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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배와 술, 젊음과 연말연시
[류상태의 문화산책] 젊은이들에게 행복하고 건강한 삶을 권함
 
류상태   기사입력  2014/12/25 [13:53]

유난히 참혹했던 2014년이 저물어가고 이제 며칠 후면 새해가 된다. 새해엔 제발 애꿎은 젊은이들을 희생시키는 대형참사만은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고 늘 좋은 소식들만 찾아왔으면 좋겠다.

 

하지만 새해 벽두부터 누군가에겐 매우 반갑지 않은 소식이 기다리고 있다. 담배 한 갑을 사기 위해 2500원을 지출한 사람이라면 새해부터는 무려 2000원이 오른 4500원을 지출해야 한단다.
며칠 전 어느 주차장 구석에서 피우지 않은 새 담배개비 열너덧 개를 주워 지인에게 건네준 적이 있다. 누군가 담배를 끊겠다는 생각으로 쏟아버린 것 같았다. 요즘 담배를 끊고야 말겠다고 독하게 마음먹는 분들이 많다. 이글은 그런 결심을 갖고 있는 사람들, 특히 내가 지난 세월 늘 짝사랑해오던 ‘젊은이들’과 나누고 싶은 글이다.

 

1. 담배에 대하여


대학 1학년 때, 친구가 내뿜는 담배 연기가 멋있다고 느낀 적이 있었다. 그 이후로 몇 달 동안 담배를 피울까 말까 진지하게 생각해 보았다. 엎치락뒤치락 한참 고민한 끝에 피우지 않기로 최종 결정을 내렸다. 그렇게 결심하게 된 세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 이유는 중독성 때문이었다. 당시 친구들을 보니 한 번 피우는 건 자유지만 끊는 건 자유가 아니었다. 담배 끊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알려주는 일화가 있다. 어떤 사람이 선배에게 물었다. “선배님, 담배 좀 끊는 방법이 없을까요?” 선배가 대답했다. “담배 끊는 것 걱정 말게. 그거 아주 간단하이. 나는 지금까지 수십 번도 더 끊었다네.”


이런 얘기도 있다. 어느 신문에 암과 담배에 대한 기사가 실렸다. 그 신문을 보고 어느 골초가 친구에게 말했다. “난 끊기로 했네.” 친구가 말했다. “어려운 결단을 했구만. 성공하기를 비네.” 골초가 말했다. “신문을 끊기로 했지.”


아직 담배를 피우지 않는, 그런데 한 번 피워볼까 생각하는 젊은이가 있다면 기억해주기 바란다. 지금은 그대가 쉽게 선택할 수 있다. 그러나 일단 시작한 후에는 그대에게 선택의 자유가 그리 쉽게 보장되지 않을 수 있다.


내가 담배를 피우지 않기로 결정한 두 번째 이유는 지저분하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여름이 되면 부피가 큰 물건은 소지하기 불편하다. 담배도 부피가 꽤 있는 편이다. 어떤 친구가 땀에 절은 담배를 양말 속에서 꺼내 무는 걸 본 적이 있었다. “저렇게 하면서까지 피우고 싶지는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 번째 이유는 경제적인 문제 때문이었다. 그 때 나는 알바를 하지 못하고 부모님에게서 용돈을 타서 쓰고 있었다. 부모님이 힘들게 번 돈을 이런 데 써도 되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이 세 가지 이유로 나는 담배를 피우지 않기로 결심했고 그 이후로는 담배를 핀 적이 없다.
담배를 피우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고려해야 할 문제가 있다. 어디서 담배를 피우건 주변에 사람이 있다면 어쩔 수 없이 그에게 피해를 준다는 사실이다. 거의 십 년 전의 일이지만, 인권문제에 특별한 관심을 갖고 있는 지인이 식사자리에서 나에게 아무 양해도 구하지 않고 담배를 빼어 무는 걸 보고 몹시 놀란 적이 있다. 간접흡연이 직접흡연 못지않게 해롭다는 건 우리가 상식으로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2. 술에 대하여


담배 얘기를 꺼냈으니 술 얘기도 좀 하고 싶다.


“술아, 만약 너에게 이름이 없었다면 나는 너에게 악마라는 이름을 붙여주겠다.” 셰익스피어가 한 말이다.


“첫잔은 갈증을 면하기 위하여, 둘째 잔은 영양을 위하여, 셋째 잔은 유쾌하기 위하여, 넷째 잔은 발광하기 위하여.” 이건 로마속담이다. 이외에도 술에 대한 옛사람들의 격언 중에는 새겨들을 만한 게 많다.


“술의 힘이 우리 몸에 배어들면 사지는 무거워지고 다리는 철쇄에 매인 듯 흔들거리며 혀는 굳고 지성은 함몰된다. 시각은 흐릿해지다가 고함과 싸움이 터져나온다.”


“알콜은 인간성의 불을 끄고, 동물성에 불을 붙인다.”


“음주는 일시적인 자살이다. 음주가 갖다주는 행복은 단순히 소극적인 것, 불행의 일시적인 중절에 지나지 않는다.”


“전쟁, 흉년, 전염병, 이 세 가지를 모두 합쳐도 술이 끼치는 손해와 비교할 수 없다.”


“입술과 술잔 사이에는 악마의 손이 넘나든다.”


“술이 들어가면 혀가 나오고, 혀가 나오면 말을 실수하고, 말을 실수하면 몸을 버린다.”


지나친 말이라고 생각되면 그냥 듣고 흘려도 좋다. 하지만 술이 인류 역사와 더불어 끊임없이 사건을 일으켜 온건 사실이다. 때로는 빼어난 예술가와 철학자를 알콜중독자로 만들기도 했고, 과학문명이 발달한 현대사회에서는 교통사고의 주범이 되었다.


술은 가정불화와 파괴의 주요 원인이 되기도 하고 범죄와도 깊은 연관이 있다. 최근 매스컴에 크게 보도된 모 항공사 임원의 일탈 문제도 지나친 음주와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확인되었다.


3. 기독교성서와 담배와 술


기독교성서에는 담배에 대한 기록이 없다. 그 시대 그 곳에는 담배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술에 대해서는 많은 기록이 존재한다. 특히 술의 위험성에 대해 경고하는 지혜의 왕 솔로몬의 권고는 너무나 생생하다.


“재난을 맞을 사람이 누구냐? 근심하게 될 사람이 누구냐? 다투게 될 사람이 누구냐? 속상해 할 사람이 누구냐? 애매하게 상처입을 사람이 누구냐? 눈이 충혈된 사람이 누구냐? 술자리를 뜰 줄 모르고 혼합주만 찾아다니는 사람들이다. 잔에 따른 술 빛깔이 아무리 빨갛고 고와도 거들떠보지 마라. 결국은 뱀처럼 물고 살무사처럼 쏠 것이다. 눈에는 이상한 것이 보이고 입에는 허튼 소리를 담게 된다. 바다 한가운데 누운 것 같고 돛대 꼭대기에 누운 것 같아, ‘아무리 때려보아라. 아프지도 않다. 아무리 맞아도 아무렇지 않구나. 술이 깨면 또 마셔야지.’ 하고 말한다.” (잠언 23장 29~35절, 공동번역성서)


하지만 기독교성서가 한국의 보수 개신교인들의 생각과는 달리 술 마시는 것 자체를 죄로 규정하지는 않는다. 성서의 예수께서 첫 번째로 행하신 기적도 잔치 집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들어 주신 것이었다. 일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교회에서 지금도 성찬식 때 포도주를 사용한다. 또한 사도 바울은 제자인 디모데가 배탈이 자주 나서 고생하자 포도주를 조금씩 마시면 위에 좋다고 권하기까지 했다고 성서는 말한다.


술에 대한 기독교성서의 기록을 좀 더 살펴보자. 디모데전서 3장에 보면, 집사와 장로의 자격에 대해 나오는데, 술에 인이 박일 정도로 마시지만 않는다면 집사로서 자격이 된다. 하지만 장로는, 인박이지 않은 정도로는 곤란하고, 즐기지 않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중책을 맡을수록 점점 더 기준이 엄격해지고 있다.


에베소서 5장 18절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술 취하지 마십시오. 방탕한 생활이 거기에서 옵니다. 여러분은 성령을 가득히 받아야 합니다.”


이런 기독교성서의 기록을 종합해 볼 때, 성서가 술을 절대 금하고 죄로 단정 짓지는 않는다는 걸 쉽게 알 수 있다. 그러나 술이 우리 생활에 주는 이로움보다는 해로움이 더 크므로 취할 정도로 마시지는 말고, 늘 절제해야 된다는 것은 분명히 가르치고 있다.


젊은 그대들의 생각은 어떠한가? 혹 술담배 문제로 이런 글을 쓰는 것 자체를 시대에 뒤떨어진 것으로 생각하여 끌끌 혀를 차는 젊은이들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는 이 문제를 건강과 사회생활의 문제가 아닌 윤리도덕의 문제와 종교적 금기 여부로 받아들이며 고민하는 젊은이들도 적지 않다. 물론 그들은 대개 진실한 신앙과 삶을 갈망하는, 특정 종교에 몸을 담고 있는 젊은이들이다.


4. 들어가며


이번 연말연시에는 담배와 술에 대한 소비가 극에 달하지 않을까? 담배를 끊기 전에 마지막으로 실컷 피우겠다는 사람, 담배를 끊었으니 술로 대신하겠다는 사람들이 해가 바뀌는 시점을 전후하여 밤늦은 거리를 배회하지 않을까?


어쨌건 나이 스물을 넘었다면 성인으로서 주체적으로 생각하고 선택하며 살 자유가 있다. 하지만 그대가 아직 10대 청소년이라면, 법적으로 음주와 흡연이 허락되어 있지 않지만 곧 선택의 자유가 주어질 것이다. 바로 그때, 나의 체험과 생각이 그대의 행복하고 건강한 삶을 위해 참고사항이 되기를 바라며...

류상태 선생은 장로회신학대학원 졸업이후 20여 년을 목회자, 종교교사로 사역했지만, 2004년 ‘대광고 강의석군 사건’ 이후 교단에 목사직을 반납하였고, 현재는 종교작가로 활동하면서 ‘기독교의식개혁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지은 책으로는 [교양으로 읽는 세계종교] [소설 콘스탄티누스] [신의 눈물] [한국교회는 예수를 배반했다] [당신들의 예수]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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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4/12/25 [13:53]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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