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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년 만에 밝혀진 '여수·순천사건'의 진실…
진실화해위 "민간인 439명, 군인·경찰에 의해 사살"…책임은 대통령에 귀속
 
이석주   기사입력  2009/01/08 [13:13]
'제주 4·3사건'과 함께, 이념대립에 따른 민족사의 최대 비극으로 기록돼온 '여수·순천사건'이 60년 만에 진실의 베일을 벗게됐다. 당시 민간인 439명이 군인과 경찰에 의해 집단 사살된 사실이 진실화해위원회에 의해 8일 밝혀진 것.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위원장 안병욱)는 이날 "지난 1948년 전남 순천지역에서 발생한 여순사건과 관련해 민간인 439명이 국군과 경찰에 의해 불법적으로 집단 희생된 사실을 밝혀냈다"고 전했다.
 
▲ 여순사건 당시 반군 협력자 색출을 위해 진압군이 주민들을 학교에 집결시키고 있는 장면 사진. 출처 : <LIFE>, 촬영일 : 1948.11.1, 사진기자: 칼 마이던스   (진실화해위원회 제공)

'여순사건'은 1948년 10월19일 이 지역에 주둔 중이던 좌익 장교들이 '제주 4·3 사건' 진압 명령에 불복종해 반란을 일으킨 사건으로, 당시 많은 양민이 정부의 진압 과정에서 학살됐고, 이승만 정권이 국가보안법을 제정하는 등 반공정책 강화의 계기가 됐다.
 
진실화해위에 따르면, 1948년 10월 말부터 1950년 2월까지 순천시와 그 일대에서 국군 5개 연대와 순천경찰서 경찰관들이 주민을 불법적으로 집단 사살한 것으로 드러났다.
 
다만 이번에 드러난 민간인 희생자 439명 외에, 진실규명을 신청하지 않거나 사건이후 멸족된 사례 등을 고려하면 실제 희생자 수는 2천여 명을 상회할 것으로 추정된다고 진실화해위는 밝혔다.
 
진실화해위는 "당시 희생자들은 반군에게 숙식을 제공했다거나 작전지역에 거주한다는 이유, 반군에 가담했다는 혐의, 무고와 모략 등의 이유로 희생됐다"며 "이 과정에서 무차별적인 연행과 불법적인 취조·고문이 있었다"고 설명했다.
 
아울러 "마을을 불태우고 반군 협조 혐의가 있는 민간인의 친인척에게 해당 민간인을 척살(흉기로 사람을 찔러 죽임) 하도록 시키거나 군경이 민간인을 살상한 뒤 전과를 허위보고한 경우도 있었다"고 전했다.
 
진실화해위는 "당시 군경이 민간인을 살해 근거로 내세운 계엄령도 법적 근거 없이 공포되었다"며 "현지 지역 사령관은 자의적 판단아래 민간인을 반란 동조자라는 혐의만으로 불법 연행해 살해했다. 이는 명백한 학살 행위"라고 결론내렸다.
 
이와 관련, "여순사건이 현지 토벌작전 지휘관의 명령 아래 발생했지만, 최종적인 감독 책임은 국방부와 대통령, 국가에 귀속된다"고 밝혔다.
 
진실화해위원회 김동춘 상임위원은 "대한민국 60년은 여순사건을 기점으로 형성된 '여순체제' 60년이었다"며 "한국의 정치와 사회를 바로 알려면 반드시 여순사건을 알아야한다"고 덧붙였다.
 
앞서 진실화해위원회는 '보안기록조회회보서'와 '사실조사서'등의 정부기록 조사를 통해 여순사건 관련 희생자를 확인했으며, 사건의 생존자와 목격자, 당시 진압에 동원됐던 국군 제2연대 정부군 장교 및 사병, 경찰에 대한 진술조사를 실시해 왔다.

▲ 진실화해위원회가 조사한 당시 민간인 피해 진술
 
1. 서면지역 세동마을 박00(75)
"비가 많이 오는 저녁 10명 내외의 산사람 행색을 한 사람들이 마을에 와 강 반장이라는 사람의 집에 들렀어요. ‘예전에 밥을 해줘 고마워 은혜를 갚겠다’고 하며 밥을 해준 사람들의 집을 알려달라고 한 거지. 강 반장은 몇 사람의 집을 알려주었고"
 
"밥을 해준 것으로 밝혀진 마을 주민들은 여자와 아이를 포함한 가족까지 전부 인근 앵기산으로 끌려가 몰살당해…
 
2. 서면지서 학구출장소 ㄱ○○
"치안확보를 위해 불가피했던 일이었다", "군경이 혐의가 있는 민간인을 기소하지 않고 즉결처분한 것은 명백한 불법행위였다", "즉결처분을 자제하려고 했는데 쉽지 않았다"
  
3. 승주읍 유흥리에서 경찰에게 수색당한 정○○씨

"제가 열여섯살이었는데 (…) 우리 집에는 어머니와 저만 있었는데 순경 한 명이 집에 들어왔어요. 어머니가 저만 남겨두고는 못 나가겠다고 마당에서 버텼어요. 그러니까 그 순경이 어머니를 총으로 쐈어요. (…) 100일도 안된 막내동생이 있었는데 어머니가 죽고 나서 젖을 못 먹어 그해 음력 11월에 죽었어요…"

<대자보> 사회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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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9/01/08 [13:13]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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