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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과연 발전하고 있는가?
다음 세대에게 경제·생태적으로 훨씬 어려운 시대 물려주고 있다
 
우석훈   기사입력  2011/04/18 [23:25]
40대 아파트·사교육 쏟아붓기, 다음세대까지 망쳐
 
사우디에서 요즘 유행하는 말 하나가 생각을 좀 해보게 한다.
 
"아버지는 낙타를 타고, 나는 롤스로이스를 타고, 내 아들은 젯트기를 타고, 내 아들의 아들은 다시 낙타를 탈 것이다."
 
'석유로 흥한 자 석유로 망하리라.' 그런 얘기일텐데, 결국 석유는 고갈되고 만다. 석유가 사라지고 나면 지금의 오일 머니는 뭘로 지탱할 것인가?
 
현업 시절에 카타르에게 에너지 절약과 관련된 정책에 대한 교육을 하면서, 카타르 버전 에너지관리공단 신설을 지원하는 일을 한 적이 있다. 카타르에서 무슨 에너지 수요관리인가 싶지만, 그 사람들도 결국은 석유가 고갈되는 시점이 올 것이고 그 때에 자신들의 삶을 위해서 조금씩 준비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석유와 관련해서 가장 마음에 짠하게 남았던 얘기는, 이라크전 이후 이라크 중산층들이 추운 밤을 보내기 위한 등유를 사는 돈이 자신들의 식료품 비용보다 높아서 고생한다는 얘기였다. 산유국에서 석유를 수출하며, 자신들의 중추 지지기반들에게도 석유를 제대로 공급할 수 없다는 것, 그야말로 정치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다시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는 사건이었다.
 
우리는 국민소득과 같은 지표를 시간에 따른 발전을 표시하기 위해서 주로 사용한다. 오랫동안 많은 경제학자들이 틈만 나면 지적했듯이, 이런 양적 지표에는 많은 문제점들이 있다. 그러나 별다른 대안이 없어서 국민소득을 계속 발전지표로 사용한다. 한때 사람들의 만족감을 표시하는 후생지수를 써야한다는 말도 있었고, 자연과 생태를 반영시키는 Green GNP로 대체해야 한다는 논의도 있었지만, 경제 근본주의의 시대를 지나면서 그런 얘기는 전부 빈 얘기가 되어버렸다.
 
자, 우리는 과연 발전하고 있는가? 수치상으로는 여전히 일정한 성장률을 유지하고 있고, 대기업들의 실적은 나날이 호전되고 있고, 수출과 관련된 지수는 아주 좋게 나오고 있다. 최소한 한국에서 수출과 관련된 지표들만 보고 있으면 위기라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고, FTA를 비롯한 무역관련 제도들만 확충하면 영원한 번영이 지속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현실에서는 환각이다. 우리의 경제는 지독할 정도의 독과점 구도로 변해가고 있고, 최상위 고위층을 제외한 사람들의 삶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 이걸 보여주는 다른 지표가 없을까?
 
물가상승률이나 소득불평등도를 나타내는 지니계수 혹은 가처분 소득이나 저축률과 관련된 다른 지표들이 있지만, 일반인들이 이런 수치들을 찾아보는 경우는 거의 없고, 그런 것들에서 실제적 의미를 느끼는 경우도 거의 없는 것 같다.
 
복잡한 개념이 나올 때마다, 나는 어머니와 장모님 생각을 한다.
 
우리 어머니는 초급 대학인 2년제 시절 교대를 나오셨는데, 세상의 복잡한 일이라는 건 전혀 모르신다. 우리 어머니가 아는 모든 것은 조선일보와 동창생들끼리 나누는 정보가 전부이다.
 
장모님은 4년제 대학을 나오셨고, 유치원을 잠깐 운영하셨고, 역시 조선일보와 친구들 사이에 오가는 정보가 대부분이신 분이다. 뒤늦게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고, 이제 막 개인전을 준비하고 계시다.
 
지니계수? 이 두 분 모두,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얘기이다. 소득불평도 같이 어려운 개념은 북한의 지령을 받는 좌익들이나 하는 얘기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이다. 우리의 식사에서 싸늘한 침묵의 시간으로 채우지 않기 위해서는 세상 살아가는 얘기가 대화 메뉴로 올라와서는 안된다.
 
이런 분들도 국민소득이라는 개념은 이해한다. 그러나 그 외에 다른 방식으로 작동하는 계수들에 대한 얘기들은 전혀 전달도 안되고, 아예 그런 방식의 생각은 머리에 탑재된 적이 없으신 분들이다.
 
발전과 개발, 영어로는 전부 development라는 같은 단어의 다른 번역어일 뿐이다. 생물학에서 얘기하는 발육도 같은 개념이다. 원칙적으로는 성장과 발전 사이에도 개념의 차이가 있지만, 여기까지 이렇게 말을 늘이면, 이제 개념적으로도 취약하고 통계적으로도 일관되지 않은 얘기들이 길어진다.
 
교회 설교 시간 혹은 절에서의 법회 시간, 어떻게 보면 지루하도록 긴 시간일지도 모르지만, 뭔가 전달하기에는 턱없이 짧은 시간 동안에 직관적인 얘기들로 채울 수밖에 없다.
 
대중 강연이나 신문 칼럼도 마찬가지로 아주 짧은 시간이나 짧은 지면만으로 간단하게 얘기를 전개해서 성급히 마무리할 수밖에 없다.
 
물론 술을 마시면서 밤새워 얘기한다고 해도 어차피 평행선을 달리는 두 개의 생각은 절대로 하나로 모이지 않고, 누군가에게 "그래 그게 맞다" 이런 생각을 끌어내는 것은 미션 임파서블과 같다.
 
우리가 서로 진심으로 동의할 수 있는 순간은, 이미 오래 전부터 상대방과 결혼하기로 마음을 먹은 두 사람이 "우리 결혼합시다"라고 하는 그 한 순간밖에 없는 것이 아닐까?
 
얼마나 많은 청춘 남녀들이 자신이 흠모하는 대상에게 "그래 나도 너와 결혼하고 싶어"라는 말을 듣기 위해서 밤잠을 설치는가? 그렇지만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에게 설득으로 결혼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발전에 대해서 혹은 경제에 대해서 전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을 설득하거나 납득시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다. 그래도 질문을 멈출 수는 없다.
 
'88만원 세대'를 준비하는 과정보다 먼저 있었던 질문이 발전이란 무엇인가 혹은 어떻게 우리는 발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가 그런 질문이었다.
 
첫 번째 던진 질문 중의 하나가 과연 우리의 중산층의 자식이 다시 중산층이 될 수 있는가?
 
40평 아파트에 사는 부모의 집에 사는 대학생이 언젠가 자신이 독립하게 되었을 때, 부모가 스스로 장만했던 것만큼의 거주 조건을 마련할 수 있을까?
 
첫 번째 했던 종류의 서베이는 삼성전자 등 삼성과 현대의 평직원과 대리들의 삶을 살펴보는 일이었다.
 
내가 살펴본 사람들 중에서 자신의 힘으로 집을 장만한 사람은 딱 한 명 보았다. 사내 결혼의 경우였는데, 아버지가 유명한 공기업 상무였다. 물론 부모가 집을 장만하는 데 경제적 도움을 주지는 않았는데, 삼성전자나 현대자동차라도 혼자서는 작은 아파트라도 장만하는 건 불가능하고, 사내 결혼 등 부부의 힘을 모으는 경우만이 가능했다. 그것도 벌써 5년 전에 했던 서베이다.
 
최근에 유사한 서베이를 다시 한 번 해봤는데, 지금은 그렇게 사내결혼을 한다고 해도 불가능하다. 그 동안에 신입사원 초봉이 삭감되었기 때문이다.
 
최소한 중산층이라는 기준을 대면, 중산층 2세가 우리가 이해하는 방식의 중산층이라고 한다면 다시 중산층 수준이 되기가 어렵다. 상위 5%라는 기준을 들이대도 마찬가지이다.
 
행정고시, 사법고시 이런 데 합격한 사람들의 경우도 좀 조사를 했었는데, 변호사가 되어 아주 유명한 로펌에 들어가서 상상 초월 연봉을 받는 경우를 제외하면 역시 별 수 없다.
 
이 문제는 여전히 진행형이다.
 
지금의 10대가 경제적으로 독립하게 되었을 때, 사정은 더욱 어려워질 것이다. 나아진다는 전망은 아무 것도 없고, 아파트 가격이 훨씬 더 내려가게 될 것이라는 장기적 전망치 외에는 모든 것이 나쁜 방향을 보여준다.
 
아파트 가격이 내려간다고 하더라도, 평균적인 실질 노동임금의 하락률이 더 높을 가능성이 높다. 질적 변화를 포함한다면 말이다.
 
자기 자식이 자기보다 경제적으로 더 열악할 것이라는 걸 한국의 중산층이 집단적으로 받아들이는 순간, 그 순간이 변화가 올 첫 지점이 될 가능성이 높다. 물론 지금도 개별적으로는 이걸 이해하고 있는 편이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더욱 더 사교육에 목 내달고, '내 자식주의'로 빠져든다.
 
자, 우리의 자식이 자신보다 나은 삶을 살 수 있는가? 이게 한국의 40대에게 보편적으로 던져진 질문이다.
 
과연 우리는 발전했는가? 우리에게 부모가 물려준 것만큼을 우리는 다음 세대에게 물려줄 수 있고, 우리가 누렸던 경제적 혜택만큼을 다음 세대도 누릴 수 있는가?
 
이 질문은 20대에게는 유효하지 않다. 아마 그들은 집단적이고 공유적인 의미 외에는 다음 세대를 고민하지 않아도 좋을 사람들이 절반을 넘어설 것이다. 많은 20대는 그들이 40이 되었을 때, 부양해야 할 다음 세대에 대한 고민은 처음부터 하지 않아도 좋을 것이다. 30대는 애매하다. 그들 중 일부는 질문을 공유하게 되지만, 상당수는 역시 상관없는 질문일 수도 있다.
 
우리는 과연 발전하고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해서 국가적이고 대승적인 그런 시각으로 자신은 숨어버릴 수도 있지만, 개개인의 삶으로 돌아가 자신을 둘러싼 일상성만을 본다면 어쩌면 우리는 심각하게 퇴보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더 좋은 스마트폰을 가지고 있다는 게 우리가 나아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작은 징표라도 되는가?
 
생태적으로만 본다면, 낙지를 기준으로 생각할 수 있을 것 같다. 6.25가 끝나고 가난했던 사람들이 종로 뒷골목에서 먹던 싼 안주 중의 하나가 낙지볶음과 산낙지였다. 이제 낙지는 그렇게 싼 음식이 아니다. 세계에서 가장 좋은 조건을 가진 낙지와 조개 등 어폐류, 이건 갯발에서 나는 음식들이다. 이미 우리 시대에도 낙지는 싼 음식이 아니다.
 
우리의 다음 세대에는, 낙지나 우리 근해에서 나는 어패류는 이미 귀족들이나 맛 볼 수 있는 귀한 음식이 될 것이다. 이미 갈치가 그렇게 되었다. '가을 전어'라고 부르는 전어는 예전에는 먹지도 않는 음식이었다.
 
경제적으로 우리의 다음 세대는 우리보다 물질적으로 훨씬 어려운 시대를 겪게 될 것이고, 생태적으로도 우리의 다음 세대는 어려워질 것이다.
 
자, 우리는 발전하였는가?
 
60년대 후반, 진공관으로 만든 TV가 한국에 보급되기 시작하였다. 나는 내가 태어난 해에 아폴로가 달에 가는 모습을 보기 위해서 진공관 흑백 TV를 샀던 최초의 수 십만명 중의 한 명인 교사를 부모로 두었기 때문에, 아주 어려서부터 TV를 보고 자란 최초의 TV 세대이다. 당시에 진공관 TV를 갖는다는 것은 요즘 시대에 풀 프레임 DSLR를 갖는 것보다 더 호사스러운 취미였다.
 
이제는 방마다 TV가 있는 시대이고, 곧 아날로그 TV가 종료되고 디지털로 전환될 것이다. 이게 발전한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는가?
 
삶의 기본은 의식주이고, 이것은 인간이 동물로 살아가는 한 변하지 않는 영원한 진리일 것이다. 지금 한국은 최상위 일부를 제외하면 의식주가 편하지 않은 시대를 살고 있다. 그리고 그 편하지 않은 의식주 조건은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더 악화될 것이다.
 
우리가 지금 발전하고 있는 과정이 아니라는 것을 이해하는 순간 다음 일들이 가능하다.
 
시간이 지날수록, 나이가 어릴수록 점점 더 살기가 어려워지는 데, 도대체 우리는 무엇을 위해서 경제성장을 하고 경제발전을 한 것일까? 그리고 진짜 경제적 발전을 하기는 한 것인가?
 
50년대에 전쟁이 끝나고 경기고 등 좋은 엘리트 고등학교를 나온 할아버지들이 꼭 하는 말이 있다. 당시에 자신은 집이 가난해서, 고등학교 때는 이미 과외를 하면서 자수성가했다... 그런 분들에게 내가 이렇게 얘기한다. 그런데 왜 지금의 고등학생은 그렇게 할 수 없는 세상을 만드셨어요?
 
또 다른 얘기도 있다.
 
나는 전두환 때 고등학교를 다녔는데, 당시 학교가 끝나면 3시경에 오후반이 끝난 초등학생들과 같이 집에 돌아왔다. 그 얘기를 하면 경기고 나온 할아버지들이 자신들도 3시에 집에 돌아왔다고 하면서, 전차를 타고 돌아오던 즐거웠던 10대의 얘기를 풀어놓는다. 자신들은 과외도 안 하고, 그게 경기고 등 당시 좋았던 고등학교의 힘이었다는 거다.
 
그럴 때마다 내가 이렇게 쏘아붙여준다. 그런데 왜 지금은 3시에 고등학생들이 집에 돌아갈 수 없는 세상을 만드셨어요?
 
고등학생들이 3시에 집에 돌아가서 책을 읽거나 혼자서 공부하거나 아니면 그냥 놀거나, 과외를 해서 자신의 학비를 마련하거나...
 
60년대에서 80년대, 한국 경제가 튼튼하게 움직일 수 있던 힘은 그렇게 놀았던 고등학교 그리고 대학 강의는 아예 들어가지 않던 그런 대학 분위기에서 만들어진 것 아닌가? 정량적 지표로 잡히지는 않지만, 정성적 지표로는 그렇게 말할 수 있다.
 
지금 40대들은 자신이 번 모든 돈을 아파트와 사교육에 쏟아붓고 있다. 물론 그렇게 자신들이 망하는 건 자신의 선택이지만, 그렇게 자신들의 2세가 스스로 발전하고 가질 수 있는 가능성을 죽이고 있는 셈이고, 인권이라는 눈으로 보면 청소년 학대의 주범이 되었다.
 
자신들은 3시에 학교가 끝나고 집에 돌아갈 수 있었고, 학점 같은 건 신경쓰지도 않고 자유를 만끽하며 독서할 수 있었던 삶을 살았는데, 왜 자신의 2세에게는 그럴 기회조차 주지 않는가?
 
우리 주변에서 가만히 살펴보자. 도대체 무엇이 발전한 것인가? 우리가 발전한다는 것은 최소한 우리가 10대 때 누렸던 만큼의 자유라도 우리들의 2세에게 주는 것으로부터 시작할 것이다.
 
10대 우울증, 10대 자살. 이게 발전인가? 자신이 받은 것보다 다음 세대에게 더 줄 수 있고, 자신이 사회로부터 받은 것보다 더 내놓을 수 있을 때 그것이 진정한 발전이다.
 
드라마 <커피 프린스 1호점>에 이런 대사가 나온다. "왜, 네가 내게 준 것은 마음이고, 내가 네게 준 것은 돈이라서?"(한결이 은찬에게)
 
지금의 한국 40대 중산층은 부모에게는 마음을 받고, 자식에게는 돈을 주려고 한다. 그것도 직접 주는 게 아니라 '사교육'이라는 형태의 학벌을 말이다.
 
그게 아니다. 부모는 자신에게 마음을 주었는데, 왜 자신은 그 마음을 직접 표현하지 못하고, 돈으로 주려고 하는가? 마음을 주는 법을 잊어버렸는가? 40대 아빠들에게 물어보고 싶다. 자신의 딸과 언제 마지막으로 진짜 대화를 했고, 자신의 자녀가 아빠가 자신에게 마음을 주고 있다고 느끼고 있는지?
 
돈으로 뭔가 해결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돈이 해결해주는 건 생각보다 적다. 우리의 2세들은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마음이 필요하고 대화가 필요하다. 학원에 바치는 돈. 그건 사랑 아니고, 정성도 아니고, 암 것도 아니고, 그냥 청소년 학대, 자식 학대이다.
 
우리는 과연 발전하고 있는가?
 
40대가 이 질문을 한 번쯤 진지하게 하지 않는다면, 자신은 물론이고 자신을 둘러싼 식구들을 모두 불행하게 만들지도 모른다.
* 글쓴이는 경제학 박사, 연세대 문화인류학과 강사, 성공회대 외래교수, 2.1연구소 소장입니다.

* 저서엔 <88만원 세대>, <한미FTA 폭주를 멈춰라>, <아픈 아이들의 세대-미세먼지 PM10에 덮인 한국의 미래>, <조직의 재발견>, <괴물의 탄생>, <촌놈들의 제국주의>, <생태 요괴전>, <생태 페다고지>, <명랑이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등이 있습니다.

*블로그 : http://retired.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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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1/04/18 [23:25]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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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MISO 2011/04/28 [13:17] 수정 | 삭제
  • 오늘날의 40대가 자녀에게 마음을 못주고 돈으로, 즉 사교육을 통해 자녀를 학대한다는 글에 공감하면서 다른쪽으로 40대를 이해하려는 내용을 적어봅니다.
    40대의 부모는 6-70대 이상인 분들로 6.25를 10대 똑는 20대에 겪은 분들입니다. 이분들의 마음속깊이에는 인간의 기본 안전에 대한 욕구에 기초한 불안, 두려움에 있는 분들이, 즉 생존의 위협을 피부적으로 경험한 분들이지요. 그분들이 자라서 가장이 되어 자녀를 양육할때 우선시하는 것은 생존을 위협하는 기본욕구, 즉 의식주, 경제적안정 입니다. 그러므로 지금의 40대에게 심어준것은 유일무이 살아남는 방법, 즉 경제적 안정, 출세지향, 가문을 일으키는 역사적 사명을 최우선으로 직,간접 심어주었지요. 그런 부모의 엄청난 기대와 함께 무의식적으로 찾아오는 불안, 두려움을 그대로 더욱 강화되어 자녀에게 고스란히 투사되는 것이지요. 어처면 오늘날의 40대도 또다른 희생자이며 그분들의 부모는 한국역사의 가장 어려운 시기의 총체적 트라우마를 자자 손손이 더욱 진폭되고 깊이 있게 오늘날의 청소년에게 까지 전수되어 내려오고 있는것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