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경제·IT사회문화미디어국제·과학여성환경·교육
전체기사 공지사항 사회단체알림마당 기고및토론방 편집회의실
편집  2019.08.23 [23:01]
정연복의민중신학을찾아
공지사항
사회단체알림마당
기고및토론방
편집회의실
개인정보취급방침
대자보소개
광고/제휴 안내
기사제보
HOME > 정연복의민중신학을찾아 >
광주의 아버지가 '딸에게 보내는 편지'
4·19 혁명을 기억하며 읽는 글
 
정연복
인옥아! 내 사랑하는 딸아!

내가 이 글을 신문에 투고하여 세상에 널리 읽히고자 하는 것은 나만이 딸을 가진 애비가 아니고, 또 너와 같이 너의 학교에 딸을 보낸 수천의 부모 형제 자매들이 모두 내 심정과 같을 것을 생각하고 이 부끄러움을, 이 고통을 함께 나누고, 함께 울고자 함이로다.

구태여 너의 학교 이름을 여기서 밝히지 않는다 해도, 한마디로 서울 시내에 있는 '대학교'라는 이름을 가진 학교 중에서 저 4 19데모 때에 나서지 않고 빠져버린 대학교라면 둘도 있지 않고 하나밖에 없기 때문에(나는 그렇게 알고있다. 세상 사람들은 누구나 다 짐작할 것이다.)

시골에서 어렵사리 외과의사 개업을 해서 네 뒤를 보아온 내가 한 사람의 아버지로서, 한 사람의 이 나라 동포로서 이렇게 슬프고 괴로워해 보기는 내 생애에 있어서 이번이 처음이다. 너의 학교는 수십 년의 역사를 가지고 빛나는 전통을 자랑하며 수많은 현모양처와 여성 지도자를 배출해 낸 이름높은 학교였다. (중략)

그러나 나는 완전히 할 말이 없게 된 '부끄러운 아버지'가 되고 말았다. 나는 신문이란 신문은 모조리 뒤지면서 행여나 내 딸의 학교 이름도 나오지 않나 하고 얼마나 찾았는지 모른다. 이제는 시력도 약해지고 기억력도 좋지 않지만 나는 너의 학교의 이름을 단 한번도 발견하지 못하고 말았다. 신문을 보면서도 눈물이 사뭇 복받쳐 견딜 수 없는 이 벅찬 역사적 마당에서, 그 젊은 대열 가운데 하필이면 내 딸이 다니는 학교만 빠졌다는 것은 이 무슨 해괴한 일인가?

그 숱한 젊은이들 가운데 내 딸의 모습이 끼여 있지 않고, 내 딸의 학우도 끼여 있지 않았다는 사실--- 이것이 수십 년의 전통과 역사를 자랑하는 내 딸의 학교가 홀로 보여준 교풍이었단 말인가?

인옥아! 요즈음은 별로 수입도 많지 않고 모아 놓은 재산도 없다는 것, 누구보다 잘 알 것이다. 그러나 나는 남의 자식에게 빠짐이 없이 무엇이나 부족함이 없이 네 뒤를 밀어오기를 있는 힘을 다하였다. 그리고 내가 네게 바라는 것은 '비굴한 행복'보다 '당당한 불행'을 사랑할 줄 아는 여성이 되어지이다 하는 간절한 마음이었다.

서울의 거리가 온통 너와 같은 젊은 세대의 불길로 거세게 타오를 때, 인옥아! 너는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단 말이냐? 그 '피의 폭풍'이 강산을 휩쓸고 마침내 낡고 썩은 것들이 너희들 젊음 앞에 굴복을 하고만 그 시각에 나의 피를 받은 너는 대체 어디서 무엇을 생각하고 있었더냐? 그 불덩어리들 속에 타오르는 심장의 핏빛이 네 피와는 다르더란 말이냐? 그 암흑을 밀어 나가는 북소리들이 네 목소리와는 다르더란 말이냐? 너는 정녕 그 젊은 기수들 속에 네 생명을 바쳐 사랑하는 애인 한 사람 없었단 말이냐?

서글픈 일이다. 분한 일이다. 네 젊음을 스스로 모독한 시대의 고아가 되고 말았구나! 어찌 네 가슴에 뺏지를 달고 이 태양 아래 활보할 수 있으랴! 총탄에 넘어진 아들딸을 가진 부모들의 비통함보다 털끝 하나 옷자락 하나 찢기지 않은 너를 딸로 가진 이 애비의 괴로움이 더 깊고 크구나!

인옥아! 어서 배지를 떼고 교문을 나와 병원으로 달려가거라,. 죄인과 같은 부끄러움과 겸손한 태도로 아직도 병상에서 신음하는 그 젊은 영웅들 앞에 네 피를 아낌없이 쏟아라. 그 젊은이들이 너 같은 여자의 피라도 받아준다면.... 그리고 그만 시골로 내려오너라. 그 편이 한결 애비된 내 마음이 편할 것 같다. 그리하여 아버지와 함께 조용히 생각해 보자. 결코 '부잣집 맏며느리감'을 만들기 위해 너를 대학에 보낸 애비가 아니라는 것.... 네가 잘 알 것이다.

이 찬란하고 장엄한 역사의 아침 앞에서 이렇게 흥분하지 않고는 못 배길 것 같다. 인옥아! 이 늙어 가는 애비의 말을 너무 과격하다고 생각하기 전에 너의 가슴에 손을 얹고 스스로 물어 보아라. 사랑하는 딸자식을 위한 애비의 심정이 어떠할지를....

광주의 아버지로부터
(4·19 혁명 직후의 감격 속에, 기성세대인 한 아버지가 대학생 딸에게 보낸 편지, 조선일보 1960년 5월 2일자)



* 연세대학교 영문과와 감리교 신학대학 대학원을 졸업하고 현재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으로 있다. 민중신학적 글쓰기에 관심이 있다.
 
기사입력: 2010/04/18 [22:39]  최종편집: ⓒ 대자보
 
관련기사목록
[민주화] 동년동월 태어난 고 김종철 시민군을 기린다 김철관 2019/05/18/
[민주화] 박원순 시장 "광주 오월 영령들에게 여전히 부끄러워" 김철관 2019/05/19/
[민주화] 시민-노동자 "5.18 왜곡, 자유한국당 해체" 김철관 2019/05/19/
[민주화] 문재인 대통령 "5.18진실, 진보 보수 나뉠 수 없다" 김철관 2019/05/18/
[민주화] 촛불 참가자 "자유한국당은 해체하라" 김철관 2019/05/13/
[민주화] 4.19혁명 59주년, 민주주의 되새긴다. 김철관 2019/04/19/
[민주화] 이낙연 국무총리 "민주주의 공짜로 얻어지지 않아" 김철관 2019/04/19/
[민주화] 한국노총, 4.19혁명 정신 잇겠다 김철관 2019/04/19/
[민주화] 김철관 인기협회장 "방통심의위원, 공적정보 유출 문제 있어" 이유현 2019/03/12/
[민주화] "'5.18역사왜곡 영상 유포' 이상로 해임하라" 김철관 2019/03/12/
[민주화] '5·18 심의정보 유출' 이상로 방심위원 "아무런 죄의식 없다" 최영주 2019/03/11/
[민주화] 최경환 의원 "5.18망언 지지, 극우정당 출발 신호탄" 김철관 2019/02/27/
[민주화] 이승만의 '눈엣가시', 투쟁의 상징 서민호는 누구? 김철관 2019/02/25/
[민주화] "5.18 망언, 김진태 이종명 김순례 퇴출하라" 김철관 2019/02/24/
[민주화] 3.1운동 100주년 양심수를 사면 석방하라 김철관 2019/01/24/
[민주화] 고 장준하 선생 탄생 100주년, 글모음집 나왔다 김철관 2018/12/23/
[민주화] 올해 '양심의 호루라기를 분 사람들' 누구? 김철관 2018/12/08/
[민주화] 장준하100년위원회, 장준하 삶 다룬 콘서트 개최 임순혜 2018/08/15/
[민주화] 탄생 100년 '장준하100년위원회' 발족 김철관 2018/08/06/
[민주화] 故 박정기 전 유가협회장 영면 김철관 2018/07/29/
최근 인기기사
  개인정보취급방침대자보소개광고/제휴 안내기사제보보도자료기사검색
우) 120-093 서울시 영등포구 버드나루로 80 제일빌딩 별관 4층 TEL: 070-4411-5452ㅣFAX: 02-6280-5462 (web@jabo.co.kr / c.p: 010-2249-9446)
대자보ⓒ1998-2017 ㅣ 정기간행물 등록번호 : 서울아00133 2005.11.11ㅣ 발행인 겸 편집인 : 이창은, 청소년보호책임자 : 김경주
별도의 표시가 없는 한 '대자보' 가 생산한 저작물은 정보공유라이센스 2.0 : 영리금지 를 따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