 없는 자살 행위도 추호의 망설임 없이 강행한다. 죽음은 아름답다. 이념을 위해서라면 개인의 목숨은 초개와도 같은 것. 일제 군국주의가 카마카제의 자살 폭격 행위를 사쿠라 꽃이 지는 것에 빗댄 것과 같은 논리다.
 
한편 <전설>의 남자는 신혼인 자신을 놔두고 입대해 버린 친구들과의 의리를 지키기 위해 자원입대를 결행한다. <우국>의 남자가 신혼인 자신을 놔두고 친위쿠데타를 일으킨 친구들과의 의리를 지키기 위해 자살하는 것과 같다. 이들이 대의에 목숨을 바치도록 부추기는 것은 친구와의 의리다. 신혼인 아내와의 삶은 그것의 중요성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이념 때문에 자살하거나 죽을 길에 제 발로 들어가는 것은 평범한 인간의 심성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이다. 개인의 삶보다 대의에 목숨을 바쳐야 한다는 생각에 주체적 개인이 들어앉을 여지는 없다.
 
여자들도 마찬가지다. <우국>에서 자살하는 남편을 지켜보고 따라죽는 여자, <전설>에서 남편의 참전을 말리지 않으며 전장에서 실종된 그를 평생 기다리며 수절하는 여자는 주체적인 사고 체계가 작동하지 않는 기계나 진배없다. 특히나 수절하는 여자의 삶은 남편과 더불어 전시체제에 철저히 복무하는 인간 유형이다. 이럴 경우 전쟁은 피비린내 나는 처참한 비극이 아니라 ‘사과나무’ 그늘에서 누군가를 평생 기다리는 지고지순한 순정을 떠받쳐줄 수 있는 원동력일 뿐이다. <전설>은 군데군데 비참한 죽음이 나오긴 하나 그런 죽음조차 비극의 몸짓만 취할 뿐 기실 비극적이지 않으며 동화적이고 환상적인 ‘전설’ 같은 이야기를 받쳐주는 데 기여할 뿐이다. 
   
“두 사람이 자결한 뒤 사람들은 자주 이 사진을 꺼내 들어 바라보고는 이렇듯 나무랄 데 없이 아름다운 남녀의 결합이란 자칫 불길한 것을 품더라고 한탄하였다. 사건이 있은 후에 보려니까 그렇게 생각해서인지 금빛 병풍 앞의 신랑 신부는 그 더없이 맑은 눈으로 바로 눈앞의 죽음을 꿰뚫어 보고 있는 듯하였다.” -<우국>
 
“그들의 나무랄 데 없는 아름다움 앞에서 남자의 아버지인 저택 주인과 그들을 길러낸 유모만은 잠시잠시 아득해지곤 했다. 그들은 두 남녀의 완벽한 조화를 바라보며 각자 인생의 뒷면을 생각하곤 했다. 어떤 쓰라림이 그들 사이에 끼어들지나 않을까, 하는. 그땐 저들이 저렇게 아름다운 만큼 쓰라림이 관통해가는 자리 또한 꼭 저렇게 뚫어질 거라는 두려움을 느끼곤 했다.
-<전설>
 
<우국>에서 “더없이 맑은 눈으로 바로 눈앞의 죽음을 꿰뚫어 보고 있는” 신혼부부의 과감함이 <전설>에서는 아름다운 두 남녀 사이에 쓰라림이 관통한다는, 덜 과감한 표현으로 바뀌었다. 어떻든 공통점은 아름다움 속에 비극이 있고, 비극과 아름다움이 일체라는 것이다. 비극이 아름다움을 통해 완성될 때 비극은 더 이상 비극이 아니다. 죽음은 슬프지만 아름답다. 죽음의 미화, 개인의 망실. 이것의 종착역은 끝내 파시즘이다. 결국 신경숙은 미시마 유키오의 파시즘 사상까지 베꼈다고 할 수 있다. 문장 몇 개를 표절한 것이 아니라 작가의 영혼을 표절한 것이다. <전설>이 <우국>의 표절이 아니라 신경숙의 독창적인 발상이라면 그것이 오히려 더 이상한 일이다. 신경숙은 파시즘적 사고를 가진 사람인가?
 
<전설>이 <우국>의 문장 일부를 가져오긴 했지만 다른 점이 훨씬 많으니 표절로 보기 힘들다고 주장하는 비평가들이 있다. “문장이나 문구 몇 개쯤이야”하는 발상도 위험하기 짝이 없지만, <전설>은 <우국>의 문장 몇 개만 원저자의 허락 없이 가져다 쓴 것이 아니다. 신경숙은 미시마 유키오의 사상체계까지 그대로 베꼈다. 그녀가 표절한 것은 <우국>의 몇 문장이 아니라 작가의 무시무시한 사상이요, 미시마 유키오라는 사람의 영혼 자체라고 할 수 있다. 표절은 문장 몇 개를 훔치는 것이 아니다. 다른 작가의 생각, 사상체계, 나아가 작가 그 자체를 표절하는 행위다.
 
한국 문단의 표절 논쟁은 아직 초보적인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 표절을 한사코 인정하지 않으려는 이들 때문에 문장이나 구절의 닮음을 찾아내는 데서 한 발짝이라도 더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표절이 남의 사상을 훔치는 행위라는 인식은 아직 요원하다. 겉으로 드러난 부분이 아닌 보이지 않는 부분의 교묘한 훔치기를 찾아내는 작업도 드물다.

 

비평가는 남의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찾아내는 것이 일인 사람이다. 그러나 한국의 비평가들 중에는 보이는 것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신경숙의 표절 혐의를 더는 부인할 수 없게 되자, 신경숙이 "무의식적으로" 표절했을 것이라고 하고 "의도하지 않은" 표절을 했을 것이라고 말하는 평론가들이 있는 한, 흑과 백을 분별하기 어려운 세상이다. 아비를 아비라고, 형을 형이라고 부르지 못했던 홍길동의 답답한 심정이 그랬으리라.  

* <대자보> 편집위원, 문학평론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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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5/06/24 [20:24]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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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문순 2022/03/30 [10:20] 수정 | 삭제
  • 저자로서 덧붙일 말이 있습니다. 저는 2000년 문예중앙에 실은 평론에 신경숙의 표절을 주장하면서 본문 각주에서 신경숙의 사상은 미시마 유키오의 파시즘과 친연성이 감지된다고 썼습니다. 이 대목은 제 고유의 것이 아니라 신경숙 소설에 대해 저와 문학적 입장을 같이하는 한 분이 사석에서 저한테 한 발언을 무단으로 옮긴 것입니다. 세월이 흘러 대자보에 실린 이 글도 그 글의 연장선상에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표절 혐의를 시비 걸면서 정작 저 자신이 똑같은 일을 저지른 점에 대해 통감하며 반성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