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멸과 창조의 형이상학’이라는 부제가 붙은 조성훈의 『들뢰즈의 잠재론』은, ‘잠재성(virtuality)’이라는 특정한 개념을 통해 들뢰즈 철학의 엣센스를 포착하면서 들뢰즈의 예술론까지 설명하고 있는 저작이다. 한국인이 쓴 들뢰즈 해설서도 제법 많이 출판되었지만, 어떤 특정 개념을 통해 들뢰즈의 철학과 예술론을 조망한 책은 이 책이 처음이라고 알고 있다. 그만큼 이 책은 한국의 들뢰즈 연구가 심화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하겠다. 그런데 이 책은 들뢰즈 철학을 요약하거나 다른 연구자의 해석을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들뢰즈의 텍스트를 저자 스스로 풀어내고 있다는 점이 눈에 띈다. 그 작업은 저자가 “다른 연구자의 관점으로 논의를 진행”하지 않고 “들뢰즈를 직접 파고들 것을 기획”(26)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다른 연구자의 관점을 빌려오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자신의 삶에 양식이 될 수 있도록 들뢰즈의 텍스트를 천천히 씹으면서 소화하고자 했을 테다. 그 소화 과정을 서술한 결과가 이 책일 터, 그래서 저자는 엄밀하고 압축적으로 서술되고 있는 들뢰즈의 철학을 풍부한 구체성을 통해 생동감 있는 문체로 풀어 상세하게 설명할 수 있었다.
▲ 들뢰즈 철학의 기반을 적확하면서도 생동하는 표현으로 밝혀낸 책. © 갈무리 출판사, 2010 | |
그런데, 바로 그러한 이유로 저자가 다루고 있는 들뢰즈의 책은 많지 않다. 이 책은 두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1부는 들뢰즈의 『베르그송주의』를 해설하고 있고 2부는 1부에서 해명한 들뢰즈의 잠재성 개념을 통해 들뢰즈의 예술론의 핵심을 추출하고 있다. 2부에서 주로 인용되고 있는 책은 『프루스트와 기호들』이다. 저자는 주로 예술의 본질에 대한 논의에서 이 책을 끌어들인다. 한편 그는 사디즘과 매저키즘의 고유성을 밝히고 있는 책인 『매저키즘』의 주요 부분을 소개하고, 그밖에 『시네마』 연작의 일부분을 상세하고 설명한다. 그리고 휘트먼론, 『철학이란 무엇인가』, 『디알로그』 등에서 조금씩 인용하고 있다. 저자가 서문에서 밝히고 있듯이 이 책에는 들뢰즈의 주저라고 할 『차이와 반복』, 『앙띠-외디푸스』, 『천개의 고원』이 등장하지 않는다. 저자의 저술 스타일 상 이 대작들을 다루려면 또 다른 책이 필요했을 테니, 이해할만 한 일이다. 게다가 들뢰즈의 ‘잠재성’ 개념이 전면적으로 다루어지고 있는 저작인 『베르그송주의』에 저자가 많은 지면을 할애해야 했기 때문에, 저 대작들을 다룰 여력은 없었을 것이다.
저자는 『베르그송주의』와 베르그송의 텍스트를 동시에 읽어나가면서 들뢰즈의 진술을 베르그송의 진술로 뒷받침하여 상세하게 설명해준다. 그래서 압축되고 난해한 들뢰즈의 논의를 독자가 좀 더 정확하고 풍부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베르그송주의』에 대한 상세한 독해는 들뢰즈 사상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매우 긴요하다. 그 책에서 전개된 베르그송적인 잠재론은 들뢰즈 철학 전반을 관통하는 핵심 키워드이기에 그렇다. 가령 후기 저작인 『시네마』 연작에서 들뢰즈는 자신의 영화 철학을 베르그송의 시간론에 기대고 있으며, 그가 남긴 마지막 유고인 「현실적인 것과 잠재적인 것」에서도 베르그송의 철학이 여전히 중요하게 사유되고 있다. 그래서 들뢰즈의 실질적 데뷔작인 『베르그송주의』에 대한 이해와 설명은 후기의 들뢰즈까지 이해할 수 있는 열쇠를 만드는 작업이라 하겠다. 매우 복잡한 내용을 담고 있는 이 책의 내용을 간단하게 정리하긴 어렵지만, 나름대로 이해한 바에 따라 중요하다고 판단되는 문장들을 인용하면서 정리해본다.
저자에 따르면, 들뢰즈가 생각하는 베르그송주의의 기획은 우선 실재의 두 수준을 나누고 그 수준들이 공존하고 있다는 것을 밝히는 것이다. “베르그송에게 있어 객관성이란 곧 공간(적인 것)을 의미하고 주관성이란 지속을 의미한다. 마찬가지로 실재는 두 수준이 공존하는데, 한편에는 객관적 현실 혹은 사물의 상태로서 드러난 실재가 있고 다른 한편에서는 잠재적인 채로만 남아 있는 주관적 실재가 있다.”(65) 즉 잠재성은 지속의 시간성 속에 존재하는 주관적 실재다. 그리고 본성적으로 차이가 있으며 그 무엇으로도 환원될 수 없는 다양체들이 지속의 시간성 속에서 잠재적으로 존재한다. 하지만 그 존재 각각의 차이가 개체들의 고립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지속은 내 안의 흐름뿐만 아니라 타자의 흐름을 둘러싸고 포함하는 또 다른 하나의 흐름을 형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자신뿐만 아니라 타자를 포함하는 비개인적 역량이 있”어서 “지속은 다수이며 하나”(412)라고 말할 수 있다.
잠재성은 아직 현재화되지 않았기 때문에 과거이고, 또한 타자다. 그런데 그 과거는 계량적인 시간에서와 같이 시간의 진행 속에서 덧없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현재화되지 않았지만 잠재적으로 실재하고 있는 것이고, 또 현재화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통상적인 시간 이해는 전복된다. 잠재성이 현재화된 것이 현재가 된다면, 현재가 과거가 되는 것이 아니라 과거가 현재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본성상의 차이들이 실재하고 있는 과거-잠재성은 현재의 근거가 된다. 그 잠재적인 실재가 현재화되기 위해서는, 우선 주관적 실재로의 “관심의 전향”을 계기로 잠재적인 실재에로의 ‘투신’, “단숨에 파고드는 도약”(97)인 회상을 통해 현재와 공존하고 있는 그 잠재적 존재를 긍정해야 한다. 그리고 긍정된 그 잠재적 실재가 “육체를 통해 행위로 혹은 물질과 공간으로 전환”(108)될 때 비로소 잠재성의 현재화는 이루어진다. 이렇게 행위 또는 물질-공간으로 전환되면서 이루어진 잠재성의 현재화는 과거의 공허한 반복일 수 없다. 이때의 현재는 공허하게 지금을 지나쳐 사라지고 있는 무엇이 아니라 잠재적인 실재의 “이행이며 끊임없는 생성이며 변화”(88)가 된다.
이러한 들뢰즈의 잠재론을 바탕으로, 저자는 이 책의 2부에서 예술의 존재론을 펼친다. 저자는 “들뢰즈에게 예술의 힘은 존재의 고유의 시간과 지속의 보존에 있다”(285)고 한다. 즉 예술의 힘은 잠재성의 보존에 있다. 『시네마 2』의 1장을 해설하고 있는 2부의 4장에서, 잠재성을 육화하여 보존하는 예술의 ‘본질’에 대해 저자는 네오리얼리즘 등의 영화 등 풍부한 예를 들어 흥미롭게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잠재성의 육화이자 현시인 예술은 “자연 안의 모든 존재의 고유함을 훼손하지 않고도 그들을 하나의 시간 속에서 공존하”(415)게 한다고 한다. 즉 “예술을 통해 육체들은 잠재적 실재 속에서 하나의 시간, 하나의 흐름, 하나의 소용돌이 속으로 잡입”(349)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예술을 통해 육화된 잠재적인 차이들은 하나의 시간 속에서 공존하고 공명한다. 그런데 삶에서도 공명은 일어나지만 그것은 한정적 조건들 속에서 비자발적 기억에 의해 우연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데 반해, “예술은 그러한 규정적 조건들을 넘어 스스로 공명 자체를 생산”(384)한다는 데 차이가 있다. 그리고 예술에서 생산되는 공명 속에서 횡단 역시 생산된다. 예술은 “다양한 관점들의 본성적 차이 그리고 그 파편들 간의 간격을 긍정하면서도, 그들을 단일한 통일로 묶지 않고 횡단성이라는 고유한 형식을 통해 그 안에서 파편들이 소통할 수 있도록 해준다.”(388)는 것이다.
횡단 속에서 생산된 새로운 관계를 들뢰즈는 아상블라주(assemblage)라고 부른다. 저자는 이 아상블라주가 “파편들의 새로운 관계의 윤리적 가능성을 예시한다”(403)고 하면서, 그것은 바로 “언제나 잠재성 안에서만 자신의 삶을 펼”(404)치는 소수자의 윤리라고 주장한다. 예술에서 현현된 차이들(파편들)의 공명하는 관계 맺기가 바로 소수자가 되는 삶이 어떠한 것인지를 예시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이 책은 잠재성 개념의 해명에서 예술의 존재론으로, 예술의 존재론에서 소수적 삶의 생성이라는 윤리에로 논의를 전개시킨다. 소수적 삶의 윤리란 잠재성과 접속하여 잠재성의 현재화를 통해 생성-변화하는 삶, 특이화하는 삶이며 이와 동시에 척도의 권력에서 지속적으로 탈주하는 삶을 가리킬 것이다. 저자는 이러한 삶의 생성을 하는 데 있어서 예술이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규명한다. 저자의 논의를 따라가다 보면, 예술을 접할 때 경험하게 되는 강력한 충격과 정동이 무엇에 근거하고 있는가를 알 수 있게 되고, 또한 예술에 몰입하는 행위가 한갓 사치스러운 향유가 아니라 삶을 변화시키고 권력으로부터 탈주하는 길로 이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더 나아가 그의 책은 우리 앞에 놓여 있는 예술 작품의 어떤 면에 우리가 주의를 기울이고 접속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시사해준다.
그런데 여기서 들뢰즈의 잠재성에 대한 논의가 더 진행되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이 책은 들뢰즈의 잠재론을 통해 예술의 존재론적인 힘을 밝히고 있다는 점에선 충분히 성공했다고 본다. 하지만 저자가 노렸다는 “예술의 논의를 윤리적․정치적 관점으로 확장시키려는 시도”(25)가 그다지 구체화되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특히 예술의 정치적 의미에 대해서는 별로 논의되지 않은 것 같다. 예술의 정치성을 논의하기 위해서는 특정 예술 경향이 정치사회적으로 어떠한 조건 속에서 생성되게 되었는가에 대한 논의가 선행되어야 할 것인데, 이를 위해서는 들뢰즈가 가따리와 함께 쓴 정치철학적 저작인 『앙띠 오이드푸스』나 『천개의 고원』, 그리고 『카프카』를 살펴봐야 할 것이다. 또한 『시네마』에 대한 논의도 더 필요할 것이다.(이 책에서는 『시네마』 연작의 각 1장에 대해서만 설명되고 있다.) 하지만 이 책은 앞에서 언급했듯이 들뢰즈의 그 책들을 다루지 못했다. 허나 이 주제에 대해서는 저자가 후속 작업에서 구체화하여 또 한 권의 두툼한 책을 우리 앞에 내놓을 것 같기도 하다.
이와 관련하여 이 책이 보여준 예술론에 대해 토론할 부분이 있다는 것도 밝히고 싶다. 방금 거론한 들뢰즈의 책들에서는 예술의 형이상학적 존재론만이 아니라 특정 예술의 역사적 사회적 존재 조건도 같이 논의되고 있고 민중이 사라진 시대의 정치 예술에 대해서도 논의되고 있다. 가령 『시네마 2』에서 들뢰즈는 “부재하는 민중에 대한 보고서는 정치적 영화의 포기가 아니라, 그와는 반대로 제3세계와 소수집단들이 이제부터 정초해나가야 할 새로운 기초를 이룬다. 예술, 그리고 특히 영화는 이러한 과업에 무엇보다도 참여해야 한다. 이미 존재한다고 전제된 민중에 말을 거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민중의 창조에 기여할 것.”(시각과 언어, 411-422)이라면서 새로운 정치 영화의 ‘과업’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런데 이 책의 저자는, 예술가들은 “바로 그 삶이 필요로 하는 행동과 효율로부터의 이탈 때문에”, 그 ‘초연함’으로 “오로지 즐거움을 위해, 자연이 거기에 있음을 향우하고 만끽할 뿐”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예술가의 ‘과업’에 대한 들뢰즈의 말과 예술가의 ‘초연함’에 대한 저자의 말 사이에는 커다란 간극이 있다.
이를 초기 들뢰즈와 후기 들뢰즈의 생각이 바뀌었기 때문이라고 말하기는 힘들다. 저자는 바로 『시네마 2』의 1장에서 거론되고 있는 네오리얼리즘과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를 읽어내면서 그 예술가의 ‘초연한 태도’의 가치에 대해 생각할 수 있었다고 보이기 때문이다. 허나 저자는 “예술은 그 자체가 목적”이라는 『프루스트와 기호들』의 한 구절을 인용하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이에 대한 정반대의 진술을 『천개의 고원』에서 읽을 수 있다. “예술은 결코 목적(fin)이 아니다. 예술은 삶의 선들을 그리기 위한 도구일 뿐이다. … 예술 위에서 재영토화되지 않고 오히려 예술을 탈기표작용적인 것, 탈주체적인 것, 얼굴-없음의 영역 쪽으로 데려갈 이 긍정적인 탈영토화들인 삶의 선들을 그리기 위한 도구일 뿐인 것이다.”(새물결, 357)는 진술이 그것이다. 이 정반대의 진술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이러한 문제는 들뢰즈의 예술론을 온전히 재구성하는 데 있어서 중기 들뢰즈의 책을 살펴봐야 할 필요성을 더 크게 만든다.
그리고 이러한 필요성은 이 책이 들뢰즈의 예술론을 잠재성 개념을 통해 보는 데 치중한 나머지 들뢰즈의 베르그송주의적 측면을 지나치게 강조하게 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에로 이끈다. 그런데 베르그송의 철학에 따른 잠재성 이론은 지속의 시간성만 강조되는 것은 아닐까. 회상이 잠재성으로 투신할 때의 바로 그 순간, 그 도약할 때의 시간성은, 그것이 지속 속에서 이루어지는 투신이라고 할지라도 또 다른 개념이 필요한 것은 아닐까? 현재의 차이화, 생성 변화가 일어날 때의 사건을 지속이라는 개념으로만 파악하는 것은 뭔가 부족하지 않는가? 그래서 네그리의 “시간의 완료와 ‘장차 올 것’의 열림 사이에 존재하는 순간”(『혁명의 시간』, 갈무리, 42)인 ‘카이로스’라는 개념을 떠올리게 된다. 잠재성의 현재화를 통해 현실이 차이화되는 순간은 그 카이로스 개념을 통해 이해될 수도 있지 않을까?
베르그송 철학에서 이러한 개념의 미비 때문인지, 네그리는 베르그송주의의 잠재성 개념 및 시간관에 대해 그 의의를 인정하면서도 한계 역시 지적한다. 베르그송주의에서 잠재성에로의 투신과 잠재성의 현실화가 이루어질 때의 ‘결정’이 “‘생의 도약’의 무한한 행동들이-이 행동들이 어떻게 특징지어지든-향하는 한계지점에 다름 아니”라고 지적한다. 즉 베르그송에게서 잠재성에로 투신과 현실화의 결정은 생이 가지고 있는 힘과 경향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이긴 하지만, 한편으로 우연하게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네그리는 베르그송주의의 사유가 “존재의 충만함 속에서 이루어지는 결정의 강렬성에 근접함은 분명하”지만 “이러한 결정의 과정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혁명의 시간』, 240)고 비판한다. 네그리는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는 개념으로 “공통적인 것에 관한 결정이라는 특이한 사건”을 제시한다. 공통적인 것에 관한 결정은 “특이성 속에서 자신을 구현하는 사랑”(『혁명의 시간』, 243)의 사건이며 그래서 윤리적이고 정치적인 결정이다.
하지만 들뢰즈가 이러한 ‘결정’의 문제를 사고하지 않고 잠재성과의 우연한 조우만을 사유했다고는 할 수 없다. 네그리는 『제국』에서도 들뢰즈가 베르그송에서 끌어내는 잠재성의 개념화에 대해서도 “우연성에서 필연성을 창조해내는 제도들을 강조할 필요가 있는 한 우리에게는 불충분하다”면서 그 한계를 지적하고 있는데(이학사, 457), 이에 대한 반론으로 『차이와 반복』에 나타난 들뢰즈의 ‘잠재성의 존재론’을 적극적으로 조명하고 있는 스즈키 이즈미(鈴木 泉)의 논의를 보면 그러하다. 스즈키는 들뢰즈가 “우리들의 삶이 잠재적인 다양체라는 실험 시스템의 한 가운데에서 변모를 성취하는 실험을 되풀이할 수밖에 없다고” 가르쳤다면서, 그가 “일상적인 경험의 한 가운데서 삶의 폭력적인 변용을 성립시키는 실험적인 장의 존립을 확보하고자” 했다고 주장한다.(「잠재성의 존재론- 초기 들뢰즈」, 『자율평론』 15호) 그리고 들뢰즈의 그러한 시도에 따라서, “잠재성을 찬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 한 가운데서 행하”면서 “보다 창조적인 실험을 계승”할 것을 그는 주창한다.
들뢰즈의 잠재성론에 대한 이러한 논의는, 그의 잠재성 개념이 베르그송의 개념화에서 더 나아가 실험(또는 살아 있는 노동), 더 나아가 정치적 실천의 문제와도 연결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그래서 들뢰즈의 잠재성에 대한 논의는 더 진행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 진행된 논의는 들뢰즈의 예술론에 대해서도 더욱 진전된 논의를 가져올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논의의 진전은 조성훈의 이 책을 바탕에 깔고 지속적으로 참조하며 진행시켜야 할 것이다. 들뢰즈의 베르그송주의적인 면에서 개념화된 잠재성-분명 이 개념은 들뢰즈 전 철학의 기반이 되고 있다고 판단되는데-에 대해서, 이 책만큼 충실하고 구체적으로, 그리고 적확하면서도 생동하는 표현으로 밝혀낸 책은 그다지 찾아보기 힘들 것이기에 그렇다.
* 글쓴이는 문학평론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