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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과 변절 사이, 손석형과 박용진의 경우
[정문순 칼럼] 인간의 욕망을 이해해야 하는 정치, 변절까지 봐줘야 하나
 
정문순   기사입력  2012/01/30 [02:02]
지금 창원 지역은 손석형 전 경남도의원의 중도사퇴 가지고 말이 많다. 진보정치의 대의를 져버렸다느니, 도민과의 약속을 어겼다느니 하는 비난이 턱없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왜 내 마음을 울리지는 못하는 걸까. 나는 총선 출마를 위해 지방의원직을 내던진 사람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아마 나라도 그렇게 할지 모르겠다. 

끝까지 현 직분을 완주하는 것이 박수 받을 만한 일이긴 하겠지만 다음 총선을 기다리기에는 시간이 너무 길고 개인으로서 손해 봐야 할 것이 많다. 지방의원직을 사퇴하는 것이 누구에게 해를 입히는 일일까. 재선거 비용? 비용을 따지자면 선출 제도만큼 낭비적인 것은 없다. 

더 근사한 자리, 더 큰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 자리를 추구하는 것은 인간의 바탕에 자리한 기본적인 욕구일 것이다. 지방의원과 국회의원의 처지는 하늘과 땅 차이다. 자신의 그릇이 국민의 대표라고 믿는 사람을 굳이 뜯어말릴 필요는 없을 것이다. 더 월등한 책임과 능력이 요구되는 일에 도전하겠다는데 그런 부분까지 비난할 이유가 있을까. 어차피 성공이든 실패든 전적으로 자신이 감당할 몫일 터. 정치인은 도덕군자를 뽑는 것이 아님과, 인간에게 내재한 욕망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 도리어 정치의 수준을 높인다고 생각한다.

큰물에 도전하기 위해 도의원직을 물러나는 것이 욕먹는 일일 정도로 정치를 순백무결한 것으로 오해하는 사람들이 많은 이유는, 어쩌면 지금의 정치판이 워낙 지저분하고 더럽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진보신당 창당 주역이 총선을 앞둔 정치적 격변의 기회를 틈타 몇 단계 건너 뛰어 민주통합당으로 향하는 세상은 이익 앞에 지조도 원칙도 없는 한국 정치의 수준을 잘 보여준다. 

진보주의자가 하루아침에 보수기득권 세력에 투항하는 것이야 한두 번 보는 것은 아니지만, 정치가 순결할 필요가 없다고 믿는 내가 보기에도 이런 장면은 어리둥절하다. 박용진 전 진보신당 대변인은 한나라당과 싸잡아 민주당을 보수정당으로 그렇게 손가락질할 때는 언제고 민주통합당에는 왜 갔을까. 

탐욕이 많은 자는 가치관보다 이익이 꾀이는 곳을 택하기 마련임을 안다면, 박용진의 선택은 이해가 간다. 자신과 아무리 색채가 맞더라도 그에게 통합진보당으로 다시 가는 건 무리였을 것이다. 통합진보당 전신인 민주노동당에서 나올 당시 감정적 앙금이 여전히 남아 있는데다 비슷한 사람들 천지니 자신이 돋보일 것이 없는 반면, 민주통합당에서는 진보진영 출신으로 희소성을 요구할 수 있는 지분을 기대했을 것이다. 과연 대표 경선에도 도전해 봤고, 공천 1순위라는 말도 들린다. 이전의 늙은 민주당 같으면 들어가고 싶어도 입당할 명분이 안서겠지만, 이제는 달라졌다는 핑계를 내세울 수 있다. 

박용진은 민주통합당은 민주당과 다르다고 말했다. 민주당이 민주통합당이 되면서 색깔을 완전히 갈아치웠다고 믿는 걸까. 믿고 싶었거나, 믿고 있는 것처럼 보이고 싶을 것이 아닐까. 그 당에 참여정부를 망하게 한 자들은 그대로 남아 있고 친노의 색깔을 덧입은 것밖에 더 있는가. 민주통합당이 자유무역주의를 반대하나. 비정규직을 반대하나. 한미 FTA는 반대한다고 하겠지. 참여정부가 했던 FTA는 잘한 것이고, 이명박 정부가 하는 FTA는 틀렸다고 하겠지. 

내 아무리 인간의 욕망을 있는 그대로 이해해 주고 싶어도 꿋꿋이 지탱해 온 가치관마저 손바닥 뒤집듯 하는 행위까지 너그럽게 대해 줄 생각은 없다. 김문수나 이재오, 뉴라이트 출신들이 그랬듯이 그건 변절이요 훼절일 뿐이다. 양지를 차지하고서도 배신자 소리를 듣기 싫다면 범 잡으러 소굴에 들어간다는 ‘기명삼’ 어법을 관두고 총선 후에도 살아남을지 알 수 없는 가난한 정당에서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다고 솔직히 인정하는 것이 그나마 연민이라도 부르는 모습일 것이다.

어쩌면 정치야말로 인간을 잘 이해할 수 있는 교과서일지 모른다. 그러나 그 교과서는 중도사퇴는 몰라도 신념 체계를 뒤집는 것까지 용인할 아량을 말해주지는 않는다. 변절이 아닌 한, 인간의 약점과 욕망을 최대한 용인하는 방향으로 정치가 나아간다면 좋겠다. 

* 1.27.경남도민일보에 게재한 칼럼을 손본 것임.
* <대자보> 편집위원, 문학평론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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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2/01/30 [02:02]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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