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로 보내기 글자 크게 글자 작게
명성황후 시해범은 일본 순사 와타나베다
[책동네] ≪미쩰의 시기(을미사변과 아관파천)≫, 역사적 재구성
 
김영조   기사입력  2012/06/06 [15:53]

▲ ≪미쩰의 시기(을미사변과 아관파천)≫ 표지     ©경인문화사
“쓸쓸한 달빛 아래 내 그림자 하나 생기거든

그땐 말해볼까요 이 마음 들어나 주라고
문득 새벽을 알리는 그 바람 하나가 지나거든
그저 한숨쉬듯 물어볼까요 나는 왜 살고 있는지 

나 슬퍼도 살아야 하네 나 슬퍼서 살아야 하네
이 삶이 다하고 나야 알텐데
내가 이 세상을 다녀간 그 이유
나 가고 기억하는 이
나 슬픔까지도 사랑했다 말해주길“

지난 2001년 KBS드라마에서는 드라마 “명성황후”가 방영되었다. 조수미가 부른 이 드라마 주제곡 “나 가거든”을 들으며 우리는 눈물을 흘렸고, 주먹을 쥐고 부르르 떨어야 했다. 대한제국 당시 국모였던 명성황후는 처참하게 우리의 곁을 떠났다. 왜 우리는 우리의 국모를 저들 무지막지한 일본인들의 손에 죽게 할 수밖에 없었을까?

더 부끄러운 것은 명성황후라는 제대로 된 이름조차 부를 줄 모르고 ‘민비’라고 부르면서 그가 나라를 말아먹은 형편없는 왕비였고 끝내는 일본 낭인들에게 죽임을 당했다 라고만 알아왔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역사 왜곡은 훗날 그것이 일제의 흉계였으며, 이를 충실히 따랐던 식민사관이 만들어낸 거짓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우리는 아직도 명성황후 시해의의 진실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 그 까닭은 일제가 진실을 철저히 감췄고, 학자들도 이를 파헤치는데 소홀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실은 영원히 감춰질 수 없는 법. 드디어 이를 분명하게 밝혀보고자 작심한 학자가 그간의 연구를 중심으로 한 책을 발간해 장안의 화제가 되고 있다. 바로 동북아재단 김영수 연구위원이 쓰고 경인문화사가 펴낸 ≪미쩰의 시기(을미사변과 아관파천)≫이 그것이다. 

당시 시해현장에서 범인을 눈으로 똑똑히 목격했던 러시아인 사바찐은 자신이 살려고 시해범에 대해 얼버무리고 만다. 하지만, 영국공사관과 러시아 쪽 문서를 확인한 김 연구위원은 말한다. 명성황후 시해범은 일본 낭인이 아니라 분명한 일제 순사 와타나베였다고 말이다. 그 문서에서 고종과 왕세자가 현장 목격담이 나왔고, 이를 가장 신뢰해야 할 문서로 꼽았다.

▲ 건청궁내부 도면(왼쪽, 유홍준 ≪건청궁, 찬란했던 왕조의 마지막 기억≫, 2007, 눌와 / 러시아대외정책문서보관소 자료 “경복궁 1895년 10월 8일 현장도”     © 김영수
 
▲ 명성황후가 시해당하기 직전 머물렀던 건청궁 곤녕합     © 김영수
주한영국총영사 힐리어는 “왕비는 복도 아래로 달렸지만, 추적당해 쓰러졌다. 그녀의 암살자는 그녀의 가슴 위에 반복적으로 그의 칼로 그녀를 찔렀다.”고 기록했다. 베베르는 “왕비는 복도를 따라 도망쳤고, 그 뒤를 한 일본인이 쫓아가 그녀를 붙잡았다. 그는 왕비를 바닥으로 밀어 넘어뜨리고, 그녀의 가슴으로 뛰어들어, 발로 세 번 짓밟아, 찔러서 죽였다.”고 보고했다.

이런 천인공노할 극악함이 있단 말인가? 일제가 흉악한 악마가 아니라면 남의 나라 궁궐에 침입하여 국모를 그렇게 무참하게 시해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한국 국민이면 누구나 책을 읽으면서 곳곳에서 저절로 쥐어진 주먹이 부르르 떨 것이다.

▲ 저자가 을미사변 관련문서를 찾아낸 문서보관소 (모스크바 국립문서보관소, 빼쩨르부르크 역사문서보관소, 모스크바 대외정책문서보관소, 모스크바 군사문서보관소 / 시계방향)     © 김영수
   
김 연구위원은 당시 주한 일본공사관 순사였던 와타나베 다카지로를 시해범으로 지목함으로써 일제의 책임을 준엄하게 묻는다. 지금까지 줄기차게 일본정부는 자신들과 관계가 없다고 오리발을 내밀어 왔지만 이 책을 통해 일제의 음흉한 속내가 드러났다. 이러한 엄청난 역사적 사실을 김 연구위원은 차분하고 담담하게 이 책에서 밝히고 있다.

명성황후 시해로부터 시간이 많이 흘렀지만 저자는 우리에게 하나의 분명한 과제를 제시하고 있다.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은 “이제 우리는 지금이라도 분명하게 일본에 책임을 물어야 한다. 물론 종군위안부도 오리발이고, 징용피해자에 대해서도 모르쇠로 일관하는 그들이기에 끝까지 인정하지 않으려 할 것이지만, 구천에 떠도는 원혼을 위해서도 우리는 명성황후 시해범에 대해서는 철저히 따져야 한다. 나아가 시해범인 와타나베를 부관참시해야 한다.”라고 입을 모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이 책의 이름은 ≪미쩰의 시기(을미사변과 아관파천)≫다. 어렵게 지은 제목의 의미는 무엇일까? 러시아 작가 뿌쉬낀은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인간의 운명을 ‘미쩰’ 곧 눈보라로 묘사했다고 한다. 김 연구위원은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눈보라가 내리는 들판 한가운데 서 있었다. 그 시절은 운명과 우연을 넘나들며 촛불처럼 타오르는 사람들의 어둠과 희망의 시기였다.”라고 책의 마지막에 나직이 읊조린다. 
 
이 책은 학술서적이라서 일반인들이 읽기에는 다소 어려운 부분이 눈에 띈다. 하지만, 엄청난 역사적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노력한 그의 공로를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왜곡된 역사를 비판하고 역사의 진실에 목말라 한 사람이라면 아니 명성황후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이 책을 꼭 읽어 보라고 권하고 싶다.
 

이제라도 명성황후 시해와 관련한 사실을 바로 잡아야 한다
[대담] ≪미쩰의 시기(을미사변과 아관파천)≫ 지은이 김영수

▲ ≪미쩰의 시기(을미사변과 아관파천)≫ 지은이 김영수 연구원     © 김영조
- 모스크바국립대학교에서 공부하게 된 계기와 한러관계에 천착한 까닭은 무엇인가?

“조선의 국왕이 러시아공사관에 피신한 ‘아관파천’은 조선정치사에서 참으로 불행한 사건이었다. 그래서 나는 고종의 아관파천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어떻게 해서라도 그 속내를 분명히 들여다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러시아에 유학하게 됐고 모스크바에서 러시아 쪽 외교문서를 확인하면서 많은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 일본은 명성황후만 없애면 조선을 장악할 것으로 확신한 것인가?

“미우라 공사는 ‘궁중에서 온전한 권세가 날로 심하여 망령되이 나라 정사를 간섭했다.’라며 그 탓에 일본이 박대당하고, 일본의 이익이 크게 해침을 당하니 일본의 국익을 위하여 왕비 시해는 불가피한 일이라 강변한다. 조선을 장악하려고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았던 그들은 가장 큰 걸림돌을 명성황후로 보았다.”

- 직접적으로 언급은 하지 않았지만 책은 명성황후를 비교적 긍정적으로 서술했다. 그동안 한국 사람들도 식민사관 영향을 받았는지 명성황후를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이 많았는데, 어떻게 보나?

“명성황후는 부정적인 시각과 달리 당시의 외교문헌들을 뒤지면 명석한 두뇌, 신중한 성격, 본능적인 직감 등을 소유했던 것으로 보인다. 황후는 기억력도 비상했고, 독서를 즐겼으며, 결단성도 갖춘 것으로 보인다. 행록을 살펴보면 ‘글을 배울 때는 두세 번만 읽으면 암송했다.’, ‘책 읽는 것을 좋아하여 역대의 정사에 대한 옳고 그른 것을 마치 손바닥 보듯이 알았다.’‘소학․․ 효경(孝經)․ 여훈(女訓) 등을 읽느라 밤이 깊도록 책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는 기록들이 있다.

심지어 고종은 ‘사변에 대처하는 정상적인 방도와 임시변통을 잘 배합했다.’, ‘일찍이 왕비가 말한 것이 모두 들어맞았다.’라며 강한 신뢰감을 드러냈다고 한다. 그렇다면, 명성황후는 일제의 검은 속셈을 대항할 가장 확실한 존재감이었을 것이다. 그동안 일제의 시각에 맞춰 명성황후를 부정적으로 보아온 것은 이제 청산되어야만 마땅하다.“

- 책은 수많은 자료를 인용했고, 분석했다. 하지만, 명쾌한 답은 잘 안 보인다. 필자는 명성황후를 직접적으로 시해한 사람을 누구로 보는가?

“당시 주한 외교관의 기록 중 ‘복도’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곤령합과 정시합에서 복도라고 불릴만한 장소는 건청궁과 연결되는 복도가 유일하다. 당시 순간적인 위기의식을 느낀 명성황후는 곤령합 침실에 있다가 건청궁 복도를 향해 도망쳤다. 이때 일본 공사관 순사 와타나베가 칼을 빼들고 명성황후에게 달려가는 것을 고종이 목격했다. 이는 영국 외교문서와 러시아 대외정책 문서보관소의 기록이 말해준다. 이 보다 더한 증거가 있을까?”

- 사바찐이 목격했다 하더라도 직접 시해한 사람이 누군지 알 수 있을까?

“사바찐은 당시 외국인으로 거의 유일하게 사건을 목격한 사람이다. 하지만, 아마도 그는 와타나베와 목숨을 담보로 한 모종의 거래가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러시아 공사 베베르의 추궁에도 입을 다물었던 것은 자신의 목숨을 구하고자 함이었을 것이다.”

- 책을 읽으면서 을미사변과 아관파천 당시 조선은 온갖 세력이 자신들의 이익 추구에만 급급했다는 인상을 받았다. 당시 정말 진정한 애국자는 없었나?

“궁내부에 기반한 이용익과 이재순은 왕세자 지원세력이었다. 물론 그들도 자신들의 욕심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하지만, 정치인들에게 지고지순의 도덕성을 요구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당시 일본에 기대 나라를 말아먹은 사람들에 견주면 이들이 차선이라고 보면 된다.”

- 당시 조선에 나와있던 외국공사들은 물론 자기네 나라 국익에 충실한 사람들이었지만, 그래도 그 가운데 러시아가 가장 조선을 우호적으로 대한 것이라 봐도 되는가?

“러시아가 우호적이라기보다는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조선이 절대적으로 필요했고, 그런 와중에서 그들의 역할을 충실히 하려 한 것으로 보면 된다. 국제무대에서 한 나라가 다른 나라를 위한 도덕적 지원을 기대하긴 어렵다.”

- 덧붙일 말과 앞으로 하고 싶은 일은?

“대원군은 명성황후 시해 당시 궁궐에 들어와 있었다. 물론 애지중지하던 손자에 대해 협박을 하는 등 일제의 농간에 당한 측면도 있지만, 큰 인물이었다면 그들의 협박을 뿌리치고, 나라의 원로로서 일본에 당당함을 보였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물론 결과론이다. 판단도 쉽지 않았고, 협박도 엄청났을 것이다.

앞으로도 국가의 운명을 좌우했던 중대한 역사적 사실에 깊은 관심을 갖고 역사의 뒤안길에 묻혀있는 문헌들을 찾아내어 장막에 가려 있던 역사적 사실을 밝혀내는 일에 전력하고자 한다. ”

김 연구위원은 학자로서의 객관적인 시각도 분명했지만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의 “닥터 지바고”는 물론 그의 시에도 커다란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대담을 마치고 나오면서 그가 일반 학자와 달리 상당한 감성의 소유자임을 느꼈는데 앞으로 러시아의 아름다운 백야를 소개하는 문학인으로서의 활약도 기대해봄 직한 인상을 받았다.

 
트위터 트위터 페이스북 페이스북 카카오톡 카카오톡
기사입력: 2012/06/06 [15:53]   ⓒ 대자보
 
  • 도배방지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