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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권의 책으로 만나는 생성철학자들의 이야기
[책동네] 황수영의 『베르그손, 생성으로 생명을 사유하기』를 읽고
 
손보미   기사입력  2014/12/05 [00:00]

죽음에 대해 알고 싶다는 생각으로 책을 읽은 적이 많았다. <베르그손, 생성으로 생명을 사유하기> 또한 그런 맥락에서 읽게 된 책이었다. 죽음에 관해 생각하기에 “생명”만큼 좋은 주제는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저자가 풀어가는 베르그손, 시몽동, 들뢰즈……의 사유를 따라가며 죽음과 생명에 관한 이전과는 전혀 다른, 매혹적인(너무나 아름답지만, 그만큼 슬프기도 한..) 그림을 그려 볼 수 있었다. 
 
베르그손. 그리고 환원주의

 

▲ 깡길렘, 시몽동, 그리고 들뢰즈에 이르는 생성찰학자들을 다룬 황수영의 『베르그손, 생성으로 생명을 사유하기』     © 갈무리


베르그손은 생소한 철학자였다. <물질과 기억>이라는 흥미롭지만 꽤 어려워 보이는 책을 쓴, 언젠간 보고 싶지만, 지금 당장은 아닌 그런 철학자였다. 베르그손뿐만이 아니었다. 책의 초반부터 여러 생소한 철학자, 진화 생물학자 등의 사유가 밀도 있게 엮여 있었다. 책을 읽어 나가는 것이 쉽지가 않았다. 게다가 두려운 단어 중의 하나인 “환원주의”라는 말까지 몇 번이고 반복되고 있었다.


예전에 “면역”과 관련된 책으로 세미나를 한 적이 있었는데, 하루는 세미나 중에 또 다른 참가자에게 “너무 환원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냐”라는 말을 듣게 되었다. “환원적!? 환원주의!?” 후에 그 말-환원주의-의 뜻을 알기 위해, 고군분투했지만, 웬일인지 (나에게) 그 말은 도무지 하나의 의미로 정리되지 않는 이상한 것이었다. 그 후 한동안 말을 할 때마다 ‘너무 환원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 라고 혼자 속으로 되묻곤 했다. “그 말”이 의미하는 바도 알지 못한 채 말이다. -환원주의-는 지금까지도 정체를 알기 힘든 두려운 말로 남아있다.


초반에 저자는 “환원주의, 목적론, 기계론” 등을 “베르그손”의 사상과 대비시키며 꾸준히 이야기하고 있다. 어렵고 생소한 사유들이 꽉 짜여있어 어려웠지만, 저자의 안내를 따라 흐름들을 더듬어가다 보니, 문득 “너무 환원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냐”라고 했던 상대방의 이야기를 불러일으킨 나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이제 베르그손은 더 이상 나중으로 미루어서는 안 되는 철학자가 되었다. 
 
개체들의 주사위 던지기 놀이


베르그손의 우발성과 지속이라는 문제에 대해 읽으면서 문득 모바일 게임 “모두의 마블”이 떠올랐다. 스마트폰으로 게임을 플레이 하면서 주사위를 던질 때와, 어떤 지점에서 말이 옮겨 갈 때마다 묘한 기분이 들곤 했는데, 어찌 된 일인지 책을 읽으며 그때 느꼈든 묘한 기분이 다시 느껴진 것이다.

 

주사위 던지기에 관한 이야기는 진화, 우주, 물리 법칙의 역사에서 심심치 않게 거론되었던 것 같다. 가장 유명한 이야기로는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고 한 아인슈타인의 말인데, 당시 양자 역학(불확정성,우연)에 대한 물리학계의 거부감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저자는 베르그손의 “창조”라는 말의 전신이 될 수 있는 “우발성” 개념을 이야기 하며 이는 “우연”과는 다른 것이라고 말한다.
 
중세의 뷰리당은 똑같은 힘을 가지고 유혹하는 밀과 귀리 사이에서 당나귀는 결국 굶어 죽을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했다. 만약 이 상태에서 아무것이나 선택을 한다면 그것은 순전한 우연이 될 것이며 자유의지라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만약 둘 중에서 어느 하나가 좀 더 유혹적이어서 선택하게 되었다면 그것은 결정론의 입장으로 되돌아 가게 된다. –본문 중에- 
 
진정한 우발성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베르그손의 다음 문장을 보자. “의지의 돌연한 개입은 일종의 쿠데타와도 같다. 지성은 이에 대한 예감을 하고 적법한 의결에 의해 미리 그것을 합법화하는 것이다” 이 인용문은 심리적 상태에서 우발성이 어떠한 것인가를 예기하게 해준다. –본문 중에-
 
저자가 직조해 놓은 본문의 이야기들을 통해 단순히 주어져 버리고 마는 수동적인 “우연”이 아닌, 반드시 그렇게 되어야 하는 기계론도 아닌 “창조”로 이어지는 “우발성”이라는 놀랍고도 색다른 개념이 분명히 있음을 느낄 수 있다. 더불어 나는 현시점에서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던지는 행위를 하는(버튼을 누르는) 객체(플레이어)의 주사위 던지기 놀이를 떠올렸다. 신이 던지는 주사위 놀이가 “우연”이라면, 게임 판 위에서 플레이어가 던지는 주사위 놀이는 “우발성”에 가깝지 않을까? 놀이 판에 뛰어든 우리는 분명히 주사위를 굴리는 버튼을 누른다. 그리고 무엇이 나올지 알 수 없으면서도, 어쩌면 알 수 없기 때문에 주사위를 누르는 손가락과 함께 두근거리는 긴장과 흥분을 느낀다. 여기가 베르그손이 말한 “생명의 역동”이 있는 지점이라고 이야기 하면 너무 과장된 표현일까? 
 
시몽동의 아름답고도 슬픈 개체화


고립성, 유성생식, 죽음, 그리고 생명을 연결한 시몽동의 개체화 과정에 대한 이야기는 사실 너무 좋아서 섣불리 거론하기가 힘들 정도이다. 그가 사용하는 용어(개념어)들은 딱딱해 보이지만, 이론을 통해 만들어내는 그림은 이렇게 낭만적이어도 되나 싶을 정도로 매혹적이었다.
 
베르그손에서 깡길렘, 시몽동, 들뢰즈에 이르는 생성철학자들의 이야기를 한 권의 책으로 만난 것은 정말 즐거운 일이었다. 생성철학에 대해 잘 모르는 나에게 이 책을 만나는 일은 생명의 역동으로 부글되는 사유의 원시수프를 끓이는 일과 같았다.

 

* 글쓴이는 '다중지성의 정원' 회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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