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로 보내기 글자 크게 글자 작게
통일 염원 이기형 민족시인, 부디 영면하소서!
[추모] 조국광복과 민족해방의 위대한 발자취, 분단조국에서 지다
 
윤영전   기사입력  2013/06/25 [17:24]
이기형 민족시인, 부디 영면하소서!

▲ 생전의 이기형 시인     © 평화만들기
선생님은 금년 초 까지만 해도 조국의 평화통일에 관련한 행사에 꼭 참석하시어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항상 격려의 말씀을 해주시던 여민(與民) 이기형(李基炯) 선생님이었다. 올해 96세수로 천수를 다 하셨지만 오직 지구상에 유일한 분단조국의 통일을 보고 떠나시겠다며 건강을 지키시던 민족시인 이시며 민중의 스승이셨다.

언제나 초노처럼 정정하시고 약속을 철저히 지킨 성의는, 칠순을 갓 넘긴 나에게도 따라가기가 그리 쉽지 않았다. 선생님의 건강의 비결이 무엇이냐고 새삼스럽게 여쭈면, 단 1초도 쉬지 않고 몸을 움직이신다는 비법을 알려주시던 선생님이셨다. 그런데 몇 달 전에 그만 걷기가 힘드시고 약속이 한두 번 어겨지기도 하였다.

지난 5월 중순에 병원에 입원을 해야 할 처지에도 모임에 참가하셔야 한다며 집을 나선 선생님이셨지만 힘이 드셨다. 그리고는 결국 입원을 하셨지만 소식을 늦게 듣고서 6월초에야 찾았던 병실에서 “구암이 찾아왔다”고 하시면 고개를 끄덕이시던 선생님이 곧 회복을 하시리라 믿었다. 그런데 1주일이 지난 주 12일 후 결국 한 많은 조국분단을 뒤로 한 채 눈을 감으시고 말았다.

여민 선생님의 생애는 한반도가 비운의 일제 강점기를 거쳐 식민지하에서 젊음을 보내시며 오직 조국광복을 위하고 민족해방을 위해 가야만 했던 시절이었다. 1917년 변신의 달인이었던 박정희와 동갑내기로 함경남도 함주에서 태어나셨다. 야학을 통해 항일 독립투쟁운동에 접하게 되고 1933 이후 소설가 한설야 사학자 문석준 독립운동가 여운형, 시인 임화 소설가 이기영 등을 만나면서 조선독립과 문학의 역할을 모색하기에 이른다.

1938년 함흥고보를 졸업하시고 도쿄일본대학 예술 창작과에서 수학한 후 45년까지 학병거부 지하 항일투쟁 관련협의로 피검되어 1년여 동안 복역하고 해방소식을 접했다. 여민선생은 신문사 정치부 사회부 기자로 있으시면서 김구 선생을 비롯한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인 박헌영 김삼룡 이주하 등을 만나고 1947년 7월19일 선생의 정신적 지도자로 여겨왔던 몽양선생이 암살당하자 월북하여 민주조선 사회부 기자를 하다 6.25전쟁 때 월남하여 취재를 하였으며 빨치산 활동을 하다 체포되어 투옥된 후 부터는 처자식을 위한 구멍가게와 학원운영, 강사와 번역일 등 전전하면서 서울에서 칩거 하였다.

1980년 시인 김규동 소설가 남정현 등 지인을 통해 신경림 시인 백낙청 평론가 이기영 시인을 만나 당초 분단조국에서는 시를 쓰지 않겠다던 생각을 바꾸어 시창작과 함께 민족평화통일 등 사화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하시며 민족작가회원으로 활동하시었다. 1982년 첫 시집 <망향>을 내고 1989년 시집<지리산> 필화사건으로 국가보안법 위반 불구속 기소되고 징역1년 집행유해 2년을 받았다. 1999년 4월에는 4월혁명상을 수상하시고 2001년 시집 <산하 단심> 과 2003년 <봄은 왜 오지 않는가?> 펴내셨다.

그리고 꿈에 그리던 북한 고향하늘아래 2003년과 2005년에 평양을 방문하시고 2009년 10번째 시집<절정의 노래>를 발간하시었다. 선생님은 1980년부터 2013년 1월까지 재야 민주화운동과 평화통일 단체의 활동에 열성적으로 참석하시어 추상같은 즉흥시를 읊으시며 모임을 축하하시고 격려하시었다. 그리고 한국작가회의 고문을 지내시면서 중앙과 지방에도 꼭 참석하시어 분단조국의 아픔과 평화통일의 역량을 발휘하도록 언제나 참여하시었다. 분단조국 6.25전쟁으로 인한 100만의 희생자 유족회에서 시를 낭송하시고 격려말씀을 힘차게 해 주시어 유족들을 격려하시곤 하였다. 선생님은 앞에 소개한 시집 말고도 <설제> <지리산> <꽃섬> <삼천리통일공화국> <별꿈> <해연이 날아온다>를 펴냈다.

여민 선생님이 운명하시기 전날에 필자는 병실을 찾아갔었다. 가끔 숨을 가쁘게 쉬시고 음식섭취고 여의치 않아 호스를 통해 공급하였다. 그 때 눈을 감으시고는 좀처럼 뜨지 않으셨다. 89세의 사모님이 곁에서 구암 선생이 왔다고 하셨지만 고개만 끄떡하시었다. 너무나도 슬픔이 차올라 사모님은 흐느껴 우시고 나도 마음으로 울고 있었다. 어떻게 만나신 사모님이신가? 북에 따님을 두고 오셨지만 남에서 독립운동가 후손이신 사모님을 만나 아드님을 두고 자부를 두어 장손녀로 중학생, 초등생 둘을 두시고 귀여워하시었다.

재야와 한국작가회의 주관으로 “민족시인 여민 이기형 선생 통일애국장”을 발인이 있기 전날 7시에 성모병원 장례식장에서 각계인사 다수 참석한 가운데 엄숙하게 거행되었다. 민중의례에 이어 약력보고 맹문재 시인의 조시, 오종렬 진보연대의장과 권오헌 양심수후원회장, 그리고 이부영 몽양여운형기념사업회장이 추도사가 있었다. 조가도 노래극단 희망새가 하였다. 유가족 대표로 외아들인 이휘건 한양대 이공대 교수와 자부인 윤석희 변호사가 자리하고 사모님은 내내 눈물을 흘리셨다. 이어서 아드님인 이 박사가 자세한 선생님과의 지난 삶을 담당하게 말해 주었다.

“사실 어려서 너무나도 가난했던 시절 진학을 할 때마다 아버님은 괴로워 하셨을 겁니다. 그래도 저는 계속 공부를 희망했고 대학을 진학한다고 하니 잘했다는 말씀을 주셨지만 얼마나 학비가 어려운데 승낙을 하실까 했습니다. 그래도 저는 대학을 가고 그리고 유학까지 고집해서 갔습니다. 아버님의 가정형편으로 치면 불가한 일이었지만 반대를 하시지 안하셨기에 결국 학업을 계속 할 수가 있었습니다.” 이렇게 담담하게 아버지의 신분이 어려움과 가정사의 어려움을 어렵게 토해내는 아들의 고백을 들으면서 참으로 장한 아들이고 며느리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민선생님은 이런 아들과 며느리를 두시고도 자랑을 하지 않으셨다. 퍽이나 안정된 효자효부를 두신 여민 선생님이셨지만 정신에는 하루빨리 통일이 되어 북의 고향을 찾아 부모님 묘소에 성묘하고 이산가족들이 모두 자유롭게 만나는 그날을 기다린다고 하셨다. 필자와 만남은 한 20여 전으로 한국작가회의에서 회원으로 뵙게 되었었다. 특히 여운형선생 건준에 희생된 나의 맏형을 아시면서 친아들처럼 대해 주셨고 필자의 몇 번의 출판기념회에서 격려사와 문집에도 축하격려의 시를 꼭 써주시어 고이 간직하고 있다. 선생님은 우리가 보다 더 활발한 평화통일운동을 하자고 언제나 격려해 주시었다.

통상 여민 선생을 통상 몽양 여운형 선생의 비서로 이해되어 왔지만 비서가 아닌 진실로 조국의 애국자이기에 존경을 해 왔다며 여운형 전기를 썼다고 고백했다. 1991년 “몽양 여운형 전집”발간위원으로 참여하면서 아래의 축사를 남겼다. 

<몽양을 생각하며> “몽양을 거론다다는 것은 언제나 감격이요 약동이 아닐 수 없다. 몽양을 말한 많은 사람들을 한 결 같이 몽양을 영원한 청춘이라 했다. 몽양은 결코 죽지 않았다. 몽양은 이 땅의 역사와 이 땅의 민중과 더불어 늘 푸르게 살아있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몽양의 현재성은 재확인 할 때마다 통일 위업을 생각하게 되고 변화하는 세계사에서 민족주의 자본주의 공산주의 등 세 가지 주의에서 무슨 새로운 주의가 역사성을 가지고 있다고 하면, 그 자리에 몽양을 앉힐 수 있을 것으로 생각 한다. 라고 적었다.

그리고 시집을 발간한 “해연(海燕)이 날아온다” 시구를 소개한다.

고구려 넋은 어디로 갔나
백두산 신단수 큰 할아버님이 내려다 보신다
선열들의 피맺힌 목소리가 들린다
슬픈 사연 하도 많아 누선도 말랐느니
피 마르는 지겨움 가슴이 빠개 진다
임 따라 어라연엘 가랴
임 맞으러 삼지연엘 가랴
지는 해야 빨리 져다오
솟는 해야 뻐뜩 솟아주렴
폭풍우 천 길 만파를 뚫고
바다제비 날아온다


여민 선생은 2013년 6월 14일 사랑하는 가족과 언제나 따르는 후배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성모병원에서 발인하고 통일동산 방향에 있는 이북5도청 향민들이 잠들고 있는 묘역 제 62호에 안장되시었다. 선생님은 분단조국에 곧 통일이 다가올 것 같다는 희망을 버리지 않으시고 당신의 건강을 챙기셨다. 베드로 영세명으로 세례를 받으시면서 언제나 한반도 평화와 통일이 오기를 염원하시면서 하세하셨다.

여민 선생님! 민족이신 선생님! 이제 시름 다 내려놓으시고 부디 천상에 드시어 영면하소서! 저희들 언제나 기도하겠습니다. 구암 윤영전 올림
---------
* 글쓴이는 작가( 소설 수필 서예) 칼럼니스트. 한국작가회의 회원. (사) 평화연대 상임고문입니다.
* 본문은 <대자보>와 기사제휴협약을 맺은 평화전문 인터넷신문 <평화만들기> http://www.peacemaking.co.kr 2013년 6월 24일자 (제551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트위터 트위터 페이스북 페이스북 카카오톡 카카오톡
기사입력: 2013/06/25 [17:24]   ⓒ 대자보
 
  • 도배방지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