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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최초 발포명령은 누가?'…35년째 감춰진 진실
 
박지환   기사입력  2015/05/18 [23:21]

1980년 5월 21일 오후 1시 광주 전남도창 앞 광장.


시민들을 향한 계엄군의 총구에서 일제히 불꽃이 일었다.


도청 앞에는 11공수(최웅 준장) 61, 62, 63대대와 7공수(신우식 준장) 35대대가 대기중이었다.
갑작스런 발포로 이날만 시민 54명이 현장에서 숨지고 500여명이 다쳤다.


이후 27일 새벽 계엄군이 도청을 유혈진압하고 광주 전역을 장악할 때까지 민간인 165명(정부 집계)이 사망하고 1600여명이 부상했다.


하지만 최초 발포 명령을 누가 언제 왜 내렸는지에 대한 진실은 여전히 35년 전 광주 금남로 안에 갇혀있다.


1995년 '5.18특별법'이 제정돼 합동수사본부가 꾸려지고 2007년 국방부 과거사 진상규명위원회 조사까지 이뤄졌음에도,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이 21일을 전후해 자위권 발동을 주장했다는 사실만 확인했을 뿐 최초 발포 명령자는 끝내 밝혀지지 않았다.
 
최고 지휘권자였던 이희성 계엄사령관(당시 육군참모총장)은 "당시 지휘권이 윤흥정 전교사령관이나 후임인 소준열 전교사령관에게 있었다"고 말했지만 두 사람은 이미 고인이 됐다.
 
1980년 5월 21일 오후 주영복 당시 국방부 장관, 이희성 계엄사령관, 정도영 보안사 보안처장 등이 자위권 발동을 결정했고 계엄군은 이를 발포 명령으로 받아들였다는 법원 판결이 나왔지만 최초 발포 명령자는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군 수뇌부로 하여금 자위권 발동을 결정하게 한 사람이 전두환이라고 아니 볼 수 없고 이희성, 주영복이 그 요구를 적극 수용했다"는 판시도 전두환 전 대통령에게 직접적인 발포 책임을 묻는 데까지 나아가지 못했다.
 
"왜 쏘았지, 왜 찔렀지, 트럭에 싣고 어디 갔지"라는 '오월의 노래' 가사 한 대목은 여전히 답을 찾고 있다.


CBS노컷뉴스 취재진이 만난 최병진(56.남) 5.18서울기념사업회 부회장과 오용환(60.남)씨도 35년째 그 물음을 품고 있다.
 
◈ 계엄군 총탄에 맞은 시민 구하다 자신도 피격


1980년 5월 광주.


전남대 건축학과 4학년생이었던 오용환씨는 21일 오전 친구와 함께 전남도청 앞으로 나갔다.
졸업작품 준비로 바빴지만 전날밤 도청쪽에서 총성과 싸이렌 소리가 들린 게 심상치 않았고 역사의 현장에 함께 하지 못하는 건 비겁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도청 앞에서 군인들과 대치하고 있을 때 갑자기 총소리가 벼락치듯 들렸다.


"처음에는 공포탄인 줄 알았어요, 공포탄이면 하늘로 쏘는 거잖아요, 그런데 조금 있으니까 가로수 잎이 우수수 떨어지는 거예요."


도청을 에워쌌던 시민들이 하나둘씩 픽픽 쓰러지는 게 오씨의 눈에 들어왔다.


분노한 시민들 일부가 버스와 택시 등을 몰고 계엄군 쪽을 향해 돌진했다.


"조금 이따 시민들이 버스를 타고 돌진하는데 직진하는 버스 운전수가 총에 맞아 차에서 비실비실 내리더라고요. 가만히 놔두면 죽겠다는 생각이 들어 저도 모르게 뛰쳐나가 총 맞은 사람을 부축해서 나오는데 저에게 조준사격을 한 거예요."
 
왼쪽 무릅 7cm 위쪽을 관통당한 오씨는 바로 현장에서 까무라쳤다. 친구가 길바닥을 엉금엉금 기어와 뒷덜미를 잡아 끄집어내 기독병원으로 옮겨져 간신히 목숨은 건졌지만 동맥이 끊긴 다리 일부를 절단했다.
 
오씨는 당시만 생각하면 치밀어오르는 화를 참을 수 없다고 했다.


"총 맞았을 때는 내 아버지가 낸 세금으로 만든 총으로 맞았다는 배반감이 컸습니다. 제가 폭도짓을 한 것도 아니고 사람을 구해서 나오는데 그 사람을 쏜다는 건 전쟁터에서도 비인도적인 거잖아요."
 
최초 발포명령자가 아직까지 모호한 것에 대해 오씨는 "우리들은 역사 청산 의지가 약하고 책임지는 사람도 없다"며 분통을 터뜨렸다.


오씨는 80년 광주를 가능하면 떠올리고 싶지 않다. 가족들도 오씨 눈치만 보며 일부러 80년 광주 얘기를 잘 하지 않는다고 했다.


"지나간 건 지나간 대로 한 귀퉁이에 몰아넣어 망각 속에 집어넣지 않으면 오늘을 살 수 없어요. 제대로 된 사과는 바라지도 않아요. 다만 이런 비극이 두번 다시 생기지 않도록 밝혀지지 않은 부분들은 규명돼야 합니다."
 
◈"발포명령자도 규명 못하니 '북한 사주' 흑색선전 난무하죠"


"비상계엄 해지하라", "전두환 물러가라", "휴교령 철회하라", "김대중 석방하라"


5.18 서울기념사업회 부회장인 최병진씨는 1980년 5월 16일부터 19일까지 전남대와 도청을 오가며 시위대를 이끌었다.


당시 전남대와 조선대 총학생회 간부들은 수배령이 떨어진 상황이어서 단과대 학생회 활동을 하던 최씨가 시위대 앞에 서서 구호를 외치고 노래를 불렀다.
 
이후 자신에게도 수배령이 내려진 사실을 안 최씨는 가족들에게 이끌려 형수집에서 며칠을 은신했다.


21일에는 벼락치는 듯한 총소리도 들었다.


도저히 숨어만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한 최씨는 23일 YWCA 사무실을 향했고, 총에 맞은 이들이 한둘이 아니라는 얘기를 듣고는 충격에 빠졌다.


이어 도청 앞 범시민궐기대회에서는 분수대 위로 올라가 직접 사상자 수를 발표했다.


"그걸 어떻게 표현을 할 수 있을까요. 정확히 기억 못하지만 그때 사상자 수가 정말 많았습니다. 발표를 하면서도 '이게 지금 맞나'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많았어요."
 
이후 붙잡혀 505보안대를 거쳐 상무대로 끌려간 최씨는 몽둥이찜질 등 가혹행위를 당했다.
시위대를 이끈 이유와 도청 광장에서 사망자 발표를 한 게 누구의 지시에 따른 것이냐는 추궁이 이어졌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돈을 받아 배후조정을 했다는 각본에 끼워맞춰지도록 수도 없이 몽둥이 찜질을 당했다고 했다.


5월의 진실이 여전히 가려져 있다며 분노하는 최씨 역시 "모든 희생자들의 공통적인 의문은 도대체 최초 발포 명령자가 누구냐 하는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또, 당시의 아픔을 겪은 사람들이 하나 둘 세상을 떠나기 전에 역사적으로 매듭지어져야 할 것들은 서둘러 매듭을 지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법적인 규명 자체가 제대로 되지 않으니까 보수단체에서 북한이 사주했다고 흑색선전까지 하잖아요. 우리 청소년들은 그걸 보고 '정말 그런가 보다'하고 있어요."
 
5.18 민주항쟁이 폄하되고 왜곡되고 난도질당하는 게 서글프다는 최씨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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