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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담 : 국가폭력과 싸우는 화가
[최을영의 시사인물 포커스] 용산 참사 연작을 준비하는 민중미술의 전사
 
최을영   기사입력  2009/10/26 [03:22]
야스쿠니, 일본 군국주의의 기억장치
 
"야스쿠니 신사는 일본의 우경화와 더불어 천황제 군국주의 정체성을 부활시키기 위한 '기억장치'로 이용되고 있다."1)

서승의 말이다. 서승은 또 "조선과 대만을 침략한 일본 사람에 끼어, 약 2만 8000명의 대만 사람과 2만 2000명에 가까운 우리나라 사람들이 야스쿠니에 갇혀 있다고 추정된다"며 "이들은 일본의 침략전쟁 수행에 내몰려 희생되었을 뿐만 아니라, 죽어서도 일본 군국주의를 찬양하는 신사에서 천황에 대한 충성을 맹세하면서 행군하는 '귀신부대'에 편입되어 있는 것이다."라고 말한다.2)

2005년 제작 발표된 독립영화 <안녕, 사요나라>는 바로 이 '귀신부대' 문제를 파고든다. <안녕, 사요나라>는, 아버지의 야스쿠니 신사 합사 취하 소송을 벌이고 있는 한국인 이희자 씨와, 일제 강점기 한국인의 피해보상을 위해 활동하는 일본인 후루카와 씨 등 2명의 주인공을 내세워 야스쿠니 신사에 내제된 이데올로기--군국주의, 일본 제국주의 침략전쟁의 정당화, 일본의 우경화 등으로 요약할 수 있겠다--를 철저히 파헤친다.

<안녕, 사요나라>를 보면 야스쿠니 신사와 관련된 문제가 결코 일본만의 문제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일본 총리가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강행할 때마다 이를 비난하는 여론이 동아시아 각국에서 나오는 것은, 야스쿠니 신사가 일본 군국주의를 상징함과 동시에 침략전쟁을 정당화하고 과거를 반성하지 않는 일본, 즉 과거를 미화하고 찬양하는 태도가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상태로 남아 있는 일본을 상징하고 있기 때문이다.   
 
야스쿠니의 미망(迷妄)
 
한편으로 야스쿠니 신사는 일본 내에서 금기 영역이다. <안녕, 사요나라>의 공동감독 김태일은 일본인 주인공 후루카와 씨를 설득하기가 어려웠다며 이렇게 말한다.

"후루카와 씨를 설득하는 데 두 달이나 걸렸다. 요즘 갈수록 일본의 우경화 경향이 강해지는 데다 일본인에게 있어 야스쿠니 신사는 곧장 천황과 연결되는 금기의 영역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야스쿠니를 다룬다는 것은 대단히 민감한 문제일 수밖에 없었다."3)


▲ 독립영화 <안녕 사요나라> 포스터     ©공식홈페이지
이처럼 야스쿠니는 일본인에게 금기의 영역이다. 그리고 한편으로 야스쿠니 신사는 일본인들을 억압하는 기제로도 작용한다. '5월의 화가'로 잘 알려진 홍성담이 야스쿠니 신사를 주제로 한 작품을 내놓게 된 계기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제가 수감생활을 할 때, 제 구명활동을 도와준 일본인 친구들이 많이 있어요. 이들과 친교를 맺다 보니 공통적으로 이들을 짓누르는 억압기제가 보이더군요. 그것이 보이는 순간 더 이상 가까워지기가 쉽지 않더라고요. 이들을 짓누르는 억압기제가 과연 뭘까, 궁금해하던 차에 5년 전 야스쿠니 신사를 방문하고 나서야 이것이 바로 내 친구들을 억압하고 있는 실체로구나, 하고 깨달았어요."4)

홍성담이 말하는 억압기제는 이런 것이다. 그는 우선 야스쿠니 신사를 "죽음을 위로·진혼하는 공간이 아니라 죽음을 미화하고 현창하는 곳"이라면서 일본인을 짓누르는 억압기제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야스쿠니는 죽음의 에로티시즘을 강조하는 곳이죠. 야스쿠니가 생산하는 죽음의 미학에 짓눌려 살아가는 현대 일본인들의 정신적 구조를 그리고 싶었습니다. 그들은 한 번도 스스로 슬프게 운 적이 없습니다. 전쟁에 끌려 나가 자식이 무의미한 죽음을 당했어도 어머니는 슬퍼하면 안 됐어요. 비극의 시간, 애도의 시간을 가져야 슬픔을 견뎌 나갈 수 있는 것인데, 일본인들은 충분한 자기위로의 시간을 갖지 못한 겁니다. 현대 일본의 이중적인 정신구조, 일본인의 속내와 겉모습이 다른 이유가 바로 여기 있다고 봅니다. 이번 전시에서는 개별 그림들의 의미도 중요하지만 그림 전체가 뿜어내는 아우라에 주목해주셨으면 해요. 현대 일본인들이 숨기고 있는 슬픔과 비극의 만가예요."5)   
 
국가폭력과의 싸움
 
홍성담은 2009년 8월 14일부터 31일까지 서울 견지동 평화박물관 건립추진위 평화공간에서 <야스쿠니의 미망(迷妄)>전을 열었다. 미망(迷妄)은 "사리에 어두워 갈피를 잡지 못하고 헤맴, 또는 그런 상태"를 말한다.

홍성담은 2006년 야스쿠니 연작을 처음 시작한 이래, 2007년 도쿄를 시작으로 2008년 제주, 2009년 서울에서 연달아 전시회를 열었다. 앞으로는 일본 오키나와와 독일 등을 순회하며 전시회를 열 계획이다.

서울에서 열린 전시회에는 기존의 작품 외에 한 작품이 추가됐다. <간코쿠 야스쿠니>라 명명된 이 작품에는 박정희와 전두환 등 전직 대통령과 삽을 들고 있는 이명박 대통령, 애국기동대와 방패로 무장한 전경들, 그리고 용산참사 현장이 등장한다. 그가 이 작품을 추가해 전시한 의도는 우리 안에 내재된 야스쿠니 이데올로기를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죽음을 미화하는 문화가 과연 야스쿠니에만 있는 것인가 생각해보면, 아닙니다. 일제 잔재를 척결하지 못한 '분단' 한국이나 대만, 일본 오키나와 등 동아시아 현대사의 질곡이 새겨진 곳에도 있더란 말이죠. 우리 안에 알게 모르게 숨어 있는 야스쿠니의 이데올로기를 그려내는 것으로 발전하게 된 것이 바로 <간코쿠 야스쿠니>입니다."6)

야스쿠니 이데올로기의 또 다른 이름은 바로 국가폭력이다. 한국도 국가폭력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홍성담은 <간코쿠 야스쿠니>를 통해 여실히 보여준다. 홍성담은 국가폭력과의 싸움이 자신의 평생 주제라고 말한다. 

"내 평생의 주제는 국가폭력과의 싸움입니다. …… 저는 국가폭력이 가능하도록 되어 있는 우리 사회의 시스템, 또 알면서 혹은 모르면서 이를 인정하는 인간의 나약한 모습, 국가폭력을 행사하는 이들의 정서적 감성, 그 피해자들이 겪는 고통스러운 일상을 화폭에 담아내고 싶습니다. 그것을 내가 할 수밖에 없는 숙명이라고 받아들이고 있습니다."7) 
  
가장 완벽한 세상을 보다
 
홍성담은 국가폭력과의 싸움을 평생의 주제라 말한다. 그 이유가 있다. 그 자신이 국가폭력의 희생자이자, 저항자였기 때문이다. 이제 그의 이력을 살펴보자.

1955년 전남 신안군 하의도에서 태어난 홍성담은 목포중학교과 목포고등학교를 거쳐 1974년 조선대학교 미대에 입학한다. 고교시절 문학도를 꿈꾸었으나 우연히 만난 화가 이병규의 강권으로 미대에 진학했다. 이 시절 그에게 미술은 큰 의미가 없었다. "미술은 샌님들이나 하는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8) 오히려 그에게 미술은 학비를 벌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다. 화가 이병규가 운영하는 화실에서 강사를 하면서 학비를 벌었고, 각종 공모전에 출품을 해 여러 차례 당선되기도 했다. 상금을 노리고 한 일이었다.

그런 그에게 변화가 온 것은 1978년이었다. 이해 결핵3기 진단을 받아 목포 근처의 요양소에 들어간 그는 그곳에서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마지막 수배자 윤한봉을 만나게 된다. 윤한봉과의 만남과 요양소에 있던 어느 노동자와의 만남을 통해 그는 자연스레 모순투성이인 사회로 시선을 돌리게 된다. '미술의 현실 참여'를 고민하게 된 것이다.

1979년 건강을 회복해 요양소에서 나온 그는 그해 9월 광주로 향해 백은일, 최열, 박광수 등과 함께 광주자유미술인협의회(이하 광자협)를 만들었다. 광자협은 후에 독재정권에 반발해 만들어진 전국 최초의 민중예술단체로 평가받았다.

1980년 5월 광주민주화운동이 발발하자 홍성담은 시민군 본부의 지휘 아래 플래카드와 대자보를 제작하는 등 일종의 문화선전대로 활동하게 된다. 광주민주화운동은 홍성담의 삶에서 빼놓을 수 없는 사건이었다. 죽음으로 점철된 그 참혹한 현장에서 살아남은 그는 곧 1980년 5월 광주에서 일어난 사건을 판화로 그려내기 시작했다. 그는 판화작업을 시작한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이 벌어지고 난 뒤에 독일, 일본, 미국, 스웨덴 등에서 광주에 지원을 많이 했습니다. 한데 광주민주화운동의 실상을 알릴 시각매체라고는 신문 보도사진 말고는 없어요. 그래서 판화 작업을 한 겁니다. 그 때문에 나를 일러 '5월화가'라고 하는데 그땐 작품이 아니라 '운동의 도구'라고 생각했어요."9)

그렇게 탄생한 것이 50여 점의 5월 판화 연작이었다. <대동세상>, <밥> 등 우리에게 잘 알려진 이 판화에서 그리는 1980년 5월 광주는 비극과 참극의 현장만이 아니다. 홍성담에게 그곳은 하나의 이상향이었다. 그는 당시의 광주에서 "가장 완벽한 세상을 봤다"고 술회했다. 또 그 기억만으로도 평생 행복하게 지낼 수 있다고도 말했다.10) 1980년 5월 광주는 참극의 현장이기도 했지만 '대동세상'을 실현한 현장이기도 했던 것이다.
 
▲ <대동세상>    

5월 연작 판화에 대해 소설가 서해성은 이렇게 평한다.

"5월 판화는 항쟁의 일상성까지를 간명하고 절제된 시선으로 부감해내고 있었는데, 사람들은 이를 통해 광주에서 학살만 있었던 게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기에 이르렀다. 삶의 온기가 흐르고 있는 이 연작 판화는 항쟁의 진실만이 아니라 나중에 이 땅의 민주화 운동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가치까지 형상화하고 있었던 것이다. 작가는 이를 '대동세상'이라 이름 하였다."11)   
 
민족해방운동사
 
홍성담은 1980년대를 대표하는 민중미술가 중 들머리에 서 있었다. 그는 1985년 11월 민족미술협의회(민미협) 결성을 주도했고, 1987년 6월항쟁에서 적극적인 문화선전 활동을 펼쳤다. 그리고 6월항쟁 기간 동안 민미협이 미온한 태도를 보이자 이를 비판하고 1988년 9월 민족민중미술운동전국연합(이하 민미연) 건설준비위원회를 결성하기에 이른다.

당시까지 그에게 미술은 민주화를 쟁취하기 위한 운동의 도구였고, 홍성담은 그 도구를 활용해 문화운동을 펼쳐나갔다. 특히 이때쯤 그는 통일문제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는데 그렇게 탄생한 작품이 <민족해방운동사>였다.

민미연 건설준비위 공동의장에 취임한 홍성담은 곧 민미연 산하 예술패들과 함께 동학혁명부터 6월항쟁까지의 사건을 담고 있는 <민족해방운동사>를 만들기 시작했다. 총 길이 77m, 높이 2.4m의 대형 걸개그림이 완성된 것은 1989년 3월이었고, 1989년 4월 서울대에서 개막제를 갖고 이 작품을 공개했다.
 
그는 이 자리에서 "<민족해방운동사>를 평양축전에 보내 문화의 자주교류를 쟁취하겠다"는 뜻을 보였다.12) 그리고 그 뜻대로 홍성담은 이 작품을 슬라이드로 만들어 1989년 7월 평양에서 열린 세계청년학생축전에 보냈다. 이 일로 인해 홍성담은 그해 7월 31일 안기부에 끌려가 20여 일 동안 물고문을 당했고, 안기부는 홍성담을 한국 미술계에 침투한 간첩으로 조작한다.

1990년 1월 열린 1심 재판에서 홍성담은 국가보안법상 간첩·국가기밀누설·회합통신 등의 혐의로 징역 7년형에 처해졌고, 1990년 6월 열린 항소심에서도 원심이 확정됐다. 1990년 9월 열린 상고심에서는 이적표현물 제작과 찬양죄 등만을 인정해 징역 3년형에 처해졌다. 그리고 3년 4개월간 옥살이를 한 끝에 1992년 출소한다.

그 사이 홍성담은 국제적인 양심수가 되었다. 국제앰네스티 본부는 1990년 그를 '올해의 양심수 3인'으로 꼽았고, '양심수를 위한 독일 함부르크 재단'은 그의 판화전을 개최했다. 세계의 인권단체들이 그의 구명활동에 앞장섰다.

감옥에서 나온 뒤 홍성담은 본격적으로 창작에 몰두한다. 미술을 더 이상 운동의 도구로만 생각하지 않게 된 것이다. 그의 말을 들어보자.

"출소 후 외국에서 매일 두어 장씩 편지가 날아드는데 하나같이 '이제 석방됐으니 좋은 작품을 볼 수 있길 바란다'고 쓰여 있는 겁니다.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자고 그때 마음먹었죠."13)

이후 그는 창작활동에 몰두해 1999년 서울가나아트센터에서 <1999·탈옥>전을 개최했다. 안기부에서 당한 물고문의 기억과 감옥생활 등을 예술로 형상화한 이 전시회는 평론가들로부터 호평을 받았고, 상업적으로도 성공했다. 또 민중미술은 예술성이 떨어진다는 비판도 잠재웠다.   
 
과거를 향한 칼날
 
국가폭력과의 싸움을 평생의 주제라고 말하는 홍성담은 앞으로 용산 참사 연작을 준비할 계획이다. 용산 참사를 천박한 욕망의 자본주의가 일으킨 서울의 5월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용산 참사는 천박한 욕망의 자본주의가 일으킨 서울의 '5월'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국가폭력과 달리 우리들 스스로가 바로 학살자이면서 피해자이죠. 한국 중산층의 애달프고도 무서운 욕망의 칼날이 숨겨져 있는 사건이라고 볼 수 있는 겁니다. 오묘하죠. 예술가는 냉혹한 사형집행자가 되어야 하지만, 가끔 그런 태도를 견지하기가 곤혹스러울 때가 있는데 용산 참사 역시 그래서 더욱 어려운 작업이 될 것 같아요."14)

한국 중산층의 애달프고도 무서운 욕망의 칼날이라는 말에 주목하자. 그는 2008년 8월 『말』지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이명박이 대통령이 된 것은 우리가 자처한 일이다. 예술가로서 다른 각도로 풀어보면, 우리의 정치의식과 삶의 태도는 상당히 괴리되어 있다. 정치의식은 발전해 있지만 근본적인 삶의 태도와 인간으로 살아야 되는 본질은 아닌 것이다. 산업화, 민주화를 급하게 이루면서 삶의 본질을 간과했다. 이명박이 대통령이 된 것은 본질과 상관없이 삶의 태도만으로 선택한 게 아닌가. 정치와 삶이 분리돼 나타난 결과다. …… 굿에서 잡신을 쫓아낼 때 무당은 칼춤을 춘다. 하지만 칼을 무조건 휘두르는 게 아니다. 먼저 무당은 자기 목과 가슴에 칼끝을 겨눈다. 몸속에 들어와 있는 악마, 나쁜 자기를 다스린 다음에 칼끝을 밖으로 향한다. 이번 촛불을 전체 굿으로 볼 때 과거를 향한 칼날이 부족하다. …… 어른들은 자신의 삶의 태도에 대해 반성해야 했다. 이명박이 그런 협상을 하고, 대운하를 마음대로 하는 것이 우리들의 의식구조다. 얼마나 천박하고 미천한지, 제정신이 아니면 그렇게 할 수 있겠느냐. 우리의 의식구조가 그렇게 천박하다. 이명박이 대통령이 되면 공짜 돈이 생기지 않겠느냐. 내가 사놓은 아파트가 이명박 정권 내에 2~3배 뛰지 않겠느냐는 의식구조가 만든 것이다."15)

홍성담은 학살자이자 피해자인 우리, 정치의식과 삶이 괴리된 우리를 먼저 반성하자고 얘기한다. 과거를 향한 칼날이 부족하다고도 얘기한다. 그가 용산 참사를 한국 중산층의 애달프고도 무서운 욕망의 칼날이 숨겨져 있는 사건으로 보는 것도 이 때문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홍성담은 1980년 5월 광주에서 '대동세상'을 보았다. 가장 완벽한 세상을 본 그가 '천박한 욕망의 자본주의'가 지배하는 2009년 대한민국의 현실을 어떻게 그려낼 것인지 궁금하다. 이것이 용산 참사 연작이 기다려지는 이유다.

* 본문은 월간 <인물과 사상> 2009년 10월 호에 실렸습니다. 


[각주] 
1) 서승, 「우리에게 '야스쿠니신사'는 무엇인가」, 『내일을 여는 역사』, 2006년 여름호, 119쪽.
2) 서승, 「우리에게 '야스쿠니신사'는 무엇인가」, 『내일을 여는 역사』, 2006년 여름호, 125쪽.
3) 최진아, 「"아시아 평화 실현 방법 찾고 싶었다"」, 『민족21』, 2005년 8월호, 157쪽.
4) 윤민용, 「"죽음을 슬퍼 못하는 현대 일본인들의 만가다, 야스쿠니는"」, 『경향신문』, 2009년 8월 26일, 26면.
5) 윤민용, 「"죽음을 슬퍼 못하는 현대 일본인들의 만가다, 야스쿠니는"」, 『경향신문』, 2009년 8월 26일, 26면.
6) 윤민용, 「"죽음을 슬퍼 못하는 현대 일본인들의 만가다, 야스쿠니는"」, 『경향신문』, 2009년 8월 26일, 26면.
7) 윤민용, 「"죽음을 슬퍼 못하는 현대 일본인들의 만가다, 야스쿠니는"」, 『경향신문』, 2009년 8월 26일, 26면.
8) 신준영, 「통일화가 홍성담」, 월간 『말』, 1990년 9월호, 88쪽.
9) 윤민용, 「"죽음을 슬퍼 못하는 현대 일본인들의 만가다, 야스쿠니는"」, 『경향신문』, 2009년 8월 26일, 26면.
10) 이동권, 「"과거를 향한 칼날이 부족하다"」, 월간 『말』, 2008년 8월호, 115쪽.
11) 서해성, 「'1999·탈옥(脫獄)': 홍성담전으로 읽는 21세기 현실주의 미학」, 『당대비평 08』, 1999년 9월, 354~355쪽.
12) 신준영, 「통일화가 홍성담」, 월간 『말』, 1990년 9월호, 92쪽.
13) 윤민용, 「"죽음을 슬퍼 못하는 현대 일본인들의 만가다, 야스쿠니는"」, 『경향신문』, 2009년 8월 26일, 26면.
14) 윤민용, 「"죽음을 슬퍼 못하는 현대 일본인들의 만가다, 야스쿠니는"」, 『경향신문』, 2009년 8월 26일, 26면.
15) 이동권, 「"과거를 향한 칼날이 부족하다"」, 월간 『말』, 2008년 8월호, 118~1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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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9/10/26 [03:22]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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