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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에 남아 있는 일본주택, 미술관으로 탈바꿈
[현장] 인천 차이나타운 인근 '인천관동미술관' 적산가옥 개조 개관
 
이윤옥   기사입력  2015/01/16 [21:45]

“2013년 2월 옛 일본 조계지였던 곳에 있는 한 집을 소개 받았어요.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나는 ‘이집이 내집’ 이라고 직감적으로 느꼈습니다. 집 입구부터 안쪽으로 길게 복도가 늘어서있고 중간에는 이층으로 오르는 계단이 나있지요. 복도와 나란히 있는 방들은 내 기억 속의 일본 집에 돌아온 느낌입니다. 시댁 식구들은 편한 아파트 생활을 버리고 왜 불편한 집으로 이사 가느냐고 우리를 말렸습니다.”
 
이는 인천관동미술관(갤러리)의 안주인 도다이쿠코 작가의 말이다. 1930년 무렵 지어진 허름한 일본 주택을 구입하여 이곳을 미술관으로 꾸민 사람은 사진작가 류은규 씨와 일본인 아내 도다이쿠코 작가다. 어제 (1월 14일) 기자는 인천 중구 관동에 있는 인천관동미술관을 찾았다. 건물 외관은 말끔하게 정리되었지만 내부에는 미술관 공사를 막 마쳐 아직 잔 정리들이 약간 남아 있었다.
 

▲ 인천관동미술관 2층과 3층 다락방, 다락방 위에는 천장을 뚫어 자연채광이 들어 오도록 했다. 다락방 아래가 2층으로 지금 개관 준비 중이다.     © 이윤옥
▲ 1층 미술관 내부, 그림 준비 중     © 이윤옥


 
인천관동미술관이 들어선 이곳은 1883년 인천개항과 더불어 건너온 일본인들의 주거지역으로 이들은 여기에 나가야(長屋, 연립주택)와 마치야(町屋, 상가주택) 를 짓고 살았다. 특히 지금의 차이나타운이라고 부르는 인천 중구청 일대에는 당시 일본의 조계지였기에 일본인들이 많이 거주했지만 지금은 거의 헐리거나 개조되어 원형을 간직한 집은 많지 않다. 인천 중구청을 기준으로 청․일조계지 경계 아래쪽이 옛 일본인 거리에 관동미술관이 자리하고 있다.
 
“아이가 커서 곁을 떠나고 보니 우리는 구태여 아파트(경기 산본)에 살 필요를 느끼지 못했어요. 그래서 우리가 좋아하는 곳에 가서 살자는 의견을 나눴지요. 서울 입성은 집값이 비싸 고려하지 않았고 다문화도시인 안산이나 남편이 35여 년간 사진을 찍어온 지리산 청학동 그리고 근대역사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는 인천이 후보지였는데 결국 우리는 인천으로 점을 찍었지요.” 라며 웃는 화장기 없는 안주인의 얼굴이 해맑다.
 

▲ 1935년 <대경성대관>에 나오는 인천 중구청 일대 일본인 주거지역. 사진에서 오른쪽 꼭대기 바로 아랫집이 인천관동미술관 집이다.     © 이윤옥


도다이쿠코 작가는 인천 관동에 집을 사서 작지만 미술관으로 꾸미는 작업을 근 1년간 매달렸다. 허름했지만 일본 주택은 가능한 한 원형을 살리려고 애썼다. 이 일대 대부분의 일본주택은 주인이 바뀌면서 내부 구조를 한국식으로 바꾼 집이 많다. 다다미였던 방바닥은 온돌로 바뀌었고 장지문으로 방 구분을 했던 것은 벽으로 바뀌었지만 다행히 도다이쿠코 씨가 구입한 주택은 낡았지만 원형이 많이 남아있는 상태였다.
 
원형이 남아 있다고는 해도 90년된 목조 주택은 금세라도 부스러질 듯 삐거덕 거렸다. 안전상에도 문제가 있어 보이는 이 집을 일본식 원형으로 복원케 해준 사람은 한양대 건축학부 객원교수인 도미이마사노리 (66살, 富井正憲) 씨다. 도미이 교수는 1983년 가나가와대학 (神奈川大学) 건축학부 조교수 시절 한국을 처음 방문했으며 조선시대 전통건축에 매료되어 틈틈이 전국을 답사하는 과정에서 한국 내에 남아 있는 일본 주택에 흥미를 갖게 되었다.
 
현재 한국에 남아 있는 일본주택은 약 500채 정도지만 대부분 한국인이 살기 편한 구조로 개조해서 살고 있는 집이 많다고 했다. 인천관동갤러리 역시 완벽하게 일본식 주택으로 남아 있던 것은 아니지만 이번에 미술관을 만들면서 가능한 한 원형에 가까운 모습으로 복원했다. 이번 주택 복원 과정은 난공사 중에 난공사였다. 도미이 교수의 자문과 한국의 대목장이 1년 가까이 당시의 자료와 씨름하면서 완공한 것이다.
 

▲ 일본주택은 대지 면적이 약 25평 정도로 좁지만 긴 직사각형으로 입구에서 안쪽으로 길게 방 등이 배치되어 있다. 바닥 공간이 좁지만 2층, 3층 다락방까지 아주 유용한 공간이 오밀조밀 많다.사진은 다락방     © 이윤옥
▲ 다락방은 서재로 쓸 예정이며 서재에서 다정한 모습의 류은규 사진작가와 도다이쿠코 작가 부부     © 이윤옥


 
이 집은 1935년에 항공 촬영한 사진집 <대경성대관>에도 나와 있으며 1925년 무렵에 지어진 집으로 올해 나이 90살로 추정된다. 이를 뒷받침하는 것이 계단공사 때 나온 보로 이 보를 감싼 종이가 다이쇼(대정) 13년 (1924년) 1월 19일치 <경성일보>에서 확인되고 있는 점이다.
 
이 집이 들어선 곳은 ‘관동(官洞)’으로 관리들이 살았던 곳이라 붙은 이름이다. 현재는 ‘신포길’이라는 도로명으로 바뀌었지만 당시 일본영사관 자리에 인천부(仁川府, 현재 중구청) 청사를 지을 무렵 함께 관사로 지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인천관동미술관(갤러리)은 앞으로 류은규 교수가 지난 수십 년간 찍어온 지리산 청학동과 중국 조선족 관련사진을 전시할 예정이며 역량 있는 작가들의 작품도 전시할 계획이다. 오는 30일 개관 기념 전시는 지난 1년간 복원한 일본가옥 재생작업을 주제로 한 ‘인천 일식주택 재생프로젝트’ 전(展)이며 이어서 제95주년 3.1절을 맞아 항일여성독립운동가 시화전도 기획 중이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살던 집을 흔히 한국에서는 “적산가옥”이라고 부른다. 적산가옥이란 “적국(敵國) 사람들이 소유했던 집”을 말 하는데 연세 드신 분들은 아직 이 ‘적산가옥’을 곱게 봐주지 못한다. 그도 그럴 것이 식민의 쓰라린 역사를 몸소 체험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적산가옥이 인천시 중구 차이나타운 인근에는 꽤 남아있으며 상당수는 개조되어 까페나 공방, 음식점 등으로 이용되고 있다.
 

▲ 인천 중구청 앞 일본거리, 사진에서 위쪽이 차이나타운이다.     © 이윤옥
▲ 인천관동미술관은 관리들이 살던 곳이라는 관동(官洞)에 자리하며 정면에 보이는 중구청(옛, 인천부청사) 아래 3분 거리에 있다.     © 이윤옥


 
미술관을 둘러보고 도다이쿠코 작가와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 새 밖은 어둠이 깔렸다. 미술관을 나서는 기자에게 “과거 일본의 식민시대의 과오를 반성하는 뜻에서 그와 관련된 전시를 비롯하여 앞으로 한일 양국의 좋은 작품을 전시하는 문화공간으로 활용되길 바란다”고 도다이쿠코 작가는 말했다.
 
인천관동미술관 건너 인천여객터미널에는 중국을 드나드는 거대한 여객선의 불빛이 반짝였다. 차이나타운으로 널리 알려진 이곳에 문을 여는 관동미술관이 아직도 일제강점기의 상처를 간직하고 있는 한국인들에게 “훈훈한 한일문화교류의 장”이 되었으면 하는 생각을 가져본다. 몇 발자국 걸어와서 뒤 돌아보니 류은규, 도다이쿠코 작가 부부가 아직도 손을 흔들고 있었다.
 
<인천관동미술관(갤러리) 가는 길> 
*주소: 인천시 중구 신포로 31번길 38번지 (지하철 동인천 역에서 신포시장 쪽으로 10분 정도 거리에 있으며 주변에는 전통시장인 '신포시장'과 차이나타운,자유공원 등이 명소이며 아기자기한 까페촌으로도 유명하다)
 
* 개관 : 2014년 1월 30일 (금)
* 개관전: '인천 일식주택 재생프로젝트’ 전(展)
* 전화: 032-766-8660
 

 

이윤옥 소장은 일본 속의 한국문화를 찾아 왜곡된 역사를 밝히는 작업을 통해 한국과 일본이 서로 제대로 된 모습을 보고 이를 토대로 미래의 발전적 관계로 나아갈 수 있는 밑거름 작업을 지속하고 있다. 한국외대 박사수료, 한국외국어대학교 외국어연수원 교수, 일본 와세다대학 객원연구원을 지냈고 국립국어원 국어순화위원과 민족문제연구소 운영위원회 부위원장으로 민족자존심 고취에 앞장서고 있다.

저서로는
*우리말 속의 일본말 찌꺼기를 밝힌『사쿠라 훈민정음』인물과사상
*친일문학인 풍자시집 『사쿠라 불나방』도서출판 얼레빗
*항일여성독립운동가 20명을 그린 시집『서간도에 들꽃 피다』도서출판 얼레빗
*발로 뛴 일본 속의 한민족 역사 문화유적지를 파헤친 『신 일본 속의 한국문화 답사기』 바보새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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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5/01/16 [21:45]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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