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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권 변화로 생성한 민노, 반성과 각오는 트릿해
[진단과 대응] 내가 겪은 정치의 생략, 생략의 정치 (2) 민주노동당 편
 
숨인씨   기사입력  2009/12/14 [18:48]
2006년 8월 어느날 대전, 내 생애에서 최초이자 지금으로서는 마지막으로, TV에서나 봤으며 민주노총 대의원들이나 하는 줄 알았던 ‘단상 점거’를 자행했다. 정확히는 ‘단상 진입’쯤이 될 것이다. 나는 그해 초 민주노동당 당대표 선거에서 저질러진 부정행위를 검찰에 고발하자고 주장한 당원들의 일원이었다. 우리는 대의원의 서명을 모아 발의에 성공했으나 회순에서 맨뒤로 밀렸다. 자정 넘어 의사정족수가 부족할 즈음에 상정될 것이 뻔했다. 당초 계획에 없었지만 우리 일행은 단상 점거를 결심해 버리기에 이르렀다.
 
나는 2005년 7월 초 민주노동당에 입당했다. 지난편에도 썼듯 나는 사민당이든 녹색당이든 통합진보정당인 민주노동당에서 실현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물론 2004년 원내진입후 제1기 지도부 선거를 자주파가 싹쓸이했다는 것, 그 다음 불거진 ‘국가보안법 폐지투쟁 올인론’과 ‘열린우리당 2중대 불사론’, 당 일각의 쇼비니즘적인 독도 투쟁 등은 나의 발걸음을 가로막았다. 하지만 노무현 정부와 열린우리당에서 내 지향을 실현할 수 없음을 깨닫고 난 뒤, 한때는 정당정치를 포기하고 시민운동을 거들 계획이었지만, 도망칠 수 없다는 결심이 들면서 다른 선택의 길은 없었다. 총선 이후 ‘새내기 당원’들이 대거 가입했다는 점, 나처럼 사회민주주의를 추구하는 당원들이 있다는 점, 노회찬·심상정·조승수 의원에게 대중적 좌파정치를 구현할 가능성을 엿보았다는 점도 나를 떠받쳤다.
 
구체적인 당활동 계획은 없었다. 그런 내가 정파활동을 하고 분회의 직책을 맡고 급기야 당대회 단상을 점거까지 한 것이다. 그리고 북핵사태와 일심회사건을 거치며 깊은 방황을 했다가 혁신투쟁과 대선운동을 노리며 일단 2007년을 당원으로 지냈다. 그러는 동안 나는 당원 이상의, 당인(黨人)이 되었다.
 
하지만 현재 내가 그 당을 보는 눈초리는 매우 차갑다. 이런저런 기회를 통해 당활동으로 겪은 바와 탈당한 이유 등은 자주 밝혀왔다. 그렇기에 이번에는 ‘정치의 생략’과 ‘생략의 정치’라는, 개혁당과 진보신당에도 적용되는 틀에 맞춰 이야기를 풀어나갈까 한다. 그 당의 세 가지 악성종양으로 든 ‘친북당’, ‘민주노총당’, ‘데모당’의 근간도 바로 그것이기 때문이다.
 
세미나당조차 되지 못한 뒤풀이당

 
해방정국기의 여운형이나 제1공화국기의 조봉암, 4.19 이후의 ‘혁신정당’들은 한국에서도 민주사회주의 및 사회민주주의의 역사가 존재했음을 증명한다. 하지만 해방 이후 민중단체들은 조선공산당의 젖줄로 기능하고 조봉암의 농민세력조직화가 여의치 않으면서, 사민주의 정당들은 대중적인 기반 없는 명사정당으로 생존했다. 그리고 1980년대 이후 한동안 한국의 진보 진영 대다수는 개혁이 아니라 혁명을 추구하면서 사회민주주의나 대중적 진보정당의 싹은 트지 못했다.  
 
▲ 지난해 2월3일 열린 민주노동당 임시당대회 모습. 당시 심상정 의원은 비대위 혁신안이 부결되자, 침통한 표정으로 대회장을 빠져나갔다.     ©민주노동당

옛 NL에게 독자적인 진보정당은 안중에 없었다. 그들의 궁극적 목표는 항미 전민항쟁이었으며, 남한에 ‘자주적 민주정부’를 세우기 위해 기존 정치인 가운데 비교적 가장 진보적인 김대중을 ‘비판적 지지’했다. 그 가운데 골수 주사파는 조선노동당이 있는데 뭐하러 따로 당을 만드냐는 식이었다. 한편 PD는 하나로 엮이기 어려울 만큼 다양한 흐름을 포괄하고 있었는데, 옛날 옛적 코민테른의 방침처럼 대체로 그들에게 사민주의는 ‘사회 파시즘’의 다른 말에 불과했고 진보정당은 합사개(합법주의, 사민주의, 개량주의라는 운동권 욕설의 총집합)였다. 87년과 92년 두 차례에 걸쳐 백기완 선본을 구성하는 그룹이 나타나기도 했지만 그들이 다 얼른 진보정당 건설에 나서지는 않았다. 일찍부터 진보정당 건설론에 가담했던 어떤 분이 학생시절 겪은 일화를 들려준 적이 있었다. “그때 F가 나더러 ‘개량’이라고 비판하더라고. 그래서 내가 걔한테 ‘너 나중에 나랑 같은 당하면 어쩔래’라고 물었지. 지금 같이 하고 있잖아.”
 
그때 NL과 PD였고, 지금도 자신의 계보를 스스로 이어가는 사람들에게 ‘혁명’이 무슨 의미인지는 알 수 없다. 그리 중요한 주제는 아니다. 내가 가장 존경하는 유럽 사민주의자 장 조레스는 꾸준히 개혁주의를 밀고 나가면서도 혁명의 권리를 포기하지 말라고 역설했다. 그러나 문제는 시간이 흘러서, 나이를 먹어서, 정당을 꾸리기로 한 자신의 변화가 무엇에서 비롯되었는지, 변해야 한다면 어떻게 변해야 한다는 것인지 제대로 언급하고 다음 단계로 넘어가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니, 이조차 사치스러운 설명이다. 나는 기초적인 반성조차 들어본 경험이 적다. 충분히 반성한 사람이 또 반성하는 꼴만 되풀이되었을 뿐이다)
 
알고 보니, 민주노동당의 제1정체성은 ‘좌파’도 아니고 ‘진보’도 아니었다. 나는 입당하기 전 민노당을 ‘통합진보정당’쯤으로 규정했으나 그 통합은 결코 사상의 교류나 정책적 제휴로 이뤄지지 않았다. 그들을 하나로 담은 그릇은 민주노총, 전농, 전국연합이라는 운동권 조직이었다. 물론 민노당은 김대중-노무현 세력에 비해 좌파적이고 진보적이었으나, 그보다는 ‘아직 때가 덜 묻은 후발 운동세력’의 의미가 더 강했다. 뒤늦은 정치세력화 덕분(?)에 얻은 차별성이었다. (이를 악의적으로 표현한 사례로는 “열린우리당 못 간 사람들이 모여서 만든 당”이 있다.) 그러나 과거에 대한 반성은 물론이고 각자가 진화하며 생산적 대화를 열 각오와 잠재력 없이, 운동권이 하나의 정당으로 뭉쳐야 한다는 집념만으로는 ‘세력화’는 몰라도 ‘정치세력화’를 이룰 수는 없다.
 
운동권이라면 자주 하는 일이 데모와 세미나다. 민노당원 중에 데모를 해본 사람은 많을 것이다. 세미나는, 아마 데모보다 훨씬 적을 것이다. 당내에서는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다는 열성당원도 여럿 만났다. 세미나를 했더라도 비공개적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정파별로 갈라져 진행되는 학습 말이다. 그 정파라는 것도 과연 당내그룹인지 당에 줄을 대는 운동권정파인지 분간하기 힘들긴 하지만. 당을 만들지 않더라도 운동정파들은 민족 문제나 노동 문제로 늘 모여서 이야기했을 것이다.
 
그나마 한미FTA나 비정규노동에 관련된 현안을 주제로 정파성향을 막론하고 당원들이 모여 토론회나 강연회를 여는 사례는 있었다. 그렇지만 전민항쟁이나 프롤레타리아 총파업이 아닌 선거 득표에 의한 정권창출에 도전한다는 당이, 주요 토론 과제가 그뿐이었다. 한국사회의 여론 지형은 어떤지, 그러니까 쉽게 말해 남들이 뭔 생각을 갖고 사는지, 가난한 사람은 왜 보수정당을 지지하는지, 한국의 보수정당이 가진 특수성이 무엇인지, 각 보수정당과는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 내각제나 대통령제 같은 권력구조가 좌파정당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우리 당 국회의원은 어째서 행정수도 문제에서 이리저리 갈렸는지, 올바른 정당의 구조와 문화는 어떤 것인지 등등은 공론화되지 못했다. 특별한 이론을 갖지 않더라도 경험담의 공유로도 첫 실마리를 풀 수 있는 문제였음에도 그랬다.
 
쉽게 기획할 수 있는 ‘역사’나 ‘현황’에 관한 토론조차 잘 벌어지지 않았다. 당내 대다수가 그토록 욕하는 사민주의의 역사라든가, 오늘의 이 당을 형성하는 샘과 개울을 추적하는 민노당 전사(前史)라든가, 논의할 만한 소재는 숱했음에도 말이다. 또 현재의 당을 도마 위에 올리는 일은, 마음먹고 각 정파의 수장급들을 모아 멋지게 평행선 그려주면 그걸로 끝이었다.
 
나는 2006년 봄 연세대분회에서 교육부장을 맡았다가 가을에 문화부장으로 바꿨다. 총학생회 간부인 어느 당원이 교육부장을 맡겠다고 나서면서 역할을 제대로 나눠받을 수 없어 자청해서 옮긴 까닭도 있지만, 무엇보다 그 과정에서 내가 그리던 커리큘럼을 일부도 실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4월 중순에는 4.19 공부하고 5월 중순에는 5.18 공부하는 교육프로그램은 당원용이 아니라 대학 새내기용으로 쓰기에도 단순하고 지나치게 초보적이었다. 운동에 그치지 않고 정치에도 나아가겠다는 학생이든, 학생운동과는 깊은 인연이 없으나 진보정치에 참여하겠다는 학생이든, 무언가를 얻어갈 수 있는 여건이 아니었다. 
 
▲ 민주노동당 강기갑 대표     ©CBS노컷뉴스

주류 정파의 잘못으로 돌릴 수 없다. 분회 집행부나 열성당원 대다수가 만들어낸 것이었다. 당연한 귀결이었고 한편으로는 이해도 갔다. 우수한 성적으로 청소년기를 보내고 대학에 입학해 학생운동에 뛰어들어 ‘어쩌다’ 당에 도달했으니. 아마도, 어릴 때부터 쌓아온 통일지상주의를 지키는 것이나 아니면 새로 공부하기 시작한 마르크스 이하 사회과학 이론이, 혹은 ‘운동 과제’와 직결된 사안을 좔좔 학습하고 투쟁에 바로 나서는 것이, ‘지금, 여기’의 정치를 구성하는 여론과 배경, 역사를 두루 살피기보다 더 중대하고 멋지게 보였을 터이다. 집회할 때 당기 들고 깃발 하나 추가하면 그만이지, ‘운동’뿐 아니라 왜 ‘정당’을 해야 하는지 심사숙고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한국사회 변혁을 위해서? 그러면 왜 당이지? 당신이 생각하는 당은 어떤 것인데? 혁명하기 전에, 혹은 혁명이 안 돼서 버티는 당인가? 그래봐야, 기호 0번을 달아봐야 투표용지에는 똑같이 올라간다.
 
운동권이 정당원이 되는 데에도 각성이 필요하다. 회사원이 노동계급으로서의 의식을 가지며 노동운동에 참여할 때 그러하듯이. 민노당은 이 원리를, 망각은 차치하고 처음부터 깨닫지 못했고, 그럼으로써 자동적으로 민주노총-전농-전국연합당, NL-PD동거당, 데모당으로 머물렀다. 당원 개개인의 능동적인 기획과 선전, 서로 북돋는 조직과 교육은 ‘꿈나라당’에나 있었다.
 
빠트린 것이 있는데 민노당의 특성에는 ‘뒤풀이당’, ‘술자리당’도 있다. 중요한 이야기는 언제나 거기서 나온다. 물론, 술 깨고 나면 서로 더럽게 눈치 본다.

둘러대고 싶을 때는 "고민하고 있습니다"
 
아랫것들이 무능하고 게을러도 어쨌거나 세상은 돌아간다,는 문장은 민주노동당에 딱 어울린다. 다만 개혁당과 차이가 있다면, 윗것들이 서로를 견제하면서 당내민주주의와 패권구도 사이에서 진동했다는 것이다. 개혁당원들에게는 ‘우리 당에 정파는 없다’는 자부심이 있었다. 그러나 개별적이고 파편적인 논쟁과 어쨌든 어지럽게 어우러진 그 구도 꼭대기에 유시민 등이 서 있었고, 그쪽이 결국 당을 좌지우지했다. 반면 민주노동당은 정파가 서로를 견제했고 명망가의 독재는 어려웠다. 허나 그 정파는 당원 개개인을 압도하고도 남는 집단주의적 논리로 채워졌으며, 토론은 상층으로 올라가서야 열띠게 진행됐다.
 
주변의 자주파 당원 중에 대선 후보 경선에서 심상정 후보를 지지했던 이들이 있었다. 그런데 어느날 권영길로 뒤집어졌다. 나름의 이유는 있을 것이다. ‘그래도 통일방안에 고민이 깃들어 있다’든가 ‘아직도 노동자의 강력한 대표’라든가. (그럼 “노회찬·심상정은 분단방안이라도 만들었냐”, “신문기자는 노동자의 대표지만 용접공이나 미싱사는 노동자가 아니라는 거냐”라며 따질 수는 있겠지만.) 그렇지만 솔직히 그것이 정파의 집단방침에 따른 결과임은 본인을 포함한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애초의 심상정 지지 역시 확정적인 것은 전혀 아니었고, 그들의 행동은 자주파 전국회의의 결정이 나오기 전까지 유보적이었다.
 
자주파는 조직적 결정의 측면에서 다른 정파와 도드라지게 달랐다. 모든 구성원이 참석가능한 회의를 거치는 법이 없었으며 표결 또한 없었다. 선배에게 속아 넘어간 어느 띨띨한 대학교 1, 2학년생, 일명 '운동권 꼬꼬마'에게나 들을 법한, ‘자주파라는 정파모임은 없다’라는 말 따위는 사양한다. 계룡산에 몇 명이 모여 권영길 지지를 선언한 ‘전국회의’라는 희한한 실체도 있었거니와, 원래 자주파는 당 이전과 바깥에 구성되어 시작되었다.
 
“고민하고 있(습니)다.” 새내기 시절부터 자주파 사람들에게 종종 듣던 대답이다. 2001년 나는 한총련을 따르는 한 선배에게 한총련 의장선거에서 부산대 총학생회장과 전남대 총학생회장 중 누가 더 나은 것 같은가를 묻고 나서 바로 그 대답을 들었다. 내 입장에서는 전자가 괜찮다며 슬쩍 떠보니 그도 과연 그런 입장이었다. “고민하고 있다”는 “섣불리 말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 하루는 노회찬 팬클럽에 전국학생위원장이 가입했다. 자주파의 경기동부연합쪽이었다. 가입자에게 자동적으로 주어지는 질문 “경선에서 누구를 지지하십니까?”에 그는 “고민하고 있습니다”라고 답했다. 이것은 “아직 방침이 내려오지 않았습니다”라는 뜻이다. 무슨 고민이 그렇게들 많으신지, “곰곰이 생각하니 내가 곰이네”의 경지였다.
 
자기 정파 내부의 민주적 의사결정과정도 생략, 타정파와의 깊은 대화나 논쟁도 생략. 나이트클럽으로 치면 민노당에는 홀은 없고 룸만 있었다. 그 룸 내부에는 또 룸이 있고 그 안에 또 룸이 있다. 진성당원제가 실시되고 대부분의 당직을 당원직선으로 선출했기에 민노당은 어떤 정당보다 민주적이었다.
 
▲ 민주노동당 당직자들이 지난해 12월 국회 외통위 회의실 앞에서 한미FTA비준동의안을 반대하는 플랭카드를 들고 연좌시위를 벌이고 있는 모습.     ©CBS노컷뉴스

하지만 민주주의가 어디 그런 절차만으로 이뤄지던가. 개혁당의 사례에서도 그랬듯, 절차와 절차 사이의 절차, 절차들 사이의 문화와 의식이 충족되지 않을 때, 이 얼마나 민주적인가 하는 감격은 곧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더 이상의 설명은 불필요할 것 같다. 사례를 더 들어야 하는가? 또 거론해야 하는가?

대내적 운영원리와 대외적 이미지의 괴리
 
상향식 과정이 생략된 정치로 인하여, 아랫것들도 정치를 생략하면서 놀던 대로 놀았을 수밖에. 전민항쟁을 꿈꾸든 뭐를 열망하든 간에 아랫것들은 독자성도 대중성도 없이 하던 일이나 잘하고 시키지 않으면 하지 않으며 고여 있으니, 윗것들은 정치인이란답시고 지도부 선거나 비례대표 선출 세팅이나 하면서 돌아다닐 수밖에.
 
그나마 자유분방하고 제 기획을 세우고 밝히기에 꺼림이 없던 이들도 이제는 민노당에서 거의 나갔다. 민노당은 여전히 친북당, 민주노총당, 데모당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진보신당보다 높은 지지율을 확보하고 있다. 국민들이 북한과 노조와 데모에 호의적이어서는 당연히 아니다. 기존에 확보한 지명도, 신뢰도에 강기갑, 이정희라는 스타정치인이 있어서 그나마 버티는 것이다. 고루함과 정체를 노회찬, 심상정이 얼마간 가려줬던 예전처럼. 민노당은  특정 인사가 독주하는 개혁당 같은 당은 아니었고 지금도 아니지만, 대내적 운영원리와 대외적 이미지가 따로 돌아가는 정당이다.
 
민노당에 있을 적 분회나 지역위에서 주최한 강연회의 뒤풀이 자리 풍경이 가끔 떠오른다. 그간 입당을 보류했거나 처음 찾아온 이가 당가입원서를 쓰고, 이를 지켜보는 참석자들이 손뼉을 치던 모습. 당활동가들은 이런 일이 자주 발생할수록 세상이 바뀔 것이라 믿었을 것이다.
 
그러나 2004년 이후 공교롭게도 민노당 당원수와 한국사회의 보수화는 비례했다. 세상은 차치하고 당의 질적 수준도 나아지지 않았다. 그렇게 입당한 분들은 다들 어떻게 지내실지 궁금하다. 당직선거를 한다며 연락을 드리면 귀찮다고 짜증을 내는 분들에게 당은 무엇이었을까. "XXX 의원이 우리 당에 있지요"라면서 꼬드긴 이들이 경선 시즌에 "XXX 찍으면 안 된다"고 했을 때는 어떤 생각을 했고 어떻게 넘어갔을까.
 
하루는 드라마 <선덕여왕>을 보는데 이런 대사가 나왔다. “진심이면 내가 변하고, 내가 변하면 세상이 변한다.” 진심 같은 건 묻지 않겠다. 다들 민노당을 만들면서, 민노당에 입당하면서 과연 얼마나 변하였을까?
* 글쓴이는 경북 구미시 시의회 의원(무소속)입니다.
2010년 6.2지방선거에서 영남지역 최연소(27세) 기초의원에 당선돼 현재 시의원으로 활동 중입니다.
2002년 <대자보> 필진으로 참여한 이래 다년간 정치칼럼 등을 연재해 왔으며, 새로운 모습으로 다시 <대자보> 독자들과 만납니다.
기초의원으로서 풀뿌리 정치 현장에서의 경험을 독자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블로그 : http://kimsoomin.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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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9/12/14 [18:48]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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