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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프트 대구…"대구, 색깔 좀 바꿔주세요"
'동토의 왕국' 대구에서 화끈하게 '좌파 간판' 내걸다
 
우석훈   기사입력  2010/05/23 [00:07]
"대구, 색깔 좀 바꿔주세요"
 
지방선거 둘째날, 대구에 갔다가 대구 MBC 앞에서 조명래 진보신당 대구시장 후보의 유세차랑과 나란히 신호에 걸려서 유세를 꽤 길게 구경할 기회가 되었다.

조명래 후보는 잘 나오면 6% 정도 나온다고 하는데, 다른 사람들이야 "에계" 하겠지만, 요즘 노회찬 지지율 보면 대구 진보신당의 6%에게 그렇게 말하기도 어렵다.

선거 구호 중에서 "색깔 좀 바꿔주세요"라고 하는 게 눈에 띄었다. 파란색 한나라당, 그 한 가운데에서 색다르면서도 눈길을 끄는 구호였다.

이제는 '동토의 왕국' 정도로 생각되고, 박근혜 텃밭이자, 한나라당의 텃밭 근원지 정도로 생각되는 게 요즘의 대구 이미지이지만, 원래 대구가 한국에서 가장 좌파들의 도시였고 어떻게 보면 한국 정치경제학의 고향이기도 한 셈이다.

맨 앞 줄에 서 있는 정치경제학자들 중에서는 대구 출신이 많고, 심지어 전라도 대학들에서 정치경제학 가르치는 선생님들 중에는 대구 출신이 적지 않다.
 
대구는 원래 '좌파들의 도시'

▲ <레프트 대구> 창간 웹자보     ©대자보
90년대 동구가 붕괴한 이후에도 가장 오랫동안 헌책방에서 자본론이 돌아다니던 곳이었다고 알고 있다. 정권이 바뀌면서 이제는 좀 어려워졌지만, '새 정치경제학'이라는 구호로 일종의 new left 학술운동을 주도하던 곳도 경북대였다. 나도 성공회대로 소속을 바꾸기 전 2년 동안에는 경북대 소속이었고, 매달 어쨌든 대구에 내려가던 시절이 있었다.

대구에서 지역 종합지 형식으로 <레프트 대구>라는 잡지를 새로 만들었다. 창간호는 800권을 찍었는데, 그건 전부 소화했다고 한다. 대단한 일이다.

진보신당이라는 이름에는 논란이 좀 있었는데, 원래의 당명은 진보신당을 만들기 위한 연속회의 정도로 실제 이름은 연석회의인 임시 이름이다. 입장에 따라서는 선호의 차이가 좀 있을 것 같은데, 어쨌든 이번 지방선거에서 이 이름이 가지고 있는 한계가 여러 가지로 드러나게 된 셈이다.

"도대체 어떻게 정세균과 내 이름을 같은 항목에 올릴 수 있는가, 도대체 어떻게 이해찬과 내가 같은 부류로 묶일 수 있는가." 이런 고민들이 많았는데, 아마 그렇게 곤란한 지경에 놓인 사람들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
 
정세균·이해찬과 같은 부류로 묶이다니…

원래의 분류대로 한다면 그냥 좌파 혹은 괄호 열고 구좌파가 한 계열이 있고, 뉴 레프트 계열이 또 한 부류가 있고, 이 후자에는 여성주의, 생태주의 그리고 문화주의와 같이 구좌파에서 별로 다루지 않았던 새로운 운동의 계열들이 들어가고 그 연장선에서 장애인 운동과 소수자 운동 같은 것들이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여성주의 내에도 그냥 페미니즘과 영 페미니스트들 사이에 골치 아픈 논쟁들이 있고, 생태운동 내에도 그냥 뉴 레프트라고만 분류되기 어려운, 훨씬 더 무정부주의에 가까운 흐름들도 존재하는 것이 현실이다.

그 모든 것을 '진보'라는 이름으로 때려넣게 되니까 지방선거에서 우리가 본 이 대혼동상의 문제가 생겨난 것이 사실이기도 하다.

진중권의 경우는 뉴 레프트라고 분류하면 진짜 대표적인 뉴 레프트 계열의 평론가 혹은 지식인, 그렇게 분류될 것이다.

김규항은? 조금 복잡할 것 같은데 흐름상으로는 구좌파 성향이 강하기는 하지만 <고래가 그랬어>와 함께 일종의 신매체 운동 그렇게 얘기할 수 있을 것 같다. 어쨌든 진중권과 비교하면 조금은 더 fundamentalist라고 할 수 있는, 그런 교과서적인 성향이 강하지 않을까?
 
좌파가 자랑스럽게 '좌파'라 부르다

하여간 선거기간 중에 그런 분류에 대한 곤혹스러움과 불만을 느낀 사람들이 적지 않았을 것인데, 한나라당 버전 '동토의 왕국' 정도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대구에서 '레프트 대구'라는 화끈한 간판을 걸었다. 브라보!

책자 하나가 얼마나 시대를 대변할까 싶지만, 비로소 좌파가 스스로를 좌파라고 자랑스럽게 부를 수 있는, 또 다른 시대의 흐름이 어느 한 구석에서 시작되는 것 아닐까? 

'고통이 깊어야 새로운 잉태가 나온다'는 데미안 버전의 부드러운 얘기가 이번에도 유효할 것 같다. 

대구에서 시민운동이든 민중운동이든, 한나라당이 아닌 목소리를 낸다는 것이 얼마나 부담스럽고 버거웠겠는가? 

그러나 대구는 노동자의 도시였고, 한국에서 노동운동의 원형을 만들어낸 곳의 하나이기도 하다. 

인민노련의 역사를 찾아가면서, 인천에 있던 인민노련이 전국조직화하면서 맨 처음 제대로 된 활동가를 파견한 곳이 경주이기도 하다. (<이상한 나라의 인민노련>은 경주에서 첫 페이지를 시작할려고 생각하는 중이다.) 
 
무엇이 이 시대의 레프트인가?

2010년. 계몽의 시대는 끝났다고 생각한다. 누구도 누구 위에서 지도할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고, 누구도 누구를 계도해서 새로운 길로 가게 만들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평등과 수평이라는 말은 조금 다른 것 같다.
 
평등은 말이 좋아 평등이지 결국 평등이라는 개념을 매개로 누군가가 누군가를 지도하는 그런 구조로 갈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극단적인 평등주의는 스탈린주의의 다른 이름으로 불리기도 한다.

수평은 방향은 없고 구조만이 존재하는 매우 밋밋한 개념이기는 한데, 2010년 한국에서 레프트라는 새로운 질문은 수평이라는 새로운 구조에 대한 질문이기도 한 것 같다.

무엇이 이 시대의 레프트인가?

'레프트 대구'라는 잡지의 제호를 보면서 머리가 맑아지는 것까지는 아니지만, 피가 끓기는 하는 것 같다.
* 글쓴이는 경제학 박사, 연세대 문화인류학과 강사, 성공회대 외래교수, 2.1연구소 소장입니다.

* 저서엔 <88만원 세대>, <한미FTA 폭주를 멈춰라>, <아픈 아이들의 세대-미세먼지 PM10에 덮인 한국의 미래>, <조직의 재발견>, <괴물의 탄생>, <촌놈들의 제국주의>, <생태 요괴전>, <생태 페다고지>, <명랑이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등이 있습니다.

*블로그 : http://retired.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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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0/05/23 [00:07]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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