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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와 개혁의 정치경제학
[창비주간논평] 선거용 연대만이 아닌 사회적 과제의 해법 찾는 연대돼야
 
김기원   기사입력  2010/01/20 [17:08]
요즘 야권과 시민사회의 화두는 '연대'다. 4분 5열되어 있는 진보개혁진영에서 연대의 분위기가 이처럼 고조된 적은 별로 없었다. 6월 지방선거를 통해 이명박정권의 폭주를 막아보려는 노력의 표현인 셈이다. 

김대중-노무현정권이나 이명박정권이나 "그놈이 그놈"이라 하던 일부 진보진영도 지난 2년간 뜨거운 맛을 보면서 생각이 조금 바뀌었다. 용산참사, 4대강 강행, 미네르바 구속, 부자 감세, 노조 및 시민단체 탄압, 방송 장악, 재벌개혁 후퇴, 남북관계 경색 등 사회 각 분야의 '후진화'가 너무나 두드러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명박정권에 반대하는 정치세력들 사이의 연대는 단순한 선거공학적 의미에 머무르는 게 아니라 우리 사회의 현안문제를 해결하고 바람직한 선진사회로 나아가기 위한 진보와 개혁의 필요성과도 연관된다.

"그놈이 그놈"이라는 안일한 판단 떨쳐야

2002년 대선 당시 권영길 후보 말대로 한나라당과 민주당의 차이는 샛강이고, 민주당과 진보정당들의 차이는 한강이라 치더라도 그 샛강만큼의 차이도 민중의 삶에는 중요하다. 이를 무시하는 건 세속을 초탈한 도인의 자세거나 마천루 빌딩 위에서 시내 교통정리를 하려는 행태다.

물론 아직도 최장집 교수처럼 이명박정권이 보수지만 민주주의라는 납득하기 힘든 주장을 하는 경우가 있기는 하다. 정권을 비판할 언론의 자유마저 심각하게 훼손당하고 있는데도 민주주의라 할 수 있을까. 
 
▲ (자료사진)    ©CBS노컷뉴스

최교수가 노무현정권을 사이비 민주주의라고 비판했던 걸 생각해보면 그의 민주주의 개념은 도대체 일관성도 없다. 지금이 군사독재 상태는 아니지만 민주주의를 후퇴시키고 독재로 향하려는 그 '방향성'을 부정해서는 곤란하다.

야권과 시민사회 연대 본격화… 민주당의 역할은?

이런 어둠의 세상에 한줄기 서광은 진보개혁세력의 연대에서 비쳐왔다. 작년의 경기도 교육감 선거와 울산북구 선거에서 야권과 시민사회가 뭉침으로써 (친)한나라당 세력을 물리쳤던 사례가 그것이다.

그래서 야 5당과 4개 시민단체의 '5+4회의'를 비롯한 연대의 움직임들이 본격화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가장 큰 세력인 민주당은 연대를 위해 의미있는 양보를 할 생각이 있는 것 같지 않고, 진보신당은 여론에 밀려 마지못해 회의 자리에 앉기는 했으나 판을 깰 명분만 찾으려는 느낌이 들어 안타깝다.

민주당이 호남에 안주하지 않고 집권세력으로 재등장하려면 근본적 혁신이 필요하다. 그러려면 대중에게 호소력있는 지도부와 정책도 필요하겠지만, 예전에 재야를 대거 수혈했듯이 내부구성을 환골탈태시키든가 이번에 연대를 위해 통 큰 자기희생의 모습을 보여야 한다.

호남지역의 단체장이나 의원들 중엔 지역주의에 안주한 낡은 인물들이 적지 않다. 시국선언 교사를 중징계한 호남 교육감들을 보라. 6월 선거에서 민주당은 이런 종류의 인물들을 갈아치우고 단체장이나 지자체의원 후보의 예컨대 절반쯤을 다른 야당과 시민단체에 양보하면 어떤가.

진보세력, 차이 강조보다 연대에 적극 나서라

진보세력은 랄프 네이더의 교훈을 되새겨야 한다. 그는 2000년 미국 대선에서 민주당이나 공화당이나 그놈이 그놈이라며 선거를 끌고 나가 부시의 당선에 한몫했다. 그 결과 자신의 지지층도 위축돼 2000년엔 300만 표 가량 얻었으나 그후엔 100만 표에도 미치지 못했다.

진보세력은 민주당을 한나라당과 한통속으로 몰아붙이면 자기 지지기반이 확대되는 걸로 생각한다. 천만의 말씀이다. 많은 국민들 보기엔 민주당이나 진보파나 모두 한나라당 반대쪽에 있다. 그래서 민주당과 진보파에 대한 지지는 동행한다.

진보파가 성장하려면 민주당을 욕하는 게 능사가 아니다. 민주노동당의 이정희 의원처럼 민주당 의원보다 진정성과 실력이 앞서고 대중과 더 열심히 호흡하는 게 정답이다. 또 노무현이 정몽준과의 단일화를 주도해 지지를 얻었듯이 진보파가 오히려 적극적으로 연대에 나섬으로써 자기 세력을 신장시킬 수 있다.

양보로 민심 얻는 쏠로몬 재판의 교훈

죽으면 살리라. 지난 대선 때 문국현이 단일화에 응했으면 민주당 당권을 잡았을지 모른다. 그러지 않은 문국현은 결국 망가지고 말았다. 당파의 단기적 이익이 아니라 민중의 이익을 위해 자기를 희생할 때 오히려 비약한다.

두 아낙이 서로 자기 아이라고 다툰 쏠로몬의 재판에서 칼로 아이를 잘라서 반씩 가지라는 판결에 진짜 엄마가 양보했다. 그러나 그 양보로 결국 아이를 되찾았다. 큰 세력인 민주당은 크기 때문에 양보해야 하고, 진보파는 더 진보적이기 때문에 양보해야 한다. 이럴 때 감동을 산다.

한나라당은 국민의 '탐욕'을 조종한다. 반한나라당은 국민의 '감동'을 사야 한다. 야권들의 감동경쟁을 보고 싶다. 뻔히 당선 불가능한 선거에서 막판 단일화까지 거부해서 누구 좋은 일 시키자는 걸까. 

지명도 제고나 정책 홍보라는 선거공간의 의미도 요즘엔 희미해졌다. 자신의 존재확인을 위해 민중 운운하면서 결국 반민중적 행위를 저지르는 일은 이제 그만 하자.

선거용 연대만이 아닌 사회적 과제의 해법 찾기를

지금 진보개혁세력의 연대가 '묻지마 연대'라는 지적도 있다. 당치 않다. 이명박정권의 폭주에 반대한다는 걸 알고 연대하는 것이며, 서로의 차이를 알고도 연대하는 것이다. 중요한 정책적 합의를 위한 노력은 해야 한다. 하지만 랄프 네이더가 존 케리에게 했듯이 상대편이 받기 힘든 요구를 연대의 전제로 삼는 건 '판 깨기의 알리바이 만들기'에 지나지 않는다.

진보개혁세력의 연대는 단지 이번 선거공간에서만 요구되는 게 아니다. 우리 사회 과제의 해법이 거기에 달려 있다. 이를 이해하려면 흔히들 개념 정의 없이 사용하는 진보와 개혁의 내용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이념좌표의 가로축: 진보-보수

근대사회는 시장과 국가를 두개의 축으로 한다. 여기서 진보파는 시장보다 국가를 더 선호하며 보수파는 그 반대다. 진보파가 '큰 국가론', 보수파가 '작은 국가론'에 가까운 셈이다.

하지만 진보파와 보수파의 구별은 시장과 국가의 크기[量]뿐만 아니라 국가가 노동과 자본의 이익 중 어느 쪽을 더 중시하느냐와도 관련된다. 박정희정권처럼 큰 국가라도 사회복지보다 자본축적을 더 중시하면 보수파다. 진보는 민주주의·공정성·사회연대·분배를, 보수는 시장경쟁·효율성·자기책임·성장을 상대적으로 더 강조한다.
 
▲ 지난해 11월 민주노총 주최로 열린 전국노동자대회. 진보진영의 노동시민사회단체는 이명박 정권의 노동정책에 맞선 대정부 투쟁을 선포했다.     © 대자보

그리고 진보와 보수의 구별은 상대적이다. 미국의 민주당은 공화당에 비해선 진보파지만 북유럽의 보수파와 견줘보면 그 정책은 훨씬 보수적이다. 한국의 민주당도 서구의 이념과 정책 스펙트럼에서 보면 보수파에 속하지만 한나라당보다는 진보적이다.

이념좌표의 세로축: 개혁-수구

한편 한국의 정치세력이나 이념을 평가할 땐 '진보와 보수'라는 기준과 별개로 '개혁과 수구'라는 구분도 필요하다. 전자를 가로축에 놓는다면 후자를 세로축에 놓을 수 있는 것이다. 

개혁파는 시장과 국가의 질(質), 즉 성숙도를 높이려는 세력이고 수구파는 이에 저항하는 세력이다. 시장의 질 제고란 시장의 투명성과 공정경쟁을 발전시키는 것이고, 국가의 질 제고란 국가의 민주성과 효율성을 높이는 것이다.

선진국에선 대체로 중상주의에서 자유주의를 거쳐 복지주의가 자리잡았다가 그 반동으로 시장만능주의가 출현했다. 그런데 압축적 불균등발전을 겪어온 한국은 개발독재의 중상주의에서 선진국으로 나아가는 과도기에 처해 있고 따라서 개발독재, (구)자유주의, 복지주의, 시장만능주의의 각가지 정책이 혼재되어 나타난다. 

우리 사회 진보와 개혁이 만나야 할 이유

게다가 미국의 인종문제와 마찬가지로 한국에선 짧은 근대화 역사와 남북한의 극단적 대치가 진보이념의 확대를 제약하고 주요 정치세력 사이의 이데올로기 대립지형을 서유럽에 비해 훨씬 오른쪽으로 치우치게 만들고 있다. 

또한 우파도 개혁적 우파보다는 수구적 우파가 주류를 형성한다든가, 서구에서는 진보파와 같은 의미로 좌파라는 말을 사용하는데 한국에서는 좌파가 북한체제를 숭배하는 '빨갱이'를 연상시키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따라서 한국에선 이데올로기 지형을 서유럽에 가깝게 좀더 왼쪽으로 끌어오려는 진보파와 시장과 국가의 질을 높이려는 개혁파가 연대해야 한다. 그래야 바람직한 선진화로 나아갈 수 있다.

시장만능주의 대신에 복지주의 진보, 개발독재 대신에 (구)자유주의 개혁이 필요한 셈이다. 그리하여 이명박정권에 의한 시장만능주의와 개발독재의 나쁜 결합을 물리쳐야 한다. 

'반신자유주의 연합'의 엇나간 현실인식

진보파 일각에선 반신자유주의 연합 운운한다. 하지만 이는 대중과 유리된 신자유주의라는 용어 사용이나 부정적 슬로건의 제시라는 점에서도 문제지만, 이명박정권의 개발독재 측면을 간과하고 서구와 다른 한국사회의 특수성을 인식하지 못하는 점에서 더 큰 문제를 안고 있다.

민주당과 국민참여당은 한나라당보다는 진보적이지만 서구적 진보파는 아니며, 개혁에 무게중심을 둔다. 민주노동당이나 진보신당은 개혁보다는 진보를 더 강조한다. 하지만 개혁과 진보 둘 중 어느 하나도 놓칠 수 없다. 진보개혁연대가 필요한 까닭이다. 

합리적 좌·우의 생산적 경쟁을 위하여

6월 민주항쟁과 노동자 대투쟁의 상보관계를 역설한 오종렬 진보연대 대표의 말도 같은 뜻이리라. 민주당이나 진보파의 한심하기가 이만저만이 아니지만, 그게 우리 수준이고 또 그들을 포기할 수도 없다.

우리도 서유럽처럼 합리적 좌파와 합리적 우파가 생산적으로 경쟁하게 해야 한다. 그러려면 진보와 개혁에 대한 올바른 경제적 이해와 그를 위한 지혜로운 정치적 실천, 즉 진보와 개혁의 정치경제학이 필요하다. 이번 선거에서의 연대는 그 첫걸음이다.

* 글쓴이는 방송통신대 경제학과 교수입니다.
* 본문은 디지털 창비(http://weekly.changbi.com) 2009년 1월 20일자 주간 논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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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0/01/20 [17:08]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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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나가려다 2010/01/21 [10:55] 수정 | 삭제
  • 지난 10년간 정권의 실정에 일조한 것은 반성없이 묻지마 연대를 외치는 게 노빠스럽네요. 비지파들은 잊을만하면 다시 나타나네요. 신자유주의 반대라는 구호가 추상적으로 들리는 건 신자유주의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거나 그 폐해를 애써 인정하지 않으려한다는걸 방증하는 것이겠죠.
  • 독자 2010/01/20 [20:53] 수정 | 삭제
  • 별로 평가할 가치가 크게 느껴지지 않는 글이지만...

    글 내용중에

    잔노빠들아 학수고대하며 바라옵고 원하는 반MB라는 묻지마 연대에는

    '따지지 마' 식의 동의를 강요하면서

    글 하단부의 반신자유주의 연대에 대해서는

    "진보파 일각에선 반신자유주의 연합 운운한다. 하지만 이는 대중과 유리된 신자유주의라는 용어 사용" 운운하며 시시콜콜 따지는 이율배반이 예쁘게 노출되고 있군요.

    좀 더 많이 사색하고, 좀 더 고민하고, 좀 더 공부하고 글을 쓰면 더 좋은 글이 될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