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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의 새로운 정치사회학은 어떤 방향이 되야하나?
[책동네] 『과학의 새로운 정치사회학을 향하여』, 과학과 민주주의 다뤄
 
엄진희   기사입력  2013/12/31 [13:24]
▲ 과학의 새로운 정치사회학을 향하여     ©갈무리
오늘날 점점 대학은 기업화되어 가고 기업은 대학에 후원하면서 대학의 전문 지식을 이용하려 하고 있다. 오웬 스미스는 이러한 대학을 ‘잡종적 대학’이라 불렀는데 기업과 대학의 이러한 상호 침해, 상호 침식의 문제를 어떻게 볼 것인가. 전문 지식인이나 전문가와 비지식인, 비전문가를 양분하는 오랜 관습은 폐지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대학의 상업화에 직면해서 더 중요한 문제는 대학과 기업 모두 이윤의 논리를 따른다는 것이다. 전문 지식을 소수의 전문가들만이 전유한다거나 하는 식의 낡은 관습에서 벗어나 공공재로서의 지식을 보편화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대학 사회는 날로 경쟁적이 되고 있으며 지적 재산권의 이름 아래 대학에는 기업가 논리가 확산되고 있다.


대학에 시장 논리, 경쟁 논리가 확산되면 학문적 질이나 수준보다 이윤이 나는 연구에만 치중하게 되고 실제로 ‘발견 지향 연구에서 응용이나 실용적 관점에 좀 더 비중을 두는 연구로 전환’되는 경향이 있다. 대학에서는 연구비를 둘러싸고 싸움이 일어나며 대규모 프로젝트에 포함되는 경우, 연구원들은 프로젝트의 일부 구성원으로서의 역할만을 담당할 수 있을 뿐이다.

나도 최근에 대학원 시험을 보았는데 이러한 사정을 알고 있고 고민을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내가 공부를 계속하려는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는데 우선, 공부하고 논문 쓰면서 시간을 보내다 나이를 먹었고 그러다보니 자연, 나이도 나이지만 사회 경험이 없는 고로 취직도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또 하나는 사회 생활을 할 수 있다 치더라도 밥먹고 출근하고 퇴근해서 밥먹고 잠자고 일어나 출근하는 생활을 하고 싶지가 않았다. 나름의 자유시간과 책을 읽을 시간이 주어진다면 좋으련만 우리 사회에서 직장 생활을 한다는 것은 책을 읽을 시간을 반납한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것은 사람이길 포기하라는 말인 것 같아서 또 싫다. 그래서 이런 사회에 저항하는 방식으로 선택은 다시 학교인데, 학교가 이미 상업화되어 있고 그곳에서도 내가 자유롭게 하고 싶은 공부를 돈 걱정 없이 할 수 있을까 하는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아직 젊으니 부딪쳐 보자 하면서도 걱정이 앞선다. 대학원 공부하는 내 친구들도 학자금이다 뭐다 다들 빚만 일이천만원씩은 가지고 있다.

이 난국을 해결할 수 있을까. 이 비대칭적 힘의 관계는 분야를 막론하고 곳곳에 뿌리내리고 있다. 스티븐 울프는 가령 농업 분야에서 기술 개발에 농부가 과학자들과 동등하게 참여하는가 하는 문제를 다루었다. 지식 생산 능력의 측면에서 권력과 이해관계가 ‘불균등’하게 작용한다. ‘가치 있는 자원이 누구에게 부여되고 누구에게 접근 가능한가의 문제가 농부들의 지식생산 참여를 제약’하고 ‘자신들의 생계가 달려 있는 자원의 관리자로 활동할 수 없게’ 한다. 지식과 권력의 비대칭성은 부의 불균등, 재화의 불균등을 낳고 이 불균등은 또 다른 불균등을 낳는다.

이러한 사정은 의학계에서도 별반 다르지 않은데 헤스는 암치료에 대한 연구를 분석하면서 약물에 기반한 연구가 식품에 기반한 연구보다 자금 조달에 유리한 위치를 점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결국, 과학 기술의 배후에는 자본의 논리가 깔려 있는 것이다. 우드하우스는 나노기술은 풍부한 연구비를 받았지만 그 위험성에 대한 연구나 이해는 전무한 실정이라는 것을 밝혔다. 이렇게 이윤의 논리가 연구의 방향까지 정해버리는 폭력적인 시스템에서는 더 이상 인간을 위한 지식은 없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희망은 없는 것일까. 이 책을 보면 의학이나, 대학, 농업 등의 분야에서 지식은 자본에 종속되어 있고 불균등하게 분포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제 이러한 사정을 직시한다면 시급한 과제는 ‘과학 지식의 생산과 전파를 민주화’, 보편화하는 일이다.

보건사회운동에 대한 연구는 ‘국가적, 제도적, 문화적 권위에 도전해서 사회정책에서 대중 참여를 늘리는 사례들’을 보여준다. 브라이언 마틴은 민중을 위한, 민중에 의한 과학의 개념을 가지고 대안과학의 전망(민중을 위한 과학, 민중에 의한 과학, 시민이 만든 과학)을 기술하고 있다. 켈리 무어 역시 참여과학에 대한 글에서 ‘참여 연구가 지속되려면 비전문직 종사자의 참여가 정당화되고 법률적으로도 가능한 것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아직 참여연구의 정당성이 확립되지 못했음을 시사하는 글이었다.

저자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노력들이 지구촌 곳곳에서 꾸준히 실험되고 시행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살펴본 것처럼 대학의 상업화, 과학 기술의 상업화는 이제 전지구적 체제가 되면서 그 혜택은 특권적 소수에게만 돌아가는 사회적 불평등만 야기하고 있다.

지금 국내에서도 의료 민영화, 철도 민영화 때문에 소란스러운데 이 모든 문제들은 신자유주의 정치경제학의 여파일 것이다. 민주주의, 대학-기업, 환경, 보건 등의 사회 전반에 걸쳐 권력과 자원의 비대칭성이 문제가 되고 있다.

이 책에서 말하는 과학의 새로운 정치사회학은 이윤 추구의 독점적 과학 발전이 아니라 민주적이고 보편적으로 모든 인류를 향한 지식 체계로서 과학의 담론을 재구성하고 공통화하는 것일 것이다. 전문인과 비전문인의 경계를 횡단하고 지적 재산권을 거부하는 운동 등을 통해서 한걸음씩 움직여야 할 것 같다.

* 글쓴이는 '다중지성의 정원' 회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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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3/12/31 [13:24]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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