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IT >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로 보내기 글자 크게 글자 작게
에릭 슈밋, '그림자 리더쉽'으로 구글제국 완성
[인물포커스] IT업계의 '늙은 여우', 구글제국을 이끄는 경영의 귀재
 
김환표   기사입력  2015/04/07 [02:40]

'컴퓨터에 미친 괴짜'

 

구글의 회장 에릭 슈밋(Eric Schmidt)은 억세게 운 좋은 사나이일까? 아니면 천재일까? 슈밋이 IT 업계에서 승승장구했기에 때문인지 이런 의문을 가진 사람들이 적지 않은 것 같다. 예컨대 박영환은 슈밋에게는 "천재이거나 억세게 운 좋은 경영자"라는 수식어가 따라 붙는다고 말한다.1 『창조경영 구글』의 저자 장위안창(張遠昌)은 슈밋이 IT 업계에서는 보기 드물게 행운과 배짱 모두를 한 손에 쥔 인물이라고 평한다. "남들은 힘들게 고생하면서도 거머쥐기 힘든 성공의 기회를 에릭 슈밋은 대어를 낚듯 연이어 낚아챘"는데, 이것은 행운과 배짱에 힘입은 바 크다는 것이다.2 슈밋의 이력을 보고 있노라면 장위안창의 해석에 일리가 있다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다. 그의 사전에서 실패라는 단어를 찾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게 전부라고 말하기에는 무언가 허전하다. 행운과 배짱은 IT 업계뿐 아니라 다른 영역에서도 성공을 일구기 위한 필수적인 요소라 할 수 있으니 말이다. 슈밋이 거둔 성공의 비결은 대체 무엇일까?

 

에릭 슈밋은 1955년 워싱턴 D.C.에서 태어났는데, 애플의 스티브 잡스, 마이크로소프트의 빌 게이츠와 동갑이다. 리처드 닉슨 정부 때 재무부에서 근무하기도 했던 그의 아버지는 존스홉킨스대학의 국제경제학 교수였고, 어머니는 심리학 석사 출신이다. 이렇듯 학구적인 환경에서 성장한 슈밋은 학업에서는 물론이고 고등학생 시절 장거리 육상선수로 활약했을 만큼 운동에도 소질이 있었다. 그는 스포츠광이기도 하다. 특히 열광적인 민간 파일럿으로 알려져 있는데, 구글이 흥미로운 여러 대의 항공기들을 소유한 것을 두고 슈밋의 이런 개인 취향과 연결시켜 해석하는 시각도 있다.3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프린스턴대학 건축학과에 입학했지만 워낙 컴퓨터 프로그래밍을 좋아했던 까닭에 곧 전기공학과로 전과했다. 그는 스스로 '컴퓨터에 미친 괴짜(computer nerd)였다'고 말하는데,4 이 시절 그는 거의 매일 밤잠을 자지 않고 프로그램을 짰다. 그건 다른 학생들이 잠을 자느라 밤이 되면 컴퓨터 속도가 빨라졌기 때문이다.5 그는 여름이 되면 텔레콤 업계의 대가로, 당대 최고의 연구소였던 벨연구소에서 일했다. 이곳에서 대학생 신분으로 역사에 남을 프로그램을 하나 완성시켰으니 바로 '렉스(Lex)'라는 소프트웨어다. 렉스는 프로그래밍 언어를 기계가 이해할 수 있는 형태로 만들어주는 컴파일러라는 소프트웨어를 만들 때 반드시 이용해야 하는 도구다.

 

1979년 프린스턴대학을 졸업한 슈밋은 컴퓨터공학을 좀더 심도 있게 공부하기 위해 버클리 캘리포니아주립대학(UC 버클리)에 진학해 1982년 석사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여름이면 마우스, 레이저 프린트, 이더넷(Ethernet) 같은 기술을 만들었고 구이(GUI) 개념을 탄생시킨 제록스 파크(Xerox PARC)에서 다양한 연구를 경험하며, 컴퓨터공학의 이론과 실제를 습득했다. 1983년 선마이크로시스템스에 입사해 14년간 일했는데, 이 시절 프로그래밍 언어 자바 연구를 도왔으며 선의 최고기술책임자(CTO)로서 능력을 인정받아 1997년 리눅스 업체 노벨의 CEO가 되었다.6

 

구글의 CEO가 되다

 

노벨에서 그의 생활은 즐겁지 않았다. 실리콘밸리에 있는 집에서 노벨이 있는 유타주까지는 거리가 멀어 통근하는 일은 힘들었고 노벨이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7 그는 노벨 경영진들과 불화를 겪기도 했다. 슈밋이 CEO로 부임한 1997년 노벨 경영진은 4분기 매출액이 목표액에서 1,460만 달러나 부족하자 이를 분식회계를 통해 숨기자고 제안했는데, 슈밋이 이를 거절하고 사실 그대로 발표하면서 불거진 갈등이었다.8 이 때문에 노벨의 주가는 곤두박질쳤고 회사는 파산 위기에 몰렸는데, 슈밋 인생에서 최대의 위기라 할 만한 시기였다. 훗날 슈밋은 "파산 위기를 겪어보는 것은 강한 CEO가 되는 데 꽤나 좋은 경험이더군요"라고 했다.9

 

2000년 3월 인터넷 업계에 불어닥친 이른바 '닷컴 버블 붕괴' 쇼크는 슈밋에겐 행운으로 작용했다. 전도유망하다고 박수갈채를 받던 수많은 신생 업체들이 줄줄이 파산하는 사태가 빚어진 가운데 구글이 CEO 영입에 나섰기 때문이다. 2000년 10월 선을 보인 구글의 검색어 광고 '애드워즈(AdWords)'가 시간을 벌어주었지만, 여전히 가시적인 수익을 창출하지 못하고 있는 구글을 우려 섞인 눈으로 바라보고 있던 구글 투자자들은 구글의 공동창업자 래이 페이지와 세르게이 브린에게 노련한 CEO를 영입하라고 채근하고 있었다.10 두 사람은 1999년 6월부터 2001년 초까지 18개월 동안 무려 75명이 넘는 CEO 후보자들을 심사했고 투자자들의 압력 이후에만 15명의 CEO 후보자들을 인터뷰했지만,11 CEO 영입은 하지 않았다. 당시 그들은 CEO 영입을 별로 내켜하지 않았다. 정지훈에 따르면, "창업자들은 약속을 지켜야 했기에 마지못해 CEO 후보 여러 명과 미팅을 했지만 장난스러운 인터뷰를 하다가 '기술을 모른다'는 핑계로 대부분 거절했다."12

 

에릭 슈밋이 구글의 CEO가 된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은 구글의 주요 투자자였던 존 도어였다. 그는 슈밋이 컴퓨터 공학 박사인데다 자아가 강하지도 않아 공동창업자와 협력할 수 있겠다고 생각해 강력하게 밀어붙였다.13 2000년 12월 슈밋이 구글 본사를 찾아 공동창업자를 만났다. CEO 인터뷰는 아니었지만 그들은 슈밋을 시험하고 들었는데, 그건 바로 노벨이 전략적으로 인터넷 속도를 높이기 위해 개발한 프록시 캐시(Proxy Cache)에 대한 기술적 비판이었다. 이들은 초고속 인터넷이 늘어나면 무용지물이 될 기술에 투자해 결과적으로 회사에 손해를 입힌 것 아니냐고 몰아붙였다. 사실상 그들은 슈밋에게 모욕을 준 것이었는데, 이런 상황에서도 슈밋은 1시간 30분가량 차분함을 잃지 않으면서 그들에 맞서 격론을 펼쳤다.

 

정식 CEO 인터뷰가 아니었는데도 공동창업자는 왜 슈밋을 모욕하면서까지 공격하고 슈밋은 화를 내지 않았던 것일까? 이와 관련 강준만은 슈밋의 모습은 "바로 페이지․브린이 원했던 자격 조건이었는지도 모르겠다"고 해석한다. 버르장머리 없는 악동(惡童)과 같은 젊은 창업주들의 무례도 별것 아닌 것처럼 받아넘겼던 슈밋의 대응에 공동창업자가 깊은 인상을 받았다는 것이다. 실제 그런 측면이 있었다. 예컨대 존 바텔은 『검색으로 세상을 바꾼 구글 스토리』에서 "세르게이 브린과 래리 페이지의 테스트를 통과하려면 분명히 엔지니어링 방면에 재능을 가지고 있어야 했고, 확연히 드러나는 그들의 통제 성향을 견뎌낼 수 있어야만 했다"고 말한다.14

 

페이지․브린의 홀대와 '꼭두각시' 논란

 

2001년 슈밋이 구글에 합류했을 때 주변에선 그가 '꼭두각시' 역할에 그칠 것이라고 수군댔다. 예컨대 벤처자본가이자 전직 『포천』 칼럼니트스 스튜어트 앨솝은 『GQ』와의 인터뷰에서 󰡒에릭은 자아가 강하지 않다. 오만가지 자잘한 모욕을 기꺼이 감수하고서라도 인형 CEO가 될 것이다󰡓고 꼬집었다. 그런 말이 나올 만도 했다. 페이지․브린은 슈밋을 CEO로 영입한 후 그에게 책상 2개만 놓인 작은 사무실을 주었는데, 이 공간마저 그가 입주하기 전에 한 엔지니어가 자리를 잡아 어쩔 수 없이 슈밋은 이 엔지니어와 함께 방을 사용해야 했으니 말이다.15

 

페이지․브린은 왜 이렇게 슈밋을 홀대했던 것일까? CEO 영입을 달가워하지 않았던 이들이 슈밋에게 권력 관계를 확실히 보여주기 위해 한 행위는 아니었을까. 슈밋은 자신이 구글에 간 것은 󰡐어른의 감독󰡑이 필요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는데, 이는 구글 투자자들이 바라던 것이었다.16 하지만 페이지․브린의 생각은 달랐다. 자신들이 세운 회사에 '어른의 입김'이 행사되는 것을 반기지 않았던 이들은 CEO 영입을 '울며 겨자 먹기'와 비슷한 행위로 인식했다. 예컨대 2002년 말 슈밋을 고용한 이유를 설명하는 자리에서 페이지는 다소 떨떠름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기본적으로 어른의 감시가 필요하긴 했어요. 그래야 투자자들이 더 신뢰했죠. 자기 돈 수백만 달러를 훌리건 두 명에게 맡길 수는 없지 않아요?"17

 

어쩔 수 없이 슈밋을 CEO로 영입했지만 페이지․브린은 슈밋을 신뢰하지 않았다. 따라서 통제권을 포기할 생각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수적인 우위를 앞세워 자신들이 슈밋을 통제하고자 했다. 이와 관련 존 바텔은 2005년 "분명 그는 래리 페이지와 세르게이 브린의 '상사'는 아니었다"면서 이렇게 말한다.

 

"에릭 슈밋은 항상 세 사람의 합의에 만족한다고 말했지만, 그의 측근들은 그런 말을 믿지 않았다. 측근들은 그가 근래 역사상 가장 성공한 회사의 CEO 직책을 수행하고 있긴 하지만, 한편으로는 2대 1로 수적으로도 열세인 두 젊은 창립자들의 변덕에 맞춰주는 것이 그리 쉽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다양한 소식통들에 따르면 세르게이 브린과 래리 페이지는 실제로 수적으로 우위인 위치를 이용했다고 한다."18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벤처캐피털 업계에는 구글의 이사회가 페이지와 브린을 통제하지 않는 슈밋의 태도에 좌절했다는 소문도 떠돌았다. 다른 해석도 있기는 하다. 『구글웨이』의 저자 리처드 L. 브랜트는 슈밋이 처음 2년 동안 CEO라기보다는 부서장처럼 행동했지만 이는 한없이 저자세의 경영자 역할을 한 것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니었으며, 오히려 개입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에 그랬던 것으로, 슈밋이야말로 진정한 역할 모델이었다고 말한다.19 어떤 해석이 맞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브랜트의 해석에 동의하는 사람은 한 명 있으니, 그건 바로 슈밋이다. 2005년 슈밋은 "페이지와 브린이 강압적으로 굴지 않느냐"는 질문을 받자, 이렇게 답했다. "그들과 일하기 싫으면 안 하면 되지요. 노예제는 오래전에 불법화되지 않았던가요?"20

 

슈밋의 그림자 리더십

 

초창기 홀대를 받았던 슈밋이 페이지․브린에게서 인정을 받았던 이유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슈밋은 페이지․브린이 하기 싫어하는 일에서 자신의 역할을 찾았다. 예컨대 엔지니어 출신인 페이지․브린은 재정분석가나 기자와 만나고, 산업과 정부를 구글과 연결하는 역할을 혐오스러운 업무로 생각했는데, 슈밋이 이런 역할을 잘 수행한 것이다. 한 구글 간부는 페이지․브린은 "두 사람이 하기 싫어하는 일을 에릭이 모조리 도맡았기 때문"에 슈밋에게 만족했다고 말한다.21

 

게다가 슈밋은 자신을 잘 드러내지 않았다. 이른바 '그림자 리더십'이었다. 장위안창은 "자부심에 가득 찬 페이지와 브린 앞에서 슈밋은 한 번도 자신을 내세우는 법이 없었다. 그는 오히려 투명인간과 같은 CEO가 되길 원했다. 자신은 각종 언론매체의 인터뷰를 피하는 대신 페이지와 브린이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나섰다"면서 슈밋의 능력을 극찬한다.

 

"슈밋이 판단하기에 그 두 사람은 회사 이미지를 향상시킬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홍보 수단임에도 지금껏 그 역량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던 것이다. 슈밋의 최우선 임무는 구글과 두 명의 창립자를 최대한도로 활용하여 수익을 창출하는 일이었다.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다'라는 말도 있지 않던가. 개성이 강한 두 천재 엔지니어를 휘어잡는 일은 슈밋처럼 학식과 경력을 겸비한 베테랑만이 가능한 일이었다."22

 

슈밋이 겸손한 리더이자 노련한 협력자라는 평을 듣게 된 데에는 그의 독특한 화법도 작용했을 것이다. 존 바텔에 따르면, "그는 웃어야 할 때와 정중해야 할 때, 침묵을 지켜야 할 때와 어려운 질문에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대답해야 할 때를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마치 일본의 사무라이들처럼 미묘하면서도 유머러스한 두 가지 뜻으로 해석되는 말들을 구사하곤 했는데, 이것은 흔히 재능 있는 실리콘밸리의 엔지니어들에게서 볼 수 있는 우월감이 그에게선 잘 드러나지 않게 하는 역할을 했다."23

 

이런 해석이 시사하듯, 슈밋은 공식적으로 발언해야 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설명하는 데 매우 날카로운 능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비판적인 질문을 슬쩍 비켜나가는 노련함도 자주 보였다. 예컨대 2008년에 발생한 구글의 프라이버시 논란을 살펴보자. 당시 브린은 개인정보 보호 문제에 관해 소비자들이 왜 구글을 믿어야 하느냐는 질문을 받고 그 질문 자체가 매우 어리석다는 어투로 반박해 사용자들의 반발을 샀다. 하지만 슈밋은 같은 질문에 대해 사생활 침해 우려를 충분히 인정하면서도 구글의 비즈니스는 사용자들의 신뢰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점을 부드럽게 강조하며 반발이 발생하지 않도록 대처했다.24 이런 이유 때문일까? 스콧 클리랜드․아이라 브로드스키는 이사회 의장이라는 슈밋의 직위에 '수석 심리학자'라는 직함을 덧붙여도 좋을 듯하다고 말한다.25

 

모든 것은 결과가 말해주는 것일까? 슈밋의 합류 이후 구글은 놀라운 성장을 하며 세계 최고의 기업으로 성장했기 때문인지, 페이지․브린의 모욕과 무시 속에서도 자신의 역할을 찾아 묵묵히 일했던 슈밋에게는 찬사가 쏟아졌다. 슈밋에게는 'IT 업계의 늙은 여우', '칭송받지 않은 영웅'이라는 타이틀이 따라붙었다.26 2006년 12월 18일 미국의 경제 주간 『비즈니스위크』는 슈밋이 5년 전 적자 상태의 '벤처 기업' 구글의 CEO로 영입되어 1,500억 달러의 초대형 기업으로 키웠다며, 그를 '올해의 CEO'로 뽑았다.27

 

'어른'의 통제는 필요 없다

 

2011년 1월 20일 구글은 전년도 4분기 실적 발표를 하는 자리에서 4월 4일부터 페이지가 대표이사를 맡아 경영을 지휘하고 슈밋은 대표이사에서 회장으로 물러난다고 밝혔다. 슈밋은 "구글에 더이상 '어른'의 통제는 필요 없다"고 했다. 10년 전 자신이 CEO에 취임할 당시 페이지․브린이 20대에 불과해 자신과 같은 '어른'이 필요했지만, 이젠 페이지가 직접 경영에 나서도 충분하다는 이야기였다. 슈밋은 구글 공식 블로그를 통해 CEO 교체는 회사 내부의 의사결정과 전략수립 방향을 좀더 나은 방향으로 조정하고, 경영진의 책임을 분명히 하기 위한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이라며 자신은 평소 관심이 있었던 분야인 협상, 제휴, 정부관계 등 대외업무에 전념할 예정이라고 말했다.28

 

하지만 슈밋의 공식적인 입장 표명을 액면 그대로 믿는 사람은 적었다. 슈밋이 구글 내부의 권력투쟁에서 페이지․브린에게 백기를 든 것으로 보는 시각이 우세했다. 예컨대 『구글드』의 저자 켄 올레타는 2011년 1월 21일 『뉴요커』 인터넷판에 실린 「에릭 슈밋 왜 물러났는가」라는 칼럼에서 중국 문제를 놓고 페이지․브린 두 창업자와 벌인 갈등이 사임의 결정적인 이유로 작용했다고 말했다. 1년 전 중국 시장을 사수해야 한다는 뜻을 굽히지 않았던 슈밋에 맞서 중국의 검열에 반대해 철수하자는 의견을 내놓은 페이지․브린이 일방적으로 중국 철수를 감행했는데, 이 사건을 계기로 슈밋이 구글을 떠나기로 마음먹었다는 것이다.29 실제 중국의 인터넷 검열 시스템인 만리장성 방화벽(the Great Firewall of China) 때문에 구글이 2006년 중국에 'google.cn'을 개설할 때 자체 검열 문제를 두고 페이지․브린과 슈밋 사이에 격론이 벌어졌으며, 이후로도 이를 둘러싼 논쟁은 계속되었다. 러시아 태생으로 언론 자유의 소중함을 알아 검열에 반대한 브린 측과 사업의 합리성․실용성을 중시하며 검열을 받아들이자는 슈밋 측 간의 대립이었는데, 2009년 12월 구글과 중국 내 20개 미국 회사가 해킹당하는 일이 벌어지면서 브린 측이 힘을 얻어 구글은 중국 시장에서 철수했다.30

 

슈밋이 IT 업계의 트렌드로 떠오른 소셜 서비스와 로컬 서비스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해 밀려났다는 해석도 있다. 김광현은 구글은 페이스북과 트위터가 주도하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시장과 소셜 커머스 분야에 진출하고자 했지만 이게 잘 안 되었고, 모바일 플랫폼 사업도 지진부진함을 면치 못하자 이런 현상을 답답해했던 페이지가 칼을 뺀 것이라고 해석한다.31 실제 페이지는 구글의 미래가 모바일에 달려 있다고 생각했지만, 슈밋은 모바일에 미온적이었다. 이 때문에 페이지는 슈밋에게는 일언반구의 상의도 없이 브린과 함께 2005년 8월 17일 모바일 소프트웨어업체인 안드로이드(Android)를 인수했으며, 8월 말에는 인터넷 전화 겸 메신저 서비스인 구글 토크(Google Talk)를 출시해 정식으로 통신시장에 진출했다.32 훗날(2013년) 슈밋은 블룸버그TV와의 인터뷰에서 "내가 저지른 가장 큰 실수는 SNS 열풍을 제대로 감지하지 못한 것"이라며 "다시는 같은 실수를 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그는 "굳이 변명을 하자면 구글이 다양한 분야에서 여러 가지 일을 하느라 바빴다는 것"이라면서 "제때 뛰어들지 못한 것은 내 책임"이라고 말했다.33

 

페이지․브린과의 이런 불화설 때문에 슈밋이 결국 구글을 떠나게 될 것이란 예측이 쏟아졌다. TV 쇼 진행자를 맡고자 한다는 이야기도 있었고, 오바마와의 정치적 인연 때문인지 정치에 관심이 많다는 설도 나왔다. 슈밋이 보유한 구글 주식 중 25억 달러에 달하는 320만 주를 매각하기로 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새 회사를 설립할 것이라는 말도 나왔다. 이런 수많은 설을 뒤로 하고 슈밋은 구글에 잔류했는데, 미국 언론은 슈밋이 지난 10년 동안 회사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1억 달러 상당의 주식과 옵션 형태의 보상금을 받게 되었다는 것을 잔류의 이유로 들었다.34 슈밋은 2001년 구글에 합류한 이후 지금까지 이런 대규모의 보상금을 따로 받지 않았다. 그래서일까? 1억 달러에 이르는 보상금이 슈밋의 발목을 잡은 것 아니냐는 해석도 나왔다.35

 

슈밋은 왜 한국을 자주 찾는 것일까?

 

슈밋은 한국을 자주 방문하는 편이다. 2007년 5월 30일 첫 방문을 시작으로 2011년부터 2013년까지 3년 연속 방문했다. 특히 2013년 방문에서는 한글에 각별한 관심과 애정을 드러냈다. 슈밋은 "세종대왕이 누구나 글자를 쉽게 배워 쓸 수 있게 하려고 한글을 만들었는데, 600년 전에 그런 시도를 했다는 것 자체가 굉장히 놀라운 일"이라면서 "한국이 디지털 기술에서 세계를 선도하는 힘이 바로 한글에 있다"고 강조했다. 이어 그는 "반만년의 한국사와 비교해 구글의 역사는 겨우 15년밖에 안 된다. 한국문화의 풍요로움에서 많이 배우고 싶다"며 "세종대왕의 염원을 이제 구글이 이어받아 전 세계인이 한글을 더 잘 알 수 있도록 하겠다"고 했다.36

 

슈밋은 왜 한국을 자주 찾으며 한국 문화를 예찬하는 것일까? 이것은 구글의 비즈니스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예컨대 구글은 2013년 7월 미국에서 첫 선을 보인 크롬 캐스트를 아시아 지역에서는 한국에서 최초로 선보였으며, 2014년 아시아의 첫 번째 스타트업 지원 공간을 한국에 설치하겠다고 발표했는데, 이런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는 말이다. 여러 면에서 한국은 구글에 매력적인 국가다. 비록 검색 시장에서는 맥을 못 추고 있지만 한국은 인터넷 환경이 좋을 뿐만 아니라 안드로이드와 유튜브 등 구글의 다양한 플랫폼을 보편적으로 이용하는 대표적인 국가다. 스마트폰 운영체제(OS)도 구글이 장악하고 있다. 거칠게 말해, 한국은 구글의 스마트폰 운영체제인 안드로이드가 지배하는 '안드로이드 공화국'이다.

 

2014년 1월 미국의 시장조사회사 스트래티지애널리틱스(SA)가 전 세계 주요 88개국을 대상으로 실시한 OS별 스마트폰 사용자 수와 점유율 조사에 따르면, 한국에서 사용되는 스마트폰 20대 가운데 19대는 구글의 안드로이드 OS 기반의 스마트폰이었다. 안드로이드 스마트폰 사용자 점유율은 93.4퍼센트였는데, 이는 조상 대상 국가 전체의 안드로이드 스마트폰 사용자 수 비율인 67.5퍼센트에 비해 25.9퍼센트포인트, 안드로이드 스마트폰 비중이 상대적으로 높은 아시아․태평양 지역 평균(74.3퍼센트)과 비교해도 19.1퍼센트포인트나 높은 수치다.37

 

구글 안드로이드 OS의 높은 비중은 구글의 콘텐츠 스토어인 구글 플레이의 수익으로도 이어진다. 애플의 콘텐츠 장터 앱스토어가 서양에서 강세를 보이는 반면 구글 플레이는 동양에서, 특히 한국과 일본에서 강세를 보이고 있는데 한국과 일본은 구글 플레이 매출 점유율에서 세계 1, 2를 차지할 만큼 비중이 높다. 한국인 대다수가 안드로이드 스마트폰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한국의 앱 개발자들 역시 안드로이드를 선호하고 있는 셈이다.38

 

상황이 이렇다 보니 슈밋으로서는 한국을 자주 방문하고 한국 문화를 예찬하는 것은 전혀 손해 보는 일이 아니다. 아니 한국인에게서 좋은 평판을 얻고 한국에서 ICT(information and communications technology․정보통신기술) 플랫폼 강자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비즈니스를 위한 이런 '립 서비스용' 발언을 자주 하는 게 좋다. 페이지․브린은 2004년 7월 슈밋과 한 가지 약속을 했다. 그건 슈밋이 향후 20년간 구글에서 같이 일한다는 것이다.39 20년 후인 2024년이면 슈밋은 69세가 되는데, 그때까지 구글을 위한 슈밋의 비즈니스는 계속 될 수 있을까? 그렇다면 한국에서 슈밋을 볼 날도 더욱 많아질 것이다.

 

1) 박영환, 「에릭 슈미트는 누구: 천재이거나 억세게 운 좋은 경영자」, 『이코노믹 리뷰』, 2006년 1월 5일.

2) 장위안창, 하진이 옮김, 『창조경영 구글』(머니플러스, 2010), 35~37쪽.

3) 재닛 로우, 배현 옮김, 『구글 파워』(애플트리태일즈, 2010), 61쪽.

4) 강지남, 「󰡒구글 핵심은 팀 경쟁력󰡓 에릭 슈미트 구글 회장」, 『신동아』, 2012년 11월호, 72쪽.

5) 켄 올레타, 김우열 옮김, 『구글드: 우리가 알던 세상의 종말』(타임비즈, 2010), 120쪽.

6) 켄 올레타, 김우열 옮김, 앞의 책, 121쪽.

7) 켄 올레타, 김우열 옮김, 앞의 책, 118쪽.

8) 정지훈, 『거의 모든 IT의 역사: 세상의 패러다임을 바꾼 위대한 혁명』(메디치, 2010), 288~289쪽.

9) 켄 올레타, 김우열 옮김, 앞의 책, 121쪽.

10) 찰스 아서, 전용범 옮김, 『디지털 워』(이콘, 2012), 81쪽.

11) 존 바텔, 이진원․신윤조 옮김, 『검색으로 세상을 바꾼 구글 스토리』(랜덤하우스중앙, 2005), 218쪽.

12) 정지훈, 앞의 책, 287쪽.

13) 스티븐 레비, 위민복 옮김, 『In The Plex: 0과 1로 세상을 바꾸는 구글 그 모든 이야기』(에이콘, 2011/2012), 121쪽; 정지훈, 앞의 책, 287~288쪽.

14) 존 바텔, 이진원․신윤조 옮김, 앞의 책, 218쪽.

15) 켄 올레타, 김우열 옮김, 앞의 책, 124쪽.

16) 켄 올레타, 김우열 옮김, 앞의 책, 126~127쪽.

17) 스티븐 레비, 위민복 옮김, 앞의 책, 123쪽.

18) 존 바텔, 이진원․신윤조 옮김, 앞의 책, 220쪽.

19) 리처드 L. 브랜트, 안진환․유근미 옮김, 『구글웨이: 우리가 상상하지 못한 새로운 길이 열린다](북섬, 2010), 120~121쪽.

20) 재닛 로우, 배현 옮김, 앞의 책, 245쪽.

21) 켄 올레타, 김우열 옮김, 앞의 책, 197쪽.

22) 장위안창, 하진이 옮김, 앞의 책, 42쪽.

23) 존 바텔, 이진원․신윤조 옮김, 앞의 책, 220쪽.

24) 랜달 스트로스, 고영태 옮김, 『구글, 신화와 야망』(일리, 2009), 29~30쪽.

25) 스콧 클리랜드․아이라 브로드스키, 박기성 옮김, 『두 얼굴의 구글: 구글 스토리에 숨겨진 또 다른 이면』(에이콘, 2010), 241쪽.

26) 장위안창, 하진이 옮김, 앞의 책, 35~36쪽; 캔 올레타, 김우열 옮김, 앞의 책, 123~124쪽; 존 바텔, 이진언․신윤조 옮김, 앞의 책, 223쪽; 김정남․김정현, 『세계 최고의 디지털 리더 9인의 이야기』(팜파스, 2007), 453쪽.

27) 강성만, 「온-오프 넘나들며 󰡐구글 천하󰡑 호령: 󰡐올해의 CEO󰡑에 오른 에릭 슈미트」, 『한겨레』, 2006년 12월 22일.

28) 이민형, 「구글 에릭 슈미트는 왜 CEO에서 물러날까?」, 『디지털데일리』, 2011년 1월 21일.

29) 이균성, 「󰡐구글드󰡑 저자가 본 에릭 슈미트 사임 이유」, 『아이뉴스24』, 2011년 1월 24일.

30) 민동용․구자룡, 「구글, 중국 사이트 󰡐google.cn󰡑 철수 왜?」, 『동아일보』, 2010년 3월 24일.

31) 김광현, 「[광파리의 글로벌 IT 이야기」 구글 CEO 슈미트에서 페이지로…새로운 서비스 과감하게 추진할 듯」, 『한국경제』, 2011년 4월 6일.

32) 찰스 아서, 전용범 옮김, 앞의 책, 273~274쪽; 장위안창, 하진이 옮김, 앞의 책, 5쪽.

33) 김준엽, 「[글로벌 IT 거물] 󰡒SNS 열풍 예측 못해󰡓 후회하는 슈미트」, 『쿠키뉴스』, 2014년 1월 1일.

34) 임일곤, 「구글 슈미트 CEO, 󰡐돈방석󰡑…보상금 1억 달러」, 『이데일리』, 2011년 1월 24일.

35) 이균성, 「1억 달러 때문?…구글 슈미트 󰡒회사 안 떠나󰡓」, 『아이뉴스24』, 2011년 1월 26일.

36) 김태훈, 「에릭 슈미트 회장 󰡒세종대왕의 꿈, 구글이 실현하겠다󰡓」, 『세계일보』, 2013년 10월 30일.

37) 노성열, 「한국은 󰡐안드로이드 공화국󰡑」, 『문화일보』, 2014년 1월 21일; 권영전, 「󰡒한국은 세계 1위 안드로이드 공화국…93.4%가 사용󰡓」, 『연합뉴스』, 2014년 1월 21일.

38) 홍재의, 「구글 플레이 한국이 먹여 살린다?」, 『머니투데이』, 2013년 5월 22일.

39) 재닛 로우, 배현 옮김, 앞의 책, 58쪽.

 

* 월간 인물과사상 2014년 2월호

트위터 트위터 페이스북 페이스북 카카오톡 카카오톡
기사입력: 2015/04/07 [02:40]   ⓒ 대자보
 
  • 도배방지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